미리보기

국립현대무용단 <카베에>
잠재적 상태의 현대무용
안무가 황수현은 이 작품을 통해 프로시니엄 극장의 제한된 보기 방식을 넘어설 대안적 가능성을 모색하고,
이례적으로 대규모 무용수의 군무를 무대에 올린다.
이는 결국 공연예술의 현재적 의의를 조명하고 그것의 미래라는 화두를 우리 앞에 놓는 작업이 될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과 국립극장이 공동 주최하는 황수현 안무가의 신작 <카베에>가 오는 4월 7일부터 9일까지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무대에 오른다’는 표현이 이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다만 비유적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카베에>는 기존 해오름극장의 객석을 사용하는 대신에 무대 위에 원형 객석을 설치해 관객의 자리를 퍼포머의 자리와 나란히 배열함으로써, 무대예술이라는 형식과 그에 대한 참여 행위가 지닌 원형성을 탐색한다. 공연하는 몸과 공연을 보는 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감각적 경험을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안무가 황수현은 이번 신작을 통해 오늘날, 구체적으로는 코로나 ‘이후’ 극장의 의의와 가능성을 재고한다.

잠재적 상태

공연 타이틀인 <카베에Caveae>는 동굴cave의 어원으로 텅 빈 공간, 물체에 난 구멍 등 공동空洞, cavity을 의미하는 라틴어 '카베아cavea’의 복수형이다.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용례를 살펴보면 이 단어가 공연이라는 행위와 맺는 연관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카베아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원형극장에서 무대를 에워싼 자리, 즉 ‘객석’을 이르는 말로 그 자체로 극장을 지시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우리 신체에서 구강, 안와眼窩와 같이 말을 하거나 보는 기능과 관련된 기관 일부가 자리하고 있는 통로나 움푹 파인 공간을 가리키는 해부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단어가 지시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어떤 현상을 가능케 하는 조건, 혹은 그를 위해 마련된 예비적 공간으로서 대상의 잠재적 상태를 표시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이름이라기보다는 괄호 자체를 가리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카베에>라는 제목이 지닌 복수성, 즉 하나가 아닌 여럿에 대한 함의는 단일한 시점으로 통합하거나 동일시될 수 없는 다양한 감각과 양태에 대한 긍정이자 상이하게 배치된 자리 사이에서 공통의 장소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관-객의 경우만 하더라도 공연자에게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이자 특정할 수 없는 대상으로 괄호 속에 묶이지만,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각자의 입장에서 공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해석하는 경험의 주체로서 자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안적 가능성의 모색

그 자신이 오랜 시간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춤-공연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를 지속해 온 안무가 황수현은 신작 <카베에>를 통해 공연예술의 현재적 의의를 조명하고 그것의 미래라는 화두를 던진다.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고유한 조건 안에서 몸과 몸이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전작을 통해 공연에 대한 형식적 실험과 그 바탕이자 재료medium로서 몸의 작동 방식을 추적해 온 황수현 안무가는 특히 신체 경험의 잠재성에 주목해 춤을 추는 것과 보는 것, 무대와 객석, 물질과 비물질, 허구와 실제 등 공연예술에 배치된 오랜 이항대립적 관계 사이의 거리를 정밀하게 조율함으로써 새로운 감각적 형태를 포착하는 데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전작에서 이어온,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무언가를 함께 보는 경험에 대한 관심을 이번에는 대극장 무대로 확장한다.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와 경도에 따른 정면성을 기반으로, 액자 형식의 스펙터클을 제시하는 프로시니엄 극장의 제한된 경험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관습적 방식의 보기를 중단함으로써 출현할 수 있는 스펙터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의 신체적 만남

<카베에> 공연은 안무적 관점에서 새로운 만남의 형태를 구상하기 위해 다양한 신체 양태가 관계 맺는 방식과 그러한 행위 능력이 지닌 역학에 주목한다. 디지털 혁명과 장기간 지속된 팬데믹의 영향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기존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대면 만남을 자제하고, 대신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방식으로 소통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이렇듯 만남의 방식과 태도가 급변하는 시점에서 사람들이 한자리에 군집한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어떤 경험과 의미를 발생시킬까? 신체적 만남에 대한 요구는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향수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전위적인 제스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해 안무가를 중심으로 구성된 리서치 팀은 2022년부터 약 1년간 작품의 구상에서부터 세부적인 실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태스크를 수행하며 예술적 연구를 진행해 왔다. 우리는 공동의 경험을 이루는 기반으로서 공통 감각의 작동 방식을 조사하고자 가장 원시적 형태의 공간성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해 정동적 효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체 활동을 수행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기입되고 전달되는 감각의 흐름과 공명을 추적했다. 이후 일주일간 진행된 오디션 과정을 통해 선발된 무용수가 합류하면서 <카베에> 공연에서는 현대무용에선 이례적일 만큼 많은 인원인 총 39인의 무용수가 군무를 선보인다.

이번 공연 연출의 특징은 대규모 인원의 무용수가 등장한다는 것 외에도 해오름극장의 객석 공간을 비우고 원형 객석을 설치해 관객의 자리를 무대 위로 이동시킨다는 것이다. 무대 공간을 둘러싸고 퍼포머와 관객을 같은 레벨에 배치함으로써 이 공연은 기존의 극장 경험과는 다른 대안적 체험 환경을 마련한다. 배열을 달리해 구조를 변경함으로써 익숙한 방식에 균열을 가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객석에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프로시니엄 무대의 높은 층고와 무대 이면의 너비를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겠지만, 그러한 공간성이 주는 압도감과 깊이감은 퍼포먼스에서 일어나는 감각 작용과 정서적 공명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무대화된다. 이러한 미장센을 통해 <카베에>는 안무적 스펙터클 자체, 화려한 테크닉이나 아름다운 움직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여럿이 모여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의 본래적 의의를 발견하고 이에 가담하는 비판적 실천의 가능성을 도모한다.

공연은 가장 현대적인 예술 실험이 행해지는 장이자 태곳적부터 의례·스포츠·경연·축제 등 인간의 사회적 삶을 형성하고 문화의 생산과 전승을 담당하는 기능을 수행해 왔다. <카베에>는 과거와 미래, 예술과 사회가 교차하는 지점인 극장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이 시대에 요구되는 배려의 감각이 무엇인지 묻는다. 서로 다른 몸-존재들이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와 방식을 갖추어야 하는가? 한 편의 공연을 위해 무대 위로 함께 모인 다양한 개체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자기 앞으로 난 잠재성과 비가시성의 깊은 통로를 통해 관습적인 극장 경험과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상연에 이르기까지, 예술가와 스태프를 비롯해 다양한 배경과 이력을 가진 전문 무용수들 나아가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에 이르기까지,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아상블라주Assemblage가 무대 위에서 어떠한 역동성을 발생시킬지 기대된다. 인지과학자 알바 노에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경험은 세상 속에서 타인들과 어우러져 펼치는 한판의 춤"(Alva Noë, Out of Our Heads, 2009)이니 말이다.

글. 백인경 공연예술의 관점에서 동시대 다양한 현상을 관찰하고, 비판적 실천이자 예술적 방법으로서 예술적 연구의 가능성을 도모한다.
사진. unders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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