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국립국악관현악단 <탐하고 탐하다>
시대를 관통해 이정표 세운 음악
사람으로 치면 MZ세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29년은 지난한 개간 사업 기간이었다.
스물아홉 해 동안 척박한 ‘음악적 토양’을 가꾸기 위해 부지런히 토대를 다졌다. 전통 위에서 동시대와 호흡할
‘창발성’을 가진 작곡가를 발굴하고, 역량 있는 지휘자와 호흡하며 실험과 파격이라는 거름을 줬다.

‘시간의 역사’ 속에 음악이 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시간 동안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 그 과정에 악단이 위촉한 ‘국악관현악’ 작곡가들이 있다. 작곡가를 찾아 위촉하고, 신작을 개발하고, 시대성을 담은 공연을 올리며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그 중심에 있는 작곡가가 악단의 초대 단장을 지낸 박범훈(75)과 김대성(56), 황호준(51)이다. 세 사람과 함께 국립국악관현악단은 3월 31일 <탐하고 탐하다>를 무대에 올린다.

공연이 흥미롭다. 2012년 국립극장 레퍼토리 시즌제 도입 이후 무대에 오른 공연 중 ‘연주 횟수 톱3’에 드는 작곡가들의 곡과 이들의 신작이 어우러지는 무대다. 서로 다른 세대의 작곡가들이 만든 국악관현악의 어제이면서 오늘이자 내일의 음악이 자연스럽게 담긴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황호준은 “그 시절 가장 첨예했던 창작의 에너지가 응축된 곡들 중 시간을 쌓아 반복해, 당대의 현재와 끊임없이 만나게 하는 작업”이라며 “우리식 클래식이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성찰이 담겼다”라고 말했다.

3인 3색 ‘신작 열전’

“작곡은 자기 생각을 소리로 쓰는 소설이에요. 이야기를 소리로 만드는 거죠.” (박범훈)

오선지 위에 적힌 소설엔 작곡가 개인의 역사가 담긴다. 박범훈은 “음악을 만드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가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 안에 가진 것이 나오는 작업”이라는 의미다. 신작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각기 다른 세 작곡가는 저마다의 유산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국악관현악 역사상 전례 없던 시도(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가기게’)가 나오고, 치열했던 역사의 한복판에서 오늘을 반추(교향시 ‘동양평화’)하고, 개인의 사유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에렌델’). 세 작곡가의 신작은 이들이 꾸준히 탐구해 온 지난 음악의 확장판이자, 지금 추구하는 음악의 완성본이다.

박범훈은 스스로가 ‘국악관현악의 역사’다. 무수한 시간을 함께하며 실험하고 도전했다. 그 과정에서 한계에 직면했고, 그럼에도 ‘국악 대중화’의 꽃을 피웠다. 태동과 번성을 함께 했고,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해야 하는 지금 그는 “국악관현악은 국악관현악이어야 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국악관현악의 본질과 정체성을 고민해야 할 때라는 것이 원로 작곡가가 제시한 방향이다. 이런 고민과 함께 “사물놀이, 춤, 합주 등 가무악을 함께 할 수 있다”라는 국악관현악만의 특징을 바탕으로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최초’로 썼다. 박범훈이 꾸준히 이어온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기도 하다. 작품의 제목인 ‘가기게’는 해금의 가락을 구음으로 표현한 소리다.

곡에선 새로운 구성이 나온다. 현악을 구성하는 각 파트가 ‘솔리스트’가 된다. 민요 형식을 가져와 각 파트가 각기 다른 템포로 주제를 반복한다. 빠른 템포로 돌입할 때, 주제 선율이 나오면 ‘얼쑤’라고 외치는 것도 관전 포인트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극장 안이 추임새로 가득 차는 시간이다. “국악관현악의 멋은 같이 느끼고 놀아주는 데에 있어요. 지금은 모든 관객이 극장 안에서 숨죽이고 들어야 하잖아요. 국악관현악답게 관객과 호흡하는 곡을 쓰게 됐어요.”

위촉 작곡가 박범훈

우리 역사를 꾸준히 탐구해 온 김대성은 이번엔 구한말로 향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서 영감을 받은 교향시 ‘동양평화東洋平和’다.
이 곡은 국악관현악 사상 가장 인상적인 출발로 남을 만한 곡이다. ‘동양평화’는 7발의 총성으로 시작한다. 새로운 형식의 시도가 ‘미래지향적’이다. 전체적인 구성은 ‘영화음악’을 떠올리게 한다. 15분 40초 분량의 교향시는 8발의 총알을 장착하고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마주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다.

“이 곡을 쓰는 내내 안중근이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를 고민했어요.” (김대성)

‘고민의 해답’을 찾으며 곡 작업도 마무리됐다. ‘동양평화’엔 그가 작곡한 ‘평화의 동기’가 반복·변주되며 한·중·일의 평화로 나아간다. 무겁고 진중한 역사이나 그는 “곡은 발랄하고 흥미진진한 부분이 많다”라고 했다. “대장간의 합창처럼 총소리가 울리고”, 한국의 아리랑을 비롯해 일본과 중국의 민요를 차용해 음악을 풀어갔다. 메시지도 명확한 곡이다.

“역사를 기억하고 반추하는 과정을 통해 역사는 반복된다는 점을 마주하게 됐어요. 이 음악이 애국심을 고취하면서도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이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어요.” (김대성)

위촉 작곡가 김대성

황호준의 음악은 ‘요즘 국악관현악’이다. 첨예한 논쟁이자 탐구 대상이 됐던 ‘국악관현악법’이나 ‘국악관현악의 정체성’도, 역사 인식을 담은 거대 담론도 내려놨다. 그는 “조금 더 사적 작업으로 깊이 들어가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른 결”인 신작 ‘에렌델’을 내놓았다. “별이 잘 보이는 집에서 바라본 밤하늘에서 발견한 희미한 별 하나”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에렌델’은 고대어로 새벽별, 떠오르는 빛을 의미한다.

“어느 날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별 중 가장 오래된 별이 발견됐다는 뉴스를 보게 됐어요. 지구에서 129억 광년 떨어진 최장 거리의 별이죠. 나사는 이 별은 초기 별이라 1억 년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소멸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밤하늘엔 지금에야 빛이 도달하지만, 이미 생명을 다해 사라진 별도 보여요. 불교에서 말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인 거죠.” (황호준)

눈앞에 있지만, 사라진 별을 마주하며 ‘시간의 개념’을 고찰했다. 황호준은 “암흑 속에서 태초의 빛이 시작된 순간을 상상하면 고요하고 겸손해지며, 욕망은 하찮아진다”고 했다. ‘에렌델’은 “그런 상태로 떠오르는 현재의 생각이 최대한 반영된 곡”이다. 우주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생성되고 소멸한 별의 이야기에선 “다이내믹의 극단적 대비”는 물론 “소리의 잔잔한 기운을 통해 고요라는 사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위촉 작곡가 황호준

지금, 이곳의 이야기…“모든 것이 오늘의 음악”

신작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세 작곡가는 각기 다른 고민을 안고 있었다. 고민의 방향은 달랐지만, 그 안에서 공통점이 발견됐다. ‘지금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켜켜이 쌓인 어제 속에서 ‘지금의 오늘’을 꺼내놓는다.

완성된 신작에선 세 명의 작곡가가 바라보는 ‘오늘의 국악관현악’을 만나게 된다. 각 세대의 작곡가들은 국악관현악의 정체성(박범훈)을 고민했고, 주제의식(김대성)을 발현했고, 음악의 본질(황호준)에 더 깊이 다가섰다.

박범훈은 “세 작곡가의 곡에선 저마다의 시대성을 만나게 되는 재밌는 경험이 되리라 본다”고 말했다. 장구한 시간의 길이 안에서 국악관현악은 그것의 형식과 음악을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이전 세대는 국악관현악을 정립하기 위해 틀을 주장하지만, 지금의 세대는 모든 것을 초월해 작곡가의 생각을 관현악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때가 됐어요. 서양 오케스트라에선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며 관현악의 본질에 맞게 가야 한다고 고민하지 않잖아요. 그것이 국악관현악이 가야 할 궁극적 방향성이기도 해요.” (박범훈)

<탐하고 탐하다>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작업이 공존하는 무대다. 세 작곡가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지금의 음악”이라고 강조한다.

황호준은 “우리의 모든 작업이 지금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50년 전의 음악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메뉴를 만들어 듣는 것”이라며 “우리는 끊임없이 현재에 살고 있고, 작곡가든 연주자든 그 시점에 첨예했던 것을 최선을 다해 담아내면 그것이 예술 행위의 총체적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70대의 박범훈도 50대의 김대성과 황호준도 지금의 작품을 쓴 거예요. 이것이 내일이면 미래가 되는 거죠. 과거의 곡을 지금의 곡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이 생명력을 가진 거라고 봐요. 우리는 지금의 음악을 썼으니, 국악관현악도 여기에서 시작하면 돼요. 이 곡들이 관객들과 호흡해 오래오래 ‘오늘의 곡’으로 연주된다면, 그 안에서 과거와 미래를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박범훈)

  • 원영석 지휘 공연 <2018 마스터피스-황병기>
  • 지휘 원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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