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하나

국립창극단 <정년이>
강렬한 여성 서사의 무대화
강렬한 여성 서사로 주목받은 네이버웹툰 ‘정년이’(글 서이레, 그림 나몬)가 창극으로 관객 앞에 선다.
1950년대 여성국극이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 한 배우의 성장기를 그린 이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여성국극이 지닌 과거의 영광이나 창극이라는 장르적 특성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이는 한 여성과 사회의 성장이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여성국극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여성만으로 구성된 창극을 지칭한다. 여성 소리꾼들이 남성 중심의 국악계에 반발해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면서 태동한 여성국극은 1950년대 전성기를 맞는다. 특히 남역男役 배우들은 여성 팬으로부터 선물은 물론 혈서 팬레터 공세에 시달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오늘날 열성 팬을 몰고 다니는 아이돌 스타의 원조인 셈이다.
하지만 1950년대 말부터 영화와 텔레비전이 빠르게 보급되자 여성국극은 시대 감각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급속히 쇠퇴했다. 전국에 생겨난 15개의 단체도 점차 사라졌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전통문화 보존 및 계승 정책을 펼 때도 여성국극은 철저히 배제됐다. 이후 몇몇 1, 2세대 배우를 주축으로 재기의 몸부림이 있었으나 노인 관객의 향수를 달래는 데 그쳤다. 미혼 여성으로만 이뤄진 일본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건재하며 110년째 인기를 누리는 것과 비교하면 안타깝다.
사실상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던 여성국극은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예술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에서 페미니즘과 문화운동 세례를 받은 여성 아티스트들이 졸업 후 여성국극을 다룬 작품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젠더 문제에 천착해 온 미디어 아티스트 정은영이 2008년부터 진행한 <여성국극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정은영은 여성국극 소외의 역사를 추적하는 한편 젠더 정치학에 기반한 퍼포먼스를 잇달아 선보였다. 그리고 2013년 김혜정 감독의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 2019년 퍼포먼스 <드랙×여성국극: 춘향전>과 웹툰 ‘정년이’(2019년 4월~2022년 5월 연재), 2022년 여성국극제작소의 <삼질이의 히어로> 등이 여성국극을 다루며 주목받았다.
특히 1950년대 서울의 여성국극단을 배경으로 국극 배우가 되고 싶은 목포 소녀 정년이와 동료 단원의 성장기를 그린 웹툰 ‘정년이’는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으며 여성국극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높은 화제성에 힘입어 드라마화가 결정된 가운데, 국립창극단이 앞서 <정년이>를 창극으로 선보인다. 요즘 웹툰이 드라마나 영화의 원천 소스가 되고 있지만, 창극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정년이>가 처음이다.

여성이 중심에 선 서사

웹툰 ‘정년이’가 강렬한 여성 서사로 호평받은 만큼 창극 <정년이>의 주요 제작진 면면도 화려하다. 연출가 남인우가 연출과 함께 김민정과 공동으로 대본에 참여했으며, 이자람이 작창을 맡았다. 창극 <정년이>의 연습이 한창인 국립극장에서 남인우와 김민정을 만나 작업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두 사람은 그동안 음악극 <브루스니까 숲의 노래>와 연극 <불꽃놀이> 등에서 연출과 작가로 호흡을 맞춘 바 있지만, 공동 대본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출가 남인우는 2002년부터 어린이청소년극단 북새통을 이끌며 <가믄장 아기> <소년이 그랬다> 등 다양한 어린이청소년극으로 주목받는 한편 이자람과 <사천가> <억척가> 등 창작판소리를 만들며 스펙트럼을 확장해 왔다. 국립창극단과는 2013년 창극 <내 이름은 오동구> 연출에 이어 2021·2022년 젊은 소리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절창> <절창Ⅱ>의 구성 및 연출을 맡았다.
“오래전 케이블 TV에서 여성국극을 봤을 땐 재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친분이 있던 정은영 작가의 작업을 보면서 여성국극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다만 국립창극단의 <정년이>는 여성국극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국극을 소재로 정년의 성장기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남인우)

연출, 공동 극본 남인우

극작가 김민정은 200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연극 <브라질리아> <바다거북의 꿈> <브루스니까 숲>과 오페라 <아랑>, 음악극 <브루스니까 숲의 노래> 등의 대본을 썼다. 지난해 연극 <산을 옮기는 사람들>(연출 최진아)로 차범석희곡상을 수상했다. 국립창극단과는 2021년 창극 <흥보展>의 드라마투르그로 인연을 맺었으며 지난해 작창가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저도 2000년대 중반 방송작가 시절 라디오 드라마 때문에 여성국극의 마지막 세대를 취재하고 대학로 소극장에서 직접 공연을 보기도 했는데요. 당시에는 ‘올드하다’는 느낌이 컸어요. 그런데 남인우 연출가로부터 <정년이> 대본을 함께 쓰자는 제안을 받고 웹툰을 읽으면서 여성국극을 다시 보게 됐어요. 사실 여성국극 자체보다는 정년이를 비롯해 웹툰 속 캐릭터들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김민정)

공동 극본 김민정

젠더 경계를 허물다

두 사람을 매료한 웹툰 ‘정년이’는 연재 내내 바람직한 여성 서사의 모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국립창극단이 캐스팅을 발표하지 않은 상태에서 창극 <정년이>의 9회 티켓이 조기 매진된 데 이어 추가 3회도 바로 매진된 것은 웹툰 팬층이 얼마나 두터운지 보여준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다양한 여성 서사에 있다. 주인공 정년이를 비롯해 매란국극단을 이끄는 강소복 단장, 남녀 주역인 문옥경과 서혜랑, 정년이의 라이벌인 허영서와 연구생 동기들, 정년이의 첫 번째 팬인 권부용 등 극 중 인물의 서사는 수많은 여성의 삶을 대변한다.
<정년이>에 나오는 여성들은 서로 경쟁하고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여성국극을 위해 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기존의 수많은 대중 서사에서 이상한 ‘악녀’가 등장할 때 느끼는 불편함이 <정년이>에는 없다. 또한 쇼트커트에 바지 차림으로 남성을 연기하는 여성의 모습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허문다.
“웹툰 ‘정년이’에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이 나옵니다. 각각의 서사가 의미 있지만 2시간 안팎의 창극으로 만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압축하고 생략해야 했습니다. 웹툰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의 중간 정도에서 납득 가는 대본으로 만들었어요. 원작에 나오는 퀴어적 코드를 남인우 연출가가 어떤 수준에서 표현할지는 저도 궁금합니다.”(김민정)
“캐릭터 외에도 웹툰에 나오는 다양한 국극을 모두 넣을 수 없어서, 김민정 작가가 ‘춘향’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소재로 한 국극에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는 대사에 언급하는 식으로 영리하게 썼어요. 그리고 일인다역의 판소리를 기본으로 장착한 국립창극단원인 만큼 여성 단원이 남역 배우를 연기할 때는 성음이 아니라 제스처를 통해 남자로 바뀐 느낌이 들도록 연출했습니다.”(남인우)
창극 <정년이>는 국립창극단의 역대 작품 가운데서도 여성 단원의 비중이 가장 높다. 출연진(창악부) 17명 가운데 여성 단원이 14명이다. 작품에 참여하는 최연장자 김금미(58)부터 가장 나이 어린 김우정(28)까지 다양한 연령대 단원의 소리를 골고루 들을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또한 오디션 과정에서 남성 단원의 아이디어로 원작의 여성 역을 남성 단원이 맡음으로써 원작과 관련한 젠더 담론을 상기하는 효과도 있다. 한편 이번 공연을 앞두고 출연진은 정은영 작가와 1세대 여성국극인이자 국가무형문화재 발탈 보유자인 조영숙 명인의 특강을 듣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 상기 내용과 관련한 캐스팅 아이디어는 창극 <정년이>에서 인기가수 역으로 출연한 단원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 외 출연진 역시 이와 전혀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더불어 댓글 또는 DM을 통한 개인 아티스트에 대한 불법적 비방과 욕설 행위는 자제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김민정 작가(왼쪽), 남인우 연출(오른쪽)

“웹툰 ‘정년이’에 많은 독자가 열광하는 것은 여성의 성장 서사에 목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이야기가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유효하다는 게 안타깝죠. 그리고 이번에 창극 <정년이>를 하면서 다양한 재능과 끼를 가진 국립창극단 여성 단원이 한정적인 역할에 머물렀단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각각 다른 색깔의 소리를 가진 여성 단원이 기존의 정형적인 역할 외에 독특하면서 멋있는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작품이 더 필요합니다.”(남인우)
남인우와 김민정의 바람은 창극 <정년이>가 국립창극단의 레퍼토리가 돼 자주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언젠가 이번 공연에서 아쉽게 빼거나 역할을 축소했던 캐릭터 중심의 버전을 선보이면 어떨까.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대표작 <베르사유의 장미>가 초연 당시 큰 성공을 기록한 이후 기존의 주인공 오스칼에 더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중심으로 한 버전, 원작의 조연 중심으로 한 외전 3부작 등을 차례로 만든 것처럼 말이다.

글. 장지영 국민일보 선임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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