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한 마디

프레데리크 쇼팽
행복의 순간을 담은 선율
파리와 폴란드 사이에서 향수를 간직한 피아니스트, 프레데리크 쇼팽.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 피아노 소품곡의 작곡가이자 후세 피아노 연주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는
어떤 말을 남겼을까.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유일한 음악가,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 그는 짧은 생애 동안 260여 곡의 피아노 작품을 남겼다. 첫 작품을 발표한 8세 때부터 어림잡으면 약 30년간 1년 평균 8.6곡의 피아노 작품을 썼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피아노를 대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피아노 작품은 하나부터 열까지 피아노 음악 역사의 획을 그은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좋아하고 또 사랑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넓고 깊은 피아노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우리가 쇼팽을 기억할 때 가장 먼저 피아노를 떠올려야 하는 마땅한 이유다.

그는 1810년 3월 1일 현재 폴란드의 젤라조바(당시 바르샤바 공국)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폴란드로 이주한 후, 여러 허드렛일을 거쳐 당시 폴란드에서 귀족 자녀가 많이 다니던 바르샤바 리세움의 프랑스어 교사로 일했다. 자연스레 쇼팽도 아버지의 직장인 학교에 다니며, 귀족 자녀와 함께 중·고교 과정을 마쳤다. 이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어린 시절 귀족과 함께 어울린 영향일까. 쇼팽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멋진 옷차림과 귀족이 갖춰야 하는 매너를 고수했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의복 구입을 위한 지출이 많은 편이었다고 한다.

『바르샤바 저널』 1818년 1월 호에는 일곱 살 쇼팽의 첫 대중 연주회에 대한 의미 있는 평이 실렸다. “만약 이 소년이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이미 새로운 천재의 이야기가 유럽 전역에 퍼졌을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인 쇼팽은 피아노를 시작으로 작곡에도 두각을 보였다. 쇼팽의 첫 작품으로 알려진 ‘G단조 폴로네즈’ 악보에는 “여덟 살 음악가 쇼팽이 빅토리아 스카이베크 백작 부인에게 헌정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쇼팽은 작곡하는 작품을 주변 사람에게 헌정하곤 했는데, 한 사람에게 반드시 한 작품을 헌정하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이렇게 폴란드의 음악 신동으로 성장한 쇼팽은 유럽에서 전문 연주자로 활동할 꿈에 가득 찼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뜻대로 흘러가지 못했다.

폴란드에서 쇼팽의 재능은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유럽 음악의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우연히 성사된 빈 데뷔 무대에서 쇼팽은 분명 빈 청중을 사로잡았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어쩔 수 없이 쇼팽이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선택한 최종 목적지는 프랑스 파리였다. 파리라는 도시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곳이다. 그는 파리에서 약 18년을 살다 세상을 떠났고, 총 9번 이사를 했다. 지금까지도 소문이 자자한 16세 연상의 연인 조르주 상드를 비롯해 외젠 들라크루아, 프란츠 리스트 등 당대 파리 예술계 인사와 의미 있는 교류를 이어가며 지냈다. 이 시기 그가 쏟아낸 주옥같은 피아노 작품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피아노 레퍼토리다.

그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편지를 남겼다. 파리에 정착한 후, 두 번 다시 조국에 돌아가지 못한 탓에 가족이나 친구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나 서명 등 상태에 따라 소더비, 크리스티 등 세계 유수의 경매장에서 고가에 낙찰을 반복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쇼핑의 내면을 유추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가 많다. 우선 그가 리스트와 주고받은 편지로 그가 왜 연주회를 많이 열지 않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다. 그는 평생 약 30회의 연주회에만 출연했다. 마음을 터놓던 리스트에게 “관객을 보면 겁이 나고, 그들의 열띤 숨소리를 들으면 숨이 막힐 것 같다”고 편지에 적은 것으로 보아, 연주회에 대한 심적 부담 때문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 음악가로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아꼈지만, 바흐를 가장 존경한다는 생각을 남기기도 했다. “바흐는 가장 놀라운 별을 발견하는 천문학자이고, 베토벤은 우주를 뒤흔들었다. 나는 그저 나의 영혼과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할 뿐이다”라며, “우리는 결코 늘 행복하지 못하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은 짧다. 그렇다면 영원할 수 없는 이 행복이라는 꿈을 왜 벗어나야 할까?” “인내심은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등의 쇼팽다운 생각을 문장으로 옮겼다. 후세의 피아노 연주법에 큰 영향을 미친 쇼팽은 낭만파적인 피아노곡을 다수 남겼다. 어쩌면 그가 남긴 아름다운 소품은 행복의 값진 순간을 기억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그는 파리에서 레슨비가 가장 비쌌던 피아노 선생님이기도 했다. 주로 귀족의 자녀를 상대로 피아노 레슨비를, 학생 1명당 1시간 기준으로 20프랑을 받았다. 당시 오페라 공연 티켓 중 가장 비싼 티켓이 10프랑, 청소부가 받던 1시간 임금은 약 1프랑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시절 물가로도 꽤 큰 금액을 레슨비로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랬던 그에게도 특별한 소득이 없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때 영국 출신의 제자, 제인 스털링의 제안으로 약 6개월간 영국 여행을 다녀왔다. 이 시기 그의 질병이 크게 악화됐고, 영국을 떠나기 전 런던에서 연 자선 음악회가 그의 인생 마지막 무대가 됐다.

쇼팽은 1849년 10월 17일 파리 뱅돔 광장의 2층 아파트에서 숨을 거뒀는데, 평생 그를 따라다닌 폐질환에 의한 합병증이 원인이었다. 그의 장례 미사는 여성 연주자가 성당 안에서 노래할 수 없다는 규칙 때문에 약 2주간 미뤄져 10월의 마지막 날 파리의 마들렌 사원에서 열렸다. 초대받은 약 3천 명의 하객이 입장한 가운데, 생전 그의 바람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됐다.
농담과 가벼운 연주를 즐기던 그였지만, 폴란드를 억압하는 러시아의 행태에 분노하며 “신은 러시아 사람인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을 만큼, 언제나 조국에 대한 사랑을 품고 살았다. 그런 그를 위해 유해는 1830년 폴란드를 떠날 당시 친구들이 담아준 흙에 덮였고, 심장은 그의 누나가 파리에서 바르샤바로 옮겨와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치 피아노의 숲을 거니는 상상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앞으로의 먼 미래에도 그가 남긴 행복의 숨결은 피아노를 통해 계속 이어질 것이다.

※ 참고 문헌
『쇼팽, 그 삶과 음악』(제러미 니콜러스 지음, 임희근 옮김, PHONO 펴냄)
『Chopin's Letters』(Frédéric Chopin 지음, Biography & Autobiography 펴냄)
『Delphi Masterworks of Frédéric Chopin』(Peter Russell 저, Delphi Classics 펴냄)
『Frédéric Chopin: A Research and Information Guide』(William Smialek, Maja Trochimczyk 지음, Routledge 펴냄)
『At the Piano with Chopin: For Intermediate to Early Advanced Piano』(Frédéric Chopin, Maurice Hinson 지음, Alfred Music 펴냄)

글. 정은주 음악 칼럼니스트. 서양 음악가들의 음악 외(外)적 이야기를 발굴해 소개하며 산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클래식 잡학사전』, 『발칙한 예술가들』(추명희·정은주 공저), 『나를 위한 예술가의 인생 수업』을 썼다. 현재 예술의전당·세종문화회관 월간지, 『월간 조선』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부산mbc <안희성의 가정 음악실>에 출연하고 있다.

일러스트. romantic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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