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하나

국립창극단 <패왕별희> ①
비극을 동반한 영웅
창극 <패왕별희>가 돌아온다.
난세 영웅 패왕과 절세미인 우희의 처연한 이별 이야기는 사이즈가 커지고, 감정이 깊어졌다.

창극 <패왕별희>가 2019년 봄, 가을 두 차례 공연에서 얻은 호평과 인기에 힘입어 4년 만에 더욱 웅대한 모습으로 복귀한다. 공연장부터 510석 달오름극장에서 1,221석 해오름극장으로 커졌다. 무대가 418㎡에서 1,200㎡로 넓어지면서 배우 7명을 추가 투입해 군중 신을 풍성하게 채웠고, 타악과 생황 등 연주자들도 보강했다. 항우와 우희를 연기하는 배우는 이번에도 정보권과 김준수 그대로다. “그릇이 큰 이야기라 시각이 확대되는 대극장에서 보면 더 좋을 거예요.” (김준수) “스펙터클한 요소가 추가돼 볼거리가 풍성해졌어요.” (정보권)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두 배우는 농익은 연기를 다짐했다.

눈은 경극, 귀는 창극

이 작품은 중국의 경극을 판소리로 풀어낸 창극이다. 짙은 분장에 화려한 의상, 이국적 몸동작은 경극이되, 메시지를 담은 대사는 구성진 판소리 가락이 실어 나른다. 관객은 눈으로 경극을 보면서, 귀로는 소리를 듣는 공감각적 예술 체험을 하게 된다. 목청과 손발을 따로 놀려야 하는 배우들에겐 그만큼 어려움이 따른다. “낯선 몸동작에 소리를 하면서 춤까지 추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우희 역의 김준수는 “4년 전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토로했다. ‘발전된 연기’에 대한 의욕은 그의 발길을 실제 경극 무대로 향하게 했다. 4년 전에는 경극을 보러 대만을 방문했고, 올해는 국립국악원이 올린 홍콩 시취센터의 월극 <패왕별희>를 관람하며 우희의 동작을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여성이 연기하는 우희는 과연 유연하고 섬세하더군요.” 김준수는 “4년 전과 달라진 우희를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다”라며 웃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10kg의 무게

‘손끝 하나로 온 세상을 표현한다’는 경극에서 배우는 손놀림, 발걸음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다. “어깨를 쫙 벌린 채 다리를 쭉 뻗어 올린 채 걸어야 해요. 근육을 과시하는 보디빌더처럼 말이죠.” 강한 남성 캐릭터 항우를 연기하는 정보권은 “그렇다고 다리를 너무 올리면 늠름한 게 아니라 오만한 캐릭터가 돼버린다”라고 했다. 발 높이에 따라 표현하는 인물의 성격마저 달라지는 경극의 특성 때문이다.
쇳덩이처럼 무거운 항우의 의상은 어려움을 가중한다. 쇠칼을 장착하면 10kg, 4개의 깃발을 장식하면 9.88kg에 달한다. 이 육중한 옷을 걸친 채 게걸음 치듯 좌우로 오가야 하는 전투 장면은 특히 난도가 높다. 정보권은 “지난번엔 격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땀을 많이 흘렸는데 이번엔 햄스트링(넓적다리뒷근육)을 단련했다”라며 웃었다.

우희의 위로법, 쌍검무

이야기는 항우와 우희를 축으로 전쟁과 사랑, 회한과 죽음을 변주하며 빠르게 흘러간다. 전반부는 항우와 유방의 전쟁 속에 양쪽 진영의 책사들이 지략을 겨루는 대목이 흥미롭다. 사면초가 위기에 빠진 항우와 우희가 자결하는 후반부가 클라이맥스다.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리는 가운데 우희와 술잔을 부딪친 항우가 한탄한다.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도 가지를 않네. 우희야 너를 어찌한단 말이냐.” 항우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그 유명한 고사성어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 대목이다.
슬퍼하는 항우를 우희는 춤으로 위로한다. 이 작품의 백미로 꼽히는 ‘쌍검무’ 장면. 두 자루 칼을 휘두르며 추는 고난도 춤사위다. 두 팔 벌려 허리를 한껏 뒤로 젖히면 칼이 땅바닥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여서 전문 춤꾼에게도 어려운 동작이다. 대충 넘어갈 김준수가 아니다. 디스크 위험이 있다고 의사가 경고했지만 밤늦도록 홀로 남아 연습하고, 안무가에게 집중 과외를 받았다. 김준수는 “허리에 무리가 와서를 무통 주사를 맞고 도수치료까지 받으며 공연한 기억이 난다”라며 4년 전을 회상했다.
쌍검무가 끝나면 우희의 구슬픈 소리가 이어진다. “사면에서 초가가 울려 퍼지고 있네요. 대왕님의 의지가 이미 다하였으니, 신첩이 어찌 살려고 하겠나이까.” 둥둥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우희는 항우에게 강동으로 건너가 재기를 도모하라는 마음을 전하며 자결한다. “이 장면에서 우희가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지 말고 내면으로 삭히고 절제해야 해요. 그래야 관객들도 더욱 몰입하고 슬픔이 배가되거든요.” 김준수는 “어렵지만 강렬한 이 대목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라고 했다.

화살 만 개

우희의 자결에 이어지는 항우의 장탄식. “화살 만 개가 꽂힌 것 같다. 산을 뽑을 힘이 무슨 소용인가, 사랑하는 이 한 명도 지키지 못하거늘.” 정보권은 항우가 죽은 우희를 품에 안고 부르는 이 노래를 눈대목(판소리에서 가장 두드러지거나 흥미 있는 장면)으로 꼽았다. “흔히 항우를 힘은 장사여도 고집 세고 미숙한 인물로 여겨요. 자세히 봤더니 주변 사람을 잘 살피고 일편단심 우희를 사랑하는 섬세한 면모가 있더군요.” 정보권은 “섬세함을 간직한 항우를 그려내고 싶다”라고 했다.
정보권은 국립창극단원이 아니다. 내부 쟁쟁한 배우들을 제치고 외부인이 주역을 맡은 전례가 없다. 그가 주역을 따냈을 때 안팎에서 미심쩍어하는 시선도 없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 틈에서 기세에 눌리면 아무것도 못 할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럴 때마다 항우의 기개를 떠올리며 연기했어요.” 김준수가 부연해 설명했다. “처음엔 조금 걱정하는 시선도 있었는데 정보권 배우가 항우 캐릭터를 너무도 훌륭하게 소화했어요. 연습이 시작되자 모두 캐스팅을 납득하고 정 배우를 응원했죠.”

한국의 메이란팡

연출을 맡은 우상궈는 김준수를 ‘한국의 메이란팡’이라고 불렀다. 메이란팡(1894~1961)은 중국 근대 경극 최고의 배우다. 창극에서 여성 역할을 맡아본 경험이 있는 김준수에게 이 호칭은 제법 어울린다.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헬레네 역을, <내 이름은 사방지>에서도 남녀 양성을 한 몸에 지닌 캐릭터를 연기했다. 김준수의 음색도, 몸짓도 여성 역할이 어색하거나 억지스럽지 않았다. 우싱궈 연출은 중국에도 김준수만큼 우희를 소화할 배우가 없을 거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평판이 거저 얻어진 건 아니었다. 손짓이며 고난도 검무까지 완벽하게 소화한 것뿐만 아니라 네일 관리까지 받으며 섬세하게 역할에 임했다. 그래도 안팎에서 그가 여성 캐릭터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처음엔 저도 조금 걱정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저의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한다는 건 배우로서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했다.
‘패왕별희’ 하면 첸카이커 감독의 영화를 빼놓기 어렵다. 이 영화를 봤다면 붉은 눈 화장에 금박과 보석으로 치장한 옷을 입은 배우 장궈룽(장국영)을 떠올릴 것이다. 영화에서 장국영은 우희 역을 짤막하게 연기하는데, 그가 맡은 여장 경극 배우의 실제 모델이 메이란팡이다. “목소리 톤과 제스처 하나하나가 여성보다 더 여성적이더군요.” 김준수는 “장국영의 표정 연기의 섬세함에서 보고 배운 게 많다”라며 “그토록 절제하는 감정 연기를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영웅의 죽음

군사 태반을 잃고 유방의 군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항우는 마침내 오강에 당도한다. 나룻배에 말과 사람이 함께 탈 수 없어 항우는 명마 오추를 태우려 했으나 말은 스스로 강물에 뛰어든다. “오추마는 나를 위해 몸을 던져 죽었고, 우희는 사랑으로 자결하여 그 절개 영원히 남겼네. 세상을 뒤엎을 영웅이라지만 오강에 홀로 남았으니 어찌할 수 있을까. 멀리 웅장한 산하를 보니 내세를 기약함이 낫겠구나.” 사랑하는 여인도 죽고, 전쟁터를 함께 누빈 애마도 떠나 홀로 남은 항우는 칼을 뽑아 자결하고 만다. “항우는 배를 타고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요. 만약 그가 죽지 않고 도망갔다면 한심한 패장이 되고 말았을 겁니다.” 정보권은 “항우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대목이 영웅적으로 다가오더라”라고 했다. “천 년 동안 파도는 멈추지 않고 강변에 사람들은 한탄을 하네. 영웅은 어째서 강동으로 건너지 않고 죽음을 택했나.” 창극을 닫는 마지막 합창이다. 항우는 어째서 후일을 도모하지 않고 자결했을까. 애인 우희, 애마 오추의 죽음 앞에서 전쟁을 끝내 강동을 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예로부터 끊이지 않는 의문이다. 역사에서 영웅의 탄생은 비극을 동반한다.

글. 임석규 한겨레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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