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

국립극장 남산 이전 50주년 기념②
변화와 도전으로 일군 기반
올해는 국립극장이 남산으로 이전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국립극장은 설립 23년 만인 1973년 10월 17일,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공연장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직접 지은 공연장을 보유하게 됐다.1
※ 본 글은 10월호에 이어 연재되는 기사입니다. 분재된 앞글은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1973년 남산에 자리 잡은 국립극장이 10월 17일 개관식을 치렀다.
사진 제공: 국가기록원

남산에 터를 잡은 국립극장은 대극장(1,500석), 소극장(400석), 연습실, 무대 제작소를 구비해 제작극장으로서 기본을 갖추는 한편 오케스트라 피트와 대형 회전무대, 승강무대 등이 설치돼 다양한 장르의 공연·연출이 가능했다. 하지만 국립극장이 명동에서 남산으로 이전했다고 해서 바로 우수 레퍼토리 제작 및 확산, 관객 개발과 인재 육성 등 국립극장으로서 필수적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 보긴 어렵다. 전속단체가 많을 때는 8개까지 늘어나는 등 조직이 확대됐지만, 적은 예산과 관 주도 운영 등으로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국립극장이 제 기능을 하려면 국가적 뒷받침이 필수적이지만, 한국에선 국립극장의 위상이나 중요성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높지 않았다.

예술경영 도입

1990년대 들어 한국 공연계에 예술경영이 도입되면서 국립극장의 변화도 감지됐다. 결정적 계기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와 이듬해 김대중 정부의 출범이다. IMF 외환위기 탈출을 목표로 삼은 김대중 정부 시절 모든 분야가 개혁의 대상이 됐고, 문화예술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문화산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설정한 김대중 정부는 국공립 예술기관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적 공공 관리 체제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2000년 1월 배우 겸 연출가 김명곤이 공모를 통해 3년 임기의 국립극장장으로 취임하는 동시에 국립극장은 극장장에게 행정의 자율성을 부여하되 운영 성과에 책임을 부과하는 책임운영기관으로 출범했다. 그런데 당시 연간 170억 원 예산 가운데 경상비를 제외하고 남는 30억 원의 공연비는 7개 전속단체가 나눠 사용하기에 너무 적었다. 전속단체의 수를 줄여 몸집을 축소할 필요가 제기되자 문화관광부는 서양 예술 분야인 국립오페라단·국립발레단·국립합창단 등 3개 단체를 독립 법인화한 후 예술의전당에 입주시켰다. 이로써 국립극장 전속단체는 국립극단·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으로 4개만 남았다.
김명곤 극장장은 취임 이후 프로듀서 시스템 도입을 골자로 한 중장기 발전 계획을 세웠다. 전속단체와 극장 행정팀이 함께 공연 기획·홍보·마케팅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는 한편 관객 편의시설을 확충했다. 여기에 국립극장의 권위적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대극장과 소극장을 지금의 해오름극장·달오름극장으로 명명했다.
2001년 국립극장 별관2(옛 국악사양성소·현 공연예술박물관)이 개관했으며, 리모델링을 통해 내부에 전시실·자료실·별오름극장(현 별별실감극장)을 갖췄다. 2002년에는 원형 야외무대인 놀이마당(627석, 현 하늘극장3)이 완공됐다. 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과 달오름극장 역시 개관 이후 처음으로 각각 10개월과 4개월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2004년 10월, 2005년 5월에 각각 재개관했다.
국립극장이 재원 확충을 위해 재단법인 국립극장발전기금을 만든 것은 2003년이다. 국가기관은 법률상 기업의 기부금이나 협찬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완성도 높은 공연 제작 등 다양한 사업을 위해 더 많은 예산이 필요했던 국립극장은 ‘재단법인 국립극장발전기금’(2012년부터 재단법인 국립극장진흥재단으로 명칭 변경)이라는 별도 기관을 만드는 묘수를 발휘했다.
적극적인 극장 경영에 나선 국립극장의 재정자립도는 1999년 7.34%에서 책임운영기관 첫해인 2000년 15%로 두 배나 높아졌다. 2005년까지 김명곤 극장장이 재임하는 동안 극장 가동률은 91.7%, 재정자립도는 17.89%까지 상승했다. 이런 성과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김명곤 극장장이 2006년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영전하는 데 크게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수익률 개선을 우선시하다 보니 김명곤 극장장 시절 상업 뮤지컬을 중심으로 외부 대관이 늘어난 반면 전속단체의 기획공연은 줄어들었다. 그나마 기획공연도 국립극단 <문제적 인간 연산> <뇌우> 등 과거의 히트작을 재공연함으로써 객석점유율, 유료 관객 수를 높이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 때문에 공공극장으로서 국립극장의 역할이 과거보다 퇴조했다는 비판이 따라다녔다.

2. 2001년 완공된 국악사양성소 (현,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3. 627석 규모의 돔형 공연장인 하늘극장

실험과 변화의 초석

2006~2008년 국립극장을 이끈 신선희 극장장4은 무대 디자이너 출신으로 국립극장 역사상 최초의 여성 극장장이다. 신선희 극장장은 기본적으로 김명곤 전임 극장장이 토대를 놓은 책임운영기관의 방향성을 이어갔다. 성과로는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5을 개최하고 전속단체별 국가브랜드 공연을 만든 것과 함께 야외무대인 하늘극장의 지붕을 덮고 내부를 수리해 청소년 극장으로 활용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공연계 숙원이던 공연예술박물관 건립의 토대를 놓은 점이다. 한국 최초, 국내 유일의 공연예술박물관이 2010년 개관한 데에는 신선희 극장장의 역할이 컸다.
다만 신선희 극장장 시절도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예술성 퇴조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다행히 2009년, 국립극장이 기업형 책임운영기관에서 행정형 책임운영기관으로 변경됨에 따라 국립극장은 수익 추구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공공성을 높일 수 있었다.

4. 31대 국립극장장 신선희. 2006년 1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3년간 재임했다.
5. 국립극장은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약 5년간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을 운영하며 국제 교류의 발판을 마련했다.

2009~2011년 언론인 출신인 임연철 극장장 시절 국립극장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2010년 시작한 <여우락 페스티벌>6이다. ‘여우락’은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를 줄인 말이다. 국악 대중화를 위해 시작한 <여우락 페스티벌>은 이후 창작 국악의 산실이 됐다. 이즈음 가장 큰 변화는 2010년 국립극단이 법인화돼 국립극장을 떠난 것이다. 전통예술 기반의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 등 세 전속단체만 남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의전당 예술사업국장과 서울문화재단 대표를 역임한 안호상이 2012년 1월 신임 국립극장장으로 임명됐다. 최초의 극장 경영 전문가 출신인 안호상 극장장은 6년 가까이 근무하며 국립극장의 위상을 높이는 초석을 놓았다. 전통 기반의 컨템퍼러리 제작극장으로 국립극장의 정체성을 정립한 안호상 극장장은 전속단체들이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재창작하도록 독려했다. 덕분에 전속단체의 기획공연 양이 늘어나고 질이 높아지면서 국립극장은 공연계를 선도하는 극장으로 변모해 갔다.

6. 2010년 시작된 <여우락 페스티벌은> 여전히 우리 음악의 현주소를 되새기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2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된 김성녀는 안호상 극장장7의 최고 조력자다. 오랫동안 판소리 다섯 바탕에 머물러 있던 국립창극단은 소설, 그리스 비극, 서양 희곡, 경극 등 다양한 소재를 흡수해 외연을 확장하고 국내외 유명 아티스트를 초빙해 작업함으로써 창극을 동시대 인기 공연 장르로 만들었다. 고선웅 연출의 <변강쇠 점 찍고 옹녀>와 옹켄센 연출의 <트로이의 여인들>8 같은 레퍼토리는 영국·프랑스·미국 등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립창극단에 이어 국립무용단이 변화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패션 디자이너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구호와 손잡고 만든 <묵향>과 <향연>9이 전환점이 됐다. 정구호는 연출뿐만 아니라 미장센 전 분야의 디자인을 맡아 한국무용에 현대적 감성과 세련미를 부여해 관객을 사로잡았다. 브랜드가 된 ‘정구호 스타일 한국무용’은 이후 국내 국공립 무용단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여우락 페스티벌>도 안호상 극장장 시절 양방언·나윤선 같은 대중적 음악가를 예술감독으로 위촉하는 한편 크로스오버와 퓨전에 맞춘 프로그램 구성으로 관객을 불러 모았다. <여우락 페스티벌>은 상당수의 프로그램이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며 국악계 전반에도 영향을 미쳤다.
안호상 극장장 부임 이후 국립극장은 전속단체를 포함한 국립 예술단체의 작품으로 연간 프로그램을 구성해 일찌감치 티켓을 판매하는 레퍼토리시즌제를 도입했다. 안호상 극장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사퇴했지만, 5년 9개월간의 재임 기간에 거둔 성과는 독보적이다. 레퍼토리시즌제의 시행으로 국립극장 관람객 수는 6만 3천여 명에서 13만 5천여 명, 객석 점유율은 65%에서 82%로 뛰었다.

7. 2012년 1월부터 2017년 9월까지 33대 국립극장장을 지낸 안호상
8.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와 <트로이의 여인들>
9. 국립무용단 <묵향>과 <향연>

이후 1년간 공석으로 있던 국립극장장에 김철호 전 국립국악원장이 2018년 9월 임명됐다. 국악인 출신 첫 수장인 김철호 극장장은 4년에 걸쳐 진행되던 해오름극장 리모델링을 마치고 2021년 9월 재개관하는 데 진력했다. 안호상 전 극장장 시절부터 노후한 국립극장의 리노베이션을 대대적으로 추진, 2014년 2월 달오름극장이 먼저 재개관했다. 한편 김철호 극장장 이후 1년 6개월간 공석이던 국립극장장에 경기아트센터와 대구오페라하우스 대표를 지낸 박인건이 2023년 3월 취임했다. 박인건 극장장은 취임 이후 공연 횟수를 늘리고 관객 편의시설을 대폭 확충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국립극장10은 만만치 않은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발전해 왔다. 21세기 들어 책임운영기관 전환은 실행 초반에는 재정자립도 제고 때문에 공공성 저하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극장 활성화 및 관객 서비스 강화를 추진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공무원이 일방적으로 임명되던 예전과 달리 공연 전문가 출신 극장장이 오게 된 것도 국립극장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국립극장은 한국 공연예술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계승 및 발전시키는 중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소속기관 가운데 비교 대상인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차관급, 국립국악원장이 고위공무원단(학예 가), ·국립현대미술관장이 고위공무원 임기제(관장, 가)인 데 비해 국립극장장은 고위공무원단 임기제(극장장, 나)라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국립극장장의 직위를 제 역할에 걸맞게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장기적으로 국립극장의 재단법인화 또는 특수법인화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문성 확보, 예산의 탄력적 운영을 통한 예술의 질 향상, 자율성과 창의성을 제고하기 위해선 문화체육관광부 소속기관이 아니라 독립 법인 형태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년이 보장된 전속 예술단체 단원들이 반대할 수 있는 데다 예산 편성은 물론 감독 기능을 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적 판단이 필요한 만큼 단시간에 이루어지기 어렵다. 다만 국립극장 설립 73주년 및 남산 이전 50주년, 책임운영기관 23주년을 맞아 국립극장의 정체성과 운영 형태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본다.

10. 현, 국립극장 전경
글. 장지영 국민일보 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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