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여섯

정순임의 박록주제 ‘흥보가’
70년 관록의 소리
전통예술의 맥을 잇는 집안, 그 안에서 소리꾼으로 자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재담이 풍부하고 해학적 사설이 흥미로운 ‘흥보가’에 담긴 교훈과 음악성을 오롯이 느껴볼 무대가 열린다.

4대째 걷는 예인의 길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흥보가) 예능보유자 정순임 명창은 120년이 넘도록 전통예술을 이어온 집안의 소리꾼이다. 예인으로서의 뿌리는 증외조부 장석중(?~?) 명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석중은 판소리와 거문고, 피리의 명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상 판소리 명창의 대를 잇기 시작한 이는 그녀의 두 외조부 장판개(1886~1937, 예명 장학순)와 장도순(?~?)이다. 장판개는 1904년 어전에서 ‘적벽가’를 부른 뒤, 이에 감탄한 고종황제로부터 종9품인 혜릉참봉의 교지를 받았고, 장도순은 20세기 초 협률사·장안사·연흥사 등의 무대에서 활약하며 ‘8잡가꾼’으로 불릴 만큼 소리에 능했다.
집안의 소리는 장판개의 아들 장영찬(1930~1972), 장도순의 딸 장월중선(1925~1998)으로 이어졌다. 바로 정순임의 외삼촌과 어머니다. 특히 정순임의 어머니 장월중선은 판소리뿐 아니라 가야금·거문고·아쟁 등의 기악은 물론 승무·살풀이·검무 등의 춤에도 뛰어났다.
말 그대로 다재다능한 예인이었다. 장월중선은 목포국악원을 설립하며 수많은 전통 예인을 배출했고, 이후 경주에 머물며 평생을 판소리 전승과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자신의 딸만은 예인의 길을 걷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어머니의 소리를 태중에서부터 들어온 정순임에게 이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좋아한 정순임은 1950년대 국악은 물론 대중문화계를 주름잡은 여성국극에 매료돼 판소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만류에도 끝내 임춘앵이 이끄는 여성국극단에 들어갔다. 하지만 10대의 소녀에게 전국을 다니며 공연하는 국극단 생활은 너무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소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딸의 고집에 장월중선은 결국 정순임을 보성의 정응민(1896~1963) 명창에게 보냈다. 정순임은 그곳에서 1년 남짓 머물며 ‘춘향가’의 일부를 배웠고, 다시 목포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본격적으로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의 주요 눈대목은 물론 ‘안중근 열사가’ ‘유관순 열사가’를 익혔다. 이후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며 오정숙(1935~2008) 명창에게 ‘춘향가’ 일부를, 박송희(1927~2017) 명창에게 박록주제 ‘흥보가’ 전 바탕을 배우며 자신만의 소리틀을 다졌다.
기실 정순임이 20~30대를 보낸 1960~70년대는 새로운 문화의 급격한 유입으로 판소리는 물론 전통음악이 대중에게 외면받던 때였다. 장월중선 역시 이러한 시대 변화를 알았기에 판소리를 하고자 했던 딸을 그토록 만류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판소리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놓을 수 없었던 정순임은 예인의 길을 그대로 갔다. 그리고 마침내 1985년 남도예술제 판소리 부문 대통령상 수상, 1997년 KBS국악대상 판소리 부문을 수상하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2007년 경상북도 시도무형문화재 판소리(흥보가) 보유자, 2020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흥보가) 보유자로 지정되며 가문을 넘어서 국악계의 큰 버팀목이 되었다.

불모지에 피운 판소리 꽃

정순임은 전라남도 목포 출신의 명창이다. 하지만 현재 그녀가 머물며 제자를 기르고, 소리를 닦아가는 곳은 경상북도 경주다. 정순임이 경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7년 어머니 장월중선이 경주시립국악원 전임강사로 오게 되면서다. 정순임은 이때 보조강사로 있으며 어머니의 활동을 도왔다. 장월중선은 경주시립국악원에서 중·고등학생을 모아 판소리며 악기와 춤을 가르쳤고, 1982년에는 신라국악예술단을 발족시켜 약 14년 동안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정순임에 따르면, 경주에서 활동하는 데 사실 많은 힘이 들었다고 한다. 경주는 국악의 불모지라 할 만큼 이에 관한 지역의 관심과 지원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월중선은 여러 공연을 통해 지역민에게 전통음악을 알리고, 제자를 길러내며 마침내 전통음악을 경주에 뿌리내렸다. 어머니에 이어 정순임 역시 오랜 세월 경주에 터를 잡고 있다. 어머니께서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이 지역에 판소리를 알렸는지 알기에 떠날 수가 없었고, 지금은 경주가 제2의 고향이라고 한다.
예술가의 길은 본래 고단하다. 예술에 ‘완성’이란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득음’을 향해 나아가는 명창의 길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더욱이 판소리가 홀대받던 시기에, 박수받지 못한 지역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예술을 지켜가기란 더욱 고단했을 것이다. 그녀의 뛰어난 소리 세계는 물론이거니와 어느 상황에서건 자신의 예술에 대한 굳건한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이를 고수한 단단한 마음이 느껴졌다.

명창의 내공을 오롯이 담은 소리

이번 완창 무대에서 정순임 명창이 들려줄 소리는 박록주제 ‘흥보가’이다. ‘흥보가’는 착한 흥보와 심술궂은 놀보가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가난한 민중의 삶을 보여주면서도 착한 마음을 가진 자는 언젠가는 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제비가 흥보에게 가져다준 보은표 박씨는 꿈과 같은 환상성을 가지고 있지만, 삶이 녹록지 않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일반 대중의 바람이다. 끝없이 나오는 쌀과 돈, 화려한 비단, 그리고 으리으리한 집을 꿈꾸지 않을 이, 누가 있겠는가. 한낱 미물에게조차 선의를 베풀고, 욕심 많은 형마저 큰 품으로 안는 흥보의 마음이라면 응당 그와 같은 행운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도 선한 마음을 품고 살아봄 직하다. ‘흥보가’는 교훈적 메시지와 더불어 해학적 사설로도 유명하다. 판소리 전승 5가 가운데 재담이 풍부하고, 익살스러운 부분이 많아 소리는 물론 아니리와 발림에도 능해야 ‘흥보가’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
정순임은 어머니의 오랜 동무이자,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박송희 명창에게 ‘흥보가’를 배웠다. 박송희가 전수한 ‘흥보가’는 송만갑–김정문-박록주-박송희로 이어온 소리다. 간결한 사설을 바탕으로 대마디 대장단의 분명하고 힘 있는 음악이 특징이다. 정순임 명창은 타고난 목구성으로 상청에서 하청까지 두루 균형 잡힌 소리를 할 수 있는 명창이다. 또한 연극적 기량도 풍부해 해학적 사설을 흥미 있게 보여줄 것이다.
정순임 명창이 판소리의 길에 들어선 지 어느덧 70년이 가까워온다.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소리를 만났으니 어쩌면 판소리와 함께한 세월은 80여 년일 수도. 명창의 관록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이번 무대는 판소리 애호가들에게 놓칠 수 없는 완창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서영화, 「판소리 명가 장판개 가계연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0.
「‘옥피리 풍류’ 되살리기에 혼신」, 『한겨례』, 1988.12.25.
「“국악과 함께 120년” 4대째 맥 이어가는 정순임 명창 가족」, 『매일신문』, 2009.5.23.

글. 송소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0세기 창극의 음반, 방송화 양상과 창극사적 의미」(2017)로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판소리와 창극 관련한 연구를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
<월간 국립극장> 구독신청 <월간 국립극장> 과월호 보기
닫기

월간지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 구독 신청

뉴스레터 구독은 홈페이지 회원 가입 시 신청 가능하며, 다양한 국립극장 소식을 함께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또는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편리하게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회원가입 시 이메일 수신 동의 필요 (기존회원인 경우 회원정보수정 > 고객서비스 > 메일링 수신 동의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