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을
주는 곳

서울공예박물관
예술과 일상, 그 경계의 공간
안국역과 북촌을 잇는 감고당길, 그 언저리에 담장도 대문도 없는 수상한 박물관이 있다.
공예의 어제와 오늘을 잇는 허브이자 공예품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아카이브,
동시에 누구나 쉬어가는 열린 커뮤니티로 기능하는 곳.
서울공예박물관은 가장 동시대적인 방식으로 공예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시간의 틈을 발견하는 공간

낡아서 더 귀한 것, 오래되어 더 새로운 것을 찾는 이들에게 종로만큼 흥미로운 동네가 또 있을까. 그중에서도 관광객과 현지인, 옛 건물과 최신식 빌딩이 뒤섞여 숱한 이야기를 빚어내는 서울 한복판에 단어 그대로 보물 같은 장소가 있다. 슬렁슬렁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자연스레 스며들고 흘러드는 곳. 서울공예박물관은 공예에 크게 관심이 없어도, 공예를 잘 몰라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는 재미가 차고 넘치는 곳이다.
서울공예박물관은 서울시가 지난 2014년부터 추진하고, 7년간의 준비 끝에 2021년 개관한 국내 최초의 공예 전문 박물관이다. 그만큼 터를 잡는 데도 공을 들였다.
이 자리는 일찍이 명당으로 소문난 곳으로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의 집터였다. 한때는 조선 왕실 가족의 제택第宅 혹은 가례를 치르던 ‘안동별궁’이 자리했고, 이후 1944년부터 70년간 여성 교육의 요람인 풍문여고가 터의 무늬를 가꿔왔다. 더군다나 종로구 일대는 수공예품을 제작해 관에 납품하던 조선의 장인 ‘경공장’들이 활동하던 곳이라 하니, 공예박물관을 건립하기에 이만한 장소도 없을 듯하다.
건물을 올리는 데도 고민이 뒤따랐다. 별궁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박물관으로 탈바꿈하는 동안 켜켜이 쌓인 역사적 가치와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박물관은 옛 풍문여교 교사校舍의 원형을 최대한 살려 보수·보강하는 방향을 택했다. 여기에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설치하고, 안내동과 공예별당(한옥)을 새롭게 지어 마침내 일곱 채의 건물과 공예마당으로 구성된 서울공예박물관이 탄생했다. 흥미로운 점은 ‘열린 박물관’을 지향하는 공간의 특성이다. 여러 채의 건물로 이뤄진 담장 없는 공간이다 보니 출입구만 다섯 개다. 약속된 동선으로 움직이는 일반적인 박물관과 다른 만큼 발길 닿는 대로 자유롭게 전시를 관람해도, 도서실에서 책을 읽어도, 아니면 그저 머물다 가도 괜찮은 실용적인 공간으로 기능한다. 역사가 담긴 고즈넉한 정취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민들의 열린 공간. 여기에 사계절 달라지는 박물관 풍경을 보는 재미는 덤이다. 봄이면 공예마당 한가득 매화나무 군락이 장관을 이루고, 여름이면 공예별당 인근 빈터에 해바라기와 절굿대가 만개한다. 400년이 넘도록 자리를 지켜온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드는 계절이면 고목 아래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뉘어놓고 싶어진다.

모두의 공예, 모두의 박물관

2만 3천여 점의 수집품과 아카이브를 소장한 연구 기관인 동시에 유일무이한 공예박물관으로서 서울공예박물관은 공예란 무엇이며 어떻게 완성되는지, 또 공예가 지닌 가치는 무엇인지 다각도로 보여주는 전시와 프로그램을 기획·진행하고 있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를 지나 근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공예 발전의 역사를 다루는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 그리고 직물공예 컬렉션으로 구성한 <자수, 꽃이 피다>, <보자기, 일상을 감싸다>는 박물관을 대표하는 상설전시다. 물론 시간 여유가 된다면 여섯 개의 상설전시관을 모두 둘러봐도 좋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전가직물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전시3동을 먼저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이곳에서는 평생 자수와 보자기를 수집했던 사전가絲田家 허동화, 아향雅香 박영숙 부부가 기증한 5천여 점을 순차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현재 화려한 색감과 입체감을 자랑하는 ‘자수 화조도 병풍’와 그림과 자수가 함께 어우러진 ‘자수 묵죽도 병풍’은 물론, 궁중에서 사용된 화려한 보자기부터 서민들의 삶을 따뜻하게 감싸준 조각보까지 다양한 소장품을 전시 중이다. 또한 개관 기념으로 선보였던 ‘자수 사계분경도’는 영상으로, ‘현우경 표지’는 재현품으로 대체되어 색다른 방식으로 관람객과 소통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일상을 엮은 자수·보자기 공예품을 보고, 만지고, 체험해 볼 수 있는데 그중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작품을 보여주는 박물관의 방식이다. 관찰력이 조금 있다면 눈치챘겠지만, 액자 표면의 빛 반사나 굴절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자수 실의 결과 반짝임을 낱낱이 감상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치한 덕분이다. 3층 전시관 역시 보자기의 앞면과 뒷면을 모두 볼 수 있도록 유리 쇼케이스를 특별 제작했다. 앞으로 최대한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조금씩 품목을 교체해 나갈 예정이라고 하니 주기적으로 찾아보아도 좋겠다.
수집품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상설전시와 달리 특별기획전은 국내외 동시대 공예를 다룬다. 근현대 나전 장인들의 도안과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던 <나전장의 도안실>전은 아쉽게도 7월부로 종료되었지만, 채화·분청·금박 분야에서 다양한 조형감으로 작업하고 있는 황수로, 궁중채화서울랩, 이강효, 김혜련, 장연순, 김기호의 작품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예 다이얼로그> 전이 9월부터 열릴 예정이다. 다루는 매체와 작업 방식이 모두 다르지만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세대를 관통하는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공예가의 작품들을 한눈에 확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서울공예박물관의 슬로건은 ‘모두의 공예, 모두의 박물관’이다. 실제로 시각장애인의 관람을 돕는 안내 촉지도와 청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서비스, 휠체어 전용 책상은 물론 공예를 체험하고 창작해 볼 수 있는 어린이박물관 ‘공예마을’,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아카이브실’, 직물공예 자료를 보관하고 공유하는 ‘보이는 수장고’, 다목적 문화공간 ‘공예도서실’ 등의 콘텐츠에 장애·나이·성별의 구분 없이 누구나 공예를 경험하고 즐기기를 바라는 박물관의 바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만일 언제라도 서울공예박물관을 찾게 된다면, 곳곳에 숨은 박물관의 시대정신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방문이 될 것이다.

서울공예박물관 바로가기 http://craftmuseum.seoul.go.kr
취재. 편집부 사진. 김성재 SSSAUN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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