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2023-2024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국립창극단 시즌 프리뷰
최고의 솔리스트 앙상블
정통 판소리에 기반한 <심청가>부터 경극 <패왕별희>, 셰익스피어의 <리어>, <만신 : 페이퍼 사먼>까지,
연극·경극·뮤지컬이 창극 안에 다 담겼다. 여기에 <작창가 프로젝트>가 더해져,
창극 제작진 육성까지 창극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줄기를 뻗어낸다.

해오름극장 1,200석이 공연 20여 일 전에 이미 전 회차 전석 매진됐다. 셰익스피어 희극 원작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연출 이성열·작창 한승석)을 가장 큰 해오름극장 무대에 올린다고 했을 때 불거진 일각의 우려는 기우일 뿐이었다. 이 작품을 쓴 김은성 작가는 “몇 해 전부터 창극 보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공연을 보고 있으면 ‘국립창극단은 지금이 전성기구나’ 할 정도로 하나같이 완성도가 높아 늘 부러웠다.”라고 했다.
전석 매진 행렬은 국립창극단에 더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국립창극단은 이제 4월 새로 취임한 유은선 예술감독 체제의 첫 레퍼토리시즌을 시작한다. 유 감독은 “지금 창극단은 기존 단원들이 단단히 다진 기초 위에 실력 있는 새 단원의 젊은 소리를 쌓아 올려, 방창 도 개성과 힘이 살아 있는 최고의 ‘솔리스트 앙상블’이 된 듯하다.”라며 “전통의 재해석과 세계시장에 내놓을 만한 새로운 창작을 병행해 창극의 풍성해진 외연을 더욱 넓혀갈 것”이라고 했다. 정통의 현대적 압축 <심청가>, 경극과 판소리의 만남 <패왕별희>, 셰익스피어 비극을 재해석한 <리어>를 지나면,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이 쌍둥이 무녀의 삶을 한국적 미학으로 풀어낼 신작 <만신 : 페이퍼 샤먼>의 화려한 피날레가 기다린다.

근본을 갖춘 원작의 힘

4년 만에 다시 찾아온 <심청가>가 먼저 2023-2024 레퍼토리시즌의 문을 연다. 9월 26일~10월 1일 달오름극장. 단아한 우리 소리의 힘을 무대에서 느껴보고 싶은 관객도, 그 전통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변용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관객도 모두 만족할 만한 작품이다. 안숙선 명창이 작창을 맡아 완창 판소리의 고갱이만 추려내 2시간여 길이의 창극으로 재구성했다. 이번 무대엔 국립창극단원 김금미가 새로운 도창으로 소리와 이야기를 이끈다. 평생 전통연희를 무대에 접목하며 심청가를 변주하는 데 도가 튼 손진책 연출가가 개성 강한 소리꾼들을 하나로 묶어낸다. 오롯이 소리의 힘을 드러내는 미니멀한 무대장치도 2018년 초연 때부터 호평받았다. 손 연출가는 “서구 리얼리즘의 액자를 깨고 우리 소리가 먼저 보이고 느껴지도록 만들었다.”라고 한 바 있다.
11월 11~18일, 해오름극장엔 중국 전통 경극과 우리 창극의 과감한 접목에 관객이 매진 행렬로 화답했던 <패왕별희>가 다시 찾아온다. 춘추전국시대 초패왕 항우와 한나라 황제 유방의 싸움, 항우와 우희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담겼다. 우리 소리의 새로운 물결을 이끌고 있는 소리꾼 이자람이 작창과 음악감독을 맡아 빚어낸 작품. 대만에서 경극 현대화를 이끈 우싱궈의 연출, 영화 <와호장룡>으로 미국 아카데미 미술상을 받은 의상디자이너 예진텐의 화려한 의상도 화제였다. 협업한 대만의 안무가 린슈웨이가 ‘한국의 매란방’이라고 극찬했던 ‘창극단 아이돌’ 김준수가 이번엔 얼마나 더 아름답고 애절한 ‘우희’를 보여줄 것인지 관객의 기대가 크다.
3월에 공연하는 <리어>는 “말 너머의 것”을 담는 창극의 실험, 우리 소리가 표현할 수 있는 힘의 규모를 보여줄 작품이다. 창극 <리어>의 각본을 쓴 극작가 배삼식은 “연극의 원초적 형태는 본디 음악극이었다. 결국 원하는 것은 말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 너머의 것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했다. 형식은 무척 연극적이되, 그리스비극을 닮은 역할의 코러스가 중심을 잡는다. 관객의 감정을 쥐고 흔드는 데 탁월한 한승석의 작창이 정재일이 만든 음악을 타고 장르의 경계를 깨뜨리며 흘러넘친다. 20톤의 물을 폭 14미터, 깊이 9.6미터의 세트에 점점 채워가는 무대는 압권. 비극의 깊이, 소리의 힘을 동시에 증폭하며 관객의 가슴을 두드릴 것이다.

새로운 한국 미학

클래식과 국악을 모두 전공한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이 연출과 구성을, 안숙선 명창이 작창을 맡을 예정인 신작 <만신 : 페이퍼 샤먼>은 이번 레퍼토리시즌의 화려한 피날레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국립창극단은 “만신이 된 여인과 그녀의 쌍둥이 무녀의 삶을 통해 인간사 희로애락을 소리에 담고, 한국의 얼과 한이 담긴 무속음악을 통해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건네는 작품”이라며 “전통 유산인 한지 종이접기 문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한국적 미학의 무대와 의상, 미장센을 선보일 것”이라고 했다. 유은선 감독은 “천대받는 천민이지만 타고난 기운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신을 대리하는 나약한 인간인 두 샤먼 여인의 삶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고 모든 생명이 평화롭기를 축원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내년 5월 17~18일 <절창Ⅳ>의 주인공은 젊은 단원 조유아와 김수인. 조유아는 웹툰 원작 창극 <정년이>에서 주인공 윤정년을 맡았고, 김수인은 창극 <춘향>의 몽룡 역뿐 아니라 방송 가창 경연 프로그램 <팬텀싱어4> 출연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각자 뛰어난 소리꾼인 단원들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완창판소리> 무대 역시 오는 9월부터 내년 6월까지 매달(1·2월 제외) 하늘극장에서 펼쳐진다.

창극은 지금 가장 뜨거운 연출가들이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는 신세계이자, 새 작품을 올릴 때마다 회전문 관객이 생기고 ‘창극단 아이돌’을 사모하는 팬들이 길게 줄을 서는 흥행 장르가 됐다. 유은선 감독은 최근 창극단의 성과를 이어받을 뿐 아니라,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줄 것이라는 기대를 양어깨에 지고 출발한다. 유 감독은 “작창가 프로젝트를 통해 육성 중인 작창자뿐 아니라, 한국적 소재로 판소리 어법에 맞는 글을 쓸 수 있는 작가, 동시대 트렌드를 리드하면서도 창극 고유의 맛을 살려 만들 수 있는 연출가를 키워낼 프로젝트도 동시에 추진할 것”이라며 “궁극적으로 한 번에 두 작품을 동등한 품질로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제작 시스템을 갖춘 ‘국립창극원’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라고 했다. 새로운 예술감독의 첫 레퍼토리시즌, 자타 공인 ‘전성기’를 맞은 창극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고 있다.

글. 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종교·미술·영화 등에 관해 썼고 공연을 담당하고 있다. 짧고 가벼운 것을 선호하는 시대여도 여전히 굵은 이야기의 힘을 믿고, 글이 관객과 극장을 이어주길 소망하며 쓴다.
<월간 국립극장> 구독신청 <월간 국립극장> 과월호 보기
닫기

월간지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 구독 신청

뉴스레터 구독은 홈페이지 회원 가입 시 신청 가능하며, 다양한 국립극장 소식을 함께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또는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편리하게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회원가입 시 이메일 수신 동의 필요 (기존회원인 경우 회원정보수정 > 고객서비스 > 메일링 수신 동의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