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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국립극장 기획공연 <우리 읍내>
평범한 이야기, 큰 울림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삶과 죽음과 희로애락을 함께한다.
어딜 가나 우리 세상살이는 다 그러한 모습일 터.
미국의 극작가 손턴 와일드는 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로 희곡을 써서 주목을 받았다.
<우리 읍내>라는 작품이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우리 읍내>의 무대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인생을 삶과 죽음, 그리고 제3자의 시선에서 총체적으로 관조해 보니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고,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관객들은 이 작품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참을 수 없는’ 일상의 평범함을 화두로 잡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이들의 시점에서 삶을 담담하게 조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서늘한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1938년에 발표되어 85년이나 지난 지금도 사랑받는 이유다. 국립극장에서 기획한 <우리 읍내>의 무대는 이 사실을 다시 한번 명쾌하게 증명해 주었다.

한국적으로 감각한 무대

국립극장의 <우리 읍내>는 각색 공연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과감하면서도 정교하게 한국으로 무대를 옮겨왔다. 총 3막으로 구성된 공연은 1막 ‘일상생활’, 2막 ‘사랑과 결혼’ 그리고 마지막 3막 ‘공동묘지’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원작과 동일한 구성이다. 그러나 1938년 미국의 뉴햄프셔 마을은 1980년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 읍내로 바뀌었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양주영 교수와 민규네, 현영이네를 배치했다. 그 밖에도 1980년대 시골 마을에서 만날 법한 평범하고도 다양한 인물의 일상이 풍경화처럼 혹은 스케치처럼 무대 위에 그려진다. 실제로 무대 중앙에는 마을의 풍경을 담은 거대한 LED 액자가 가로로 길게 걸려 있다. 장면에 따라 조금씩 그림을 달리하지만, 마냥 정겹고 따뜻한 시골 마을 풍경을 동화적 감성으로 담아내고 있다. 사건이라면 민규(안창현 분)와 현영(박지영 분)의 사랑과 결혼, 출산 정도일까? 뜻하지 않은 사고와 죽음도 나오지만, 이는 무대감독의 말을 통해 아무렇지도 않게 메타 정보처럼 관객에게 제시만 될 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읍내>의 현재 시점을 구성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마을에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공연의 시작과 끝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장식한다. 임도완 연출이 직접 곡을 붙였다고 한다.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시에 곡을 붙여 ‘수미쌍관’ 형식으로 구조화하면서 공연의 의도와 목표를 뚜렷하게 부각한다. 사람들의 일상뿐만 아니라 정서 또한 ‘한국적 정서’로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들은 마치 합창단처럼 바퀴 달린 덧마루 위에 올라 천천히 무대 앞으로 등장하거나 퇴장하면서 ‘귀천’을 노래한다. 배우들은 저마다 캐릭터를 유지한 채 개성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바퀴 달린 네 개의 덧마루를 나란히 이어붙여서 만든 ‘수레 무대’를 배우 여러 명이 직접 밀고 당기며 움직인다. 이 ‘수레 무대’는 임도완이 전작 <스카팽>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수레 무대에 올라 주제곡을 부르며 공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형식도 동일하다. <스카팽>은 국립극단에서 수년째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수레를 이용해 이동 무대를 만들었던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전통에서 착안한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연출을 맡은 임도완은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 메소드를 끈질기게 추구해 온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16세기를 전후해 인기를 얻은 즉흥 가면 희극이다. 그는 요 몇 년 사이 국립극단에서 제작한 몰리에르의 <스카팽>으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관객의 반응도 뜨거웠다. 최근에는 한국의 전통연희, 즉 봉산탈춤과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접목하려는 시도로도 주목받았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그렇게 만들었다. 서양 고전을 우리 정서와 감각에 맞게 재창작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 읍내>도 비슷한 맥락의 공연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1980년대 풍경과 일상이 손턴 와일드가 만들어낸 ‘우리 읍내’와 만나 한국적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굳이 재현에 공을 들이지 않은 것도 흥미롭다. 3막 공동묘지 장면에 등장하는 죽은 이들의 시선이 공연의 현재 시점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1막과 2막의 풍경은 죽은 이들의 시선에 포착된, 혹은 그들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과거의 어느 한때에 지나지 않는다. 꿈처럼 아련하고 애달프다가도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리는 것이 지나간 우리 삶에 대한 기억이자 이미지가 아닐까. 무대감독(구본혁 분)과 신문 배달부(김우경 분)가 내레이터 내지 큐레이터처럼 현재 시점에서 무대 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해설해 준다. 무대감독은 심지어 신문 배달부 정효근이 스무 살 즈음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다는 정보마저 담담하게 이야기해 준다. 인생을 무대에 비유한 이가 셰익스피어였던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읍내>의 무대감독은 인간사의 굴레를 벗어나 있는 초월적 존재로도 볼 수 있다. 평양에서 월남한 의사이자 분단 현실을 되새기게 하는 인물인 김만석, 새마을 노래, 동백림 유학생 간첩단 사건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등 근현대사의 뼈아픈 기억과 사건들도 소환되지만 깊이 들어가지 않고 스케치처럼 훑고 지나갈 뿐이다.

감상성과 정서 과잉의 조절

탈재현적인 무대 연출에는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명료한 대도구의 운용을 통한 장면 전환도 큰 역할을 했다. 배우들은 바퀴 달린 네 개의 덧마루와 A자형 사다리 두 개를 움직이며 자유자재로 공간을 창조한다. 배우 움직임을 중심에 두고 창작 활동을 해온 임도완 연출의 장점이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런 형식을 통해 적어도 2막까지는 정서 과잉과 관객의 몰입을 적절히 차단해 가며 관조적 시선과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3막 공동묘지 장면은 아무래도 힘에 부친 느낌이다. 죽음과 한, 서러움은 우리의 집단 무의식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대표적 정서다. 꿈이든 굿이든 드라마든, 망자와의 재회나 대화를 눈물 없이 담담히 지켜본다는 것이 우리 정서에서 가능한 일일까. 감상성과 정서 과잉을 조절하기 위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죽은 이들의 모습을 미동 없이 앉아 있는 마네킹처럼 연출한 것, 감정과 정서를 배제한 채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대사를 발화하게 한 것이 그런 노력이다. 그러나 출산 중 죽은 현영이 흰색 원피스를 입은 망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이어 남편 민규가 상복에 두건을 쓴 모습으로 나타나 현영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에서 긴장감은 와해된다. 민규는 엄마 장정실(정은영 분)의 무덤 앞에 엎드려 죽은 아내의 명복을 빌어준다. 현영은 단 하루만 현세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열두 살 생일을 맞아 행복했던 1981년의 어느 날로 돌아간다. 힘겹게 유지해 오던 감정선이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감상성은 관조적 태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인생에 대한 담담한 시선을 허락하지 않는다. 공연의 방향도 다소 상투적으로 이끈다. 그래서 아쉬움이 컸던 장면이다.
최근 우리 무대에서 수준 높은 무장애 공연을 자주 접한다. 이번 공연도 그러했다. 장애를 애써 부각하지 않으며,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공연 문법으로 녹여냈다. 농인과 청인 배우들이 수어로 대사를 소화하는 장면이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다. 수어의 정적이 더 큰 울림을 만들어낼 때도 있다. 3막에서 현영이 죽은 엄마와 만나 수어로 소통하는 장면이 만들어낸 정서적 소구력은 대단히 컸다. 제각각 다양한 모습으로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무장애 공연을 더한 <우리 읍내>는 그래서 더 다양한 우리 인생의 모습을 담아낸 공연이었다.

글. 이성곤 연극평론가. 일본 근현대연극을 전공했으며 현재 재일코리안 극단 활동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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