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하나

NTOK Live+
판타지, 정치극, 그리고 희비극
2014년 <워호스>를 시작으로 NT Live(엔티 라이브)라는 타이틀 아래 영국 국립극장의 흥행작과 문제작, 최신작 등을 소개해 온 국립극장이 지난해부터 도버해협 건너 전 유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NTOK Live+>(엔톡 라이브 플러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단장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올 4월, NT Live에 더해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의 작품을 상영하는 ITA Live(이타 라이브), 프랑스 코메디 프랑세즈의 작품을 상영하는 Pathe Live(파테 라이브)까지 3개국의 대표 단체 공연이 상영된다.

먼지 속으로 여행하려는 이들을 위한 황금나침반 NT Live <북 오브 더스트>

가장 먼저 관객을 만날 작품은 영국 국립극장에서 지난 2021년 11월 초연한 최신작 <북 오브 더스트>다. 연극은 영국 소설가 필립 풀먼(Philip Pullman)이 2017년에 발표한 동명의 판타지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반지의 제왕』의 J.R.R. 톨킨,『나니아 연대기』의 C.S.루이스와 함께 판타지 3대 거장으로 추앙받는 필립 풀먼. 대표작으로는 『신의 암흑 물질』 3부작(His Dark Materials Trilogy, 국내에서는 『황금나침반』으로 소개되었다)이 꼽힌다. <북 오브 더스트>는 『신의 암흑 물질』의 전사편(前史篇)으로, 그 세계관을 확장하고 있다. 그 때문에 ‘황금나침반’만 가지고 있다면, 관객 역시 먼지의 세계(북 오브 더스트)에서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신의 암흑 물질』은 2007년 대니얼 크레이그와 니콜 키드먼 주연으로 영화화(<황금나침반>)되었는데, 당시 기독교계 단체에서는 “신을 폭군으로, 교회를 억압의 도구로 묘사하며 무신론을 조장한다”라며 상영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종교적으로, 반대로 과학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해석되는 『신의 암흑 물질』은 다중우주의 세계를 그린다. 주인공 라이라(Lyra)는 이곳과 닮은 듯 다른, 교권이 지배하는 세계에 존재하는 소녀로, 사람의 마음과 세계의 질서를 알려주는 황금나침반을 해독할 수 있는, 선택받은 존재다. 이야기는 황금나침반을 손에 넣어 절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조직에 대항하는 라이라의 모험을 그린다.
이번에 상연되는 <북 오브 더스트>는 라이라의 출생과 관련된 비밀을 밝힌다. <북 오브 더스트> 3부작의 1편인 『라 벨 소바주(La Belle Sauvage)』를 무대에 옮긴 연극이다. 주인공은 부모를 도와 여관 일과 수녀를 도와 수도원 일을 돕는 소년 맬컴이다. 어느 날 수상한 이들이 수녀들이 기르는 갓난아기를 납치하려는 사실을 알게 된 맬컴은 소녀 앨리스와 함께 아기를 구해 도망친다. 이 둘은, 아니 셋은 라 벨 소바주라는 작은 배에 의지해 교권에 반대하는 학자이자 비밀결사 요원 해나를 찾아 나선다.
연출은 영국 국립극장 전 예술감독 니콜라스 하이트너(Nicholas Hytner)로, 그는 2003년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며 출사표로 <신의 암흑 물질>을 연출해 공연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신의 암흑 물질>을 3시간짜리 두 편의 공연(총 6시간)으로 제작했는데, 언론에서는 “프로덕션의 기술력에 감탄하게 된다”라는 평을 남겼다.
그리고 이번 <북 오브 더스트> 역시 그 기술력을 볼 수 있을 듯하다. <북 오브 더스트>에는 인간의 영혼을 상징하는 ‘데몬’이 등장하는데, 퍼펫티어가 퍼펫을 조종해 만드는 장면은 흥미롭다. 그러나 무엇보다 장관은 무대 전체에서 펼쳐진다. 작품에는 홍수가 사건 배경처럼 자주 등장하며 영상과 조명은 범람하는 물로 극장을 흠뻑 적신다.

NT Live <북 오브 더스트> ⓒManuel Harlan
NT Live <북 오브 더스트> ⓒManuel Harlan
NT Live <북 오브 더스트> ⓒManuel Harlan
NT Live <북 오브 더스트> ⓒManuel Harlan
NT Live <북 오브 더스트> ⓒManuel Harlan
NT Live <북 오브 더스트> ⓒManuel Harlan

잘못된 자리, 잘못된 이들, 잘못된 결과 ITA Live <오이디푸스>

다음 작품은 국립극장이 지난 10월에 <NTOK Live+>의 한 편으로 선보인 연극 <오이디푸스>다. 티켓 오픈과 동시에 만원사례를 기록하고, 추가 상영 티켓마저 매진시킬 만큼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은 <오이디푸스>가 다시 돌아온다.
본격적인 공연 소개에 앞서 ‘오이디푸스’의 내용을 빠르게 훑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기원을 신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화는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가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려 노력하다가 오히려 운명이 파놓은 덫에 걸려 몰락하는 내용을 큰 골자로 한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한 신화였다고 한다. 소포클레스는 누구나 아는 이 신화를 추리물 형식으로 고쳐 썼다. 관객들은 환호했고, 소포클레스는 3대 그리스비극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오이디푸스’야말로 비극의 전범이라며 상찬했다.
그리스비극의 정수 ‘오이디푸스’를 현대의 정치극으로 다시 쓴 이는 영국의 극작가 겸 연출가 로버트 아이크(Robert Icke)다. “영국 연극계의 최대 희망”이라는 찬사를 받는 로버트 아이크가 네덜란드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ITA, Internationaal Theater Amsterdam)에서 제작한 <오이디푸스>는 이 오래된 신화를 21세기로 가져온다. 이야기는 대통령 선거일 단 하루로 압축된다. 우리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다. 그는 외지 출신으로 대통령 후보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오이디푸스는 투표 종료를 기다리며 온 가족과 함께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하려 한다. 당선은 따놓은 당상. 이제 축하의 잔을 올릴 일만 남았다. 그러나 그 인생 최고의 순간, 눈먼 예언자가 방문해 파국을 예고한다. 그리고 투표 종료. 이변이 없는 한 그는 내일 아침 당선증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쁨을 누리기엔 펼쳐진 진실이 참혹하다. 투표 종료를 알리는 시계는 마치 그의 파멸을 알리는 듯하다. 이 모든 이야기가 단 하루, 단 두 시간 만에 이루어진다.
ITA live <오이디푸스>는 원작의 설정을 유지한다. 로버트 아이크는 각색을 통해 오래된 신화를 이질감 없이 현대화한다. 그리고 최근 대선을 치른 여기에서도 지구 반대편 이야기를 전혀 이물감 없이 이해하게 된다. 일례로 눈먼 예언자의 예언은 이제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 로버트 아이크의 영리한 각색 덕이다. 거기 더해 절정의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영웅 오이디푸스를 연기한 한스 케스팅(Hans Kesting)의 열연도 한몫했다. 그리고 아들을 버려야 했던, 그 사실도 모른 채 아들과 재혼한, 어미이자 부인 이오카스테 역의 마리커 헤이빙크(Marieke Heebink)의 연기는 꼭 언급해야 한다.

ITA Live <오이디푸스> ⓒJan Versweyveld
ITA Live <오이디푸스> ⓒJan Versweyveld
ITA Live <오이디푸스> ⓒJan Versweyveld
ITA Live <오이디푸스> ⓒJan Versweyveld
ITA Live <오이디푸스> ⓒJan Versweyveld
ITA Live <오이디푸스> ⓒJan Versweyveld

멀리서 보면 희극,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비극 Pathe Live <인간 혐오자>

이번 시즌 NTOK Live+의 대미를 장식할 작품은 프랑스의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제작한 Pathe Live <인간 혐오자(Le Misanthrope)>다. 『인간 혐오자』는 프랑스 최고의 희극작가인 몰리에르(Moliere)의 작품 중 하나다. 흥미로운 사실은 코메디 프랑세즈의 별칭이 ‘몰리에르의 집(La Maison de Moliere)’이라는 사실이다.
17세기에 활동한 몰리에르는 당시에 함께 활동하던 두 명의 비극작가 피에르 코르네유, 장 라신과 함께 프랑스 3대 극작가로 불리는 인물이다. 프랑스인들은 그중에서도 몰리에르를 최고봉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영국인의 자긍심이 셰익스피어라면, 프랑스인의 자부심은 몰리에르다. 실제로 그의 이름을 딴 몰리에르상은 프랑스 최고 권위의 연극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족이나, 다른 두 명의 극작가의 이름을 딴 상은 아직 없다.
그는 비극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받던 희극을 비극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희극을 가벼운 오락거리로 치부하고 있지만, 그는 희극을 통해 상류층의 허위를 풍자하고, 성직자들의 위선을 비판했다. 그의 이런 희극에 서민들은 열광했다. 왕가 역시 그의 희곡을 지지했다.
이러한 기조는 <인간 혐오자>에서도 이어진다. 주인공은 인간의 속물근성에 실망하며, 모든 인간에게 환멸을 느낀 인간 혐오자 알세스트다. 아, 그런데 운명의 아이러니여. 그는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여성 셀리멘에게 반해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다. 사랑이 고픈 셀리멘은 뭇 남성을 유혹하면서도, 뒤돌아서 험담을 일삼는 가식적인 여성이다. 문제는 그런 셀리멘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하늘은 알세스트의 편인 듯. 셀리멘의 실체에 실망한 경쟁자들이 떠나고, 알세스트만 곁에 남게 된다. 알세스트는 마침내 셀리멘의 사랑을 얻게 될까?
여기까지만 읽으면 알세스트를 도덕적 결벽주의자로 옹호하는 작품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몰리에르는 자신의 분신 같은 알세스트 역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그가 거장으로 추앙받는 데에는 자신의 결함마저 냉소적으로 드러내는 그 대담함에 있을지 모르겠다.
연출은 코메디 프랑세즈의 외원인 중진 연출가 클레망 에르비외 레제(Clement Hervieu-Leger)가 맡았다. 그는 17세기 고전주의 희곡을 지금 여기로 가져온다. 그러나 다른 여러 <인간 혐오자>와 이 작품의 차이는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인간 혐오자>를 단순한 희극이 아닌, 희비극으로 바꾸었다. 그는 그것이 몰리에르의 진정한 의도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지금 오히려 더 유효할 듯하다.

Pathe Live <인간 혐오자> ⓒBrigitte Enguerand
Pathe Live <인간 혐오자> ⓒBrigitte Enguerand
Pathe Live <인간 혐오자> ⓒBrigitte Enguerand
Pathe Live <인간 혐오자> ⓒBrigitte Enguerand
Pathe Live <인간 혐오자> ⓒBrigitte Enguerand
Pathe Live <인간 혐오자> ⓒBrigitte Enguerand
글. 김일송 공연칼럼니스트. (책공장) 이안재를 운영하며 희곡집, 아카이빙북 등 공연 관련 서적을 출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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