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인도 설화 속 행복의 이유
달 아래, 마음 다스리기
둥근 달에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이 공존하듯, 우리네 삶에도 행복과 슬픔이 공존한다. 삶의 굴레 속에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이고, 불행은 무엇일까. 어쩌면 모든 것이 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일지도 모른다.

밤하늘에 은은하게 빛나는 달은 주기에 따라 차고 이지러지기를 무수히 반복한다. 초승달로부터 15일 즈음 지나면 보름달이 되고, 다시 15일 즈음 지나면 그믐달이 된다. 차고 이지러지는 달을 바라보며 옛사람들은 우리네 삶의 순리를 떠올렸다. “화무십일홍이요, 달은 차면 기우나니…” 언제고 보름달인 삶도, 언제고 그믐달인 삶도 없다. 차오르는 때가 있으면 기울어지는 때도 있다. 그뿐만 아니다. 이지러졌던 달은 다시 차오른다. 기우는 때가 있으면 차오르는 때도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달은 ‘재생’의 힘을 지닌 신비한 존재로 믿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달의 모습이다. 실제 달은 스스로 순백의 빛을 내지 않으며, 늘 둥근 모양으로 떠 있다. 우리가 보는 달빛은 달이 햇빛을 반사한 빛이며,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그믐달로 변화하는 달의 모양은 그때그때 달이 햇빛을 받는 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를 달로 보아야 할까. 빛의 영역만이 달일까, 나머지 어둠의 영역까지 함께 달이라고 해야 할까.

국립창극단 <나무, 물고기, 달>
식을 치르는 세 명의 달지기 너머로 둥근 달의 형상이 보인다.
국립창극단 <나무, 물고기, 달>
‘금어’의 머리에 달린 혹이 ‘마트스야’의 황금 뿔을 닮았다.

인도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가난한 농부 가족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 너무 많은 비가 내려 농사를 망쳤고, 그로 인해 큰아들이 굶어 죽고 말았다. 부부는 히말라야 신을 찾아가 소원을 빌었다. 이 세상에 아픈 사람도 없고, 굶어서 죽는 사람도 없게 해달라고. 그런데 신은 의외의 말을 한다. “그 결과는 나쁠 수도 있다.” 부부는 상관없으니 소원을 들어달라고 청했고, 신은 두말없이 따라주었다. 어떻게 됐을까? 소원이 모두 이루어지자, 어려움 없이 살게 된 사람들은 서로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제각기 살게 됐고, 이 땅에는 행복도 슬픔도 희로애락도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부부는 다시 히말라야 신을 찾아갔다. 그리고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청했다. 신은 말한다. 슬픔과 괴로움을 겪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이 이야기를 달로 가져와 보면 어떨까. 둥근 달 가운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빛의 영역뿐이지만, 그 나머지 어둠의 영역도 달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눈에 바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보면 둥근 달에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이 공존하듯, 우리네 삶에도 행복의 영역과 슬픔의 영역, 희로애락의 영역이 공존한다고 할 수 있다.

  • 자연예찬 ⓒ하진희
    나무에 그려진 두 개의 붉은 눈은 나무의 신을 상징하며, 두 마리 황소는
    시바가 타고 다닌다는 난디, 두 마리 물고기는 비슈누의 현신 마트스야다.
  • 태양신 수리야와 달의 여신 찬드라 ⓒ하진희
    아래쪽이 달의 여신 찬드라로, 나무를 함께 그렸다.

물고기: 비슈누의 현신, ‘마트스야(Matsya)’

인도인들은 수백억의 신을 섬긴다고 한다. 그 가운데 힌두교 신화 속 삼신(三神)이라고 하면 창조자로서의 브라흐마(Brahma), 유지자 또는 보존자로서의 비슈누(Visnu), 파괴자 또는 변형자로서의 시바(Shiva)를 일컫는다. 브라흐마·비슈누·시바는 각기 하늘[梵天]·해·달을 상징하는 신적 존재이기도 하다.
2022년 10월, 국립극장 하늘극장 무대에 둥근 달 하나가 둥실 떠오른다고 한다. 1년 반 만에 국립창극단 <나무, 물고기, 달>이 다시 관객과 만난다. 이 작품에서 물고기는 이 중 비슈누의 현신인 ‘마트스야’를 연상시킨다. 비슈누는 세상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수시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 이를 바로잡았다. 물고기 ‘마트스야’, 거북 ‘쿠르마’, 멧돼지 ‘바라하’, 반인반수 ‘나라싱하’, 난쟁이 ‘바마나’, 도끼를 든 라마 ‘파라슈라마’, 불교의 창시자 ‘붓다’ 등 10개의 화신, 즉 아바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하는데, 최초의 인간 마누를 대홍수로부터 구하기 위해 물고기로 현신한 ‘마트스야’가 그중 첫머리에 놓인다.
마누라고 불리는 신성한 남자가 살았다. 어느 날 강에서 몸을 씻는데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다가와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큰 물고기가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니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누는 물고기를 두 손으로 건져 집으로 데려갔고, 물고기가 커감에 따라 토기에서, 연못으로 옮겨가며 보살폈다. 연못이 비좁을 만큼 커진 물고기를 바다에 놓아주려 할 때, 물고기가 마누에게 말한다. “이제 곧 머지않아 큰 홍수가 날 테니 하루빨리 튼튼한 배를 만들어놓도록 하세요.” 정말 그 말처럼 홍수가 일어나 마누의 배만 남게 되었다. 어느 날 ‘마트스야’는 황금 뿔을 가진 거대한 물고기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기 뿔에 배를 걸고 헤엄쳐 헤마바트산 정상에 도착했다. 마침내 홍수가 끝나고 물이 빠지기 시작하자 ‘마트스야’는 말한다. “나는 최초의 인간인 마누를 보호하고 이 세상에 만물이 다시 번창하도록 축복을 내리기 위해 비슈누의 현신 마트스야로 태어난 것이다.”
인간을 홍수의 대재앙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나타난 ‘마트스야’처럼, <나무, 물고기, 달>의 물고기 ‘금어’도 중생을 구원하리라는 뜻을 품고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로 흘러들어 왔다. 그리고 ‘마트스야’의 황금 뿔이 마누를 헤마바트산 정상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금어’의 머리에 달린 반짝반짝 빛나는 혹을 받아 든 소녀는 수미산 정상 소원나무 앞에 당도하게 된다.

나무: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는 ‘칼파타루(kalpataru)’

인도의 일부 지역에서는 나무를 모신(母神), 즉 어머니신으로 숭배하기도 한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주듯, 잘 익은 과일과 땔감, 그늘 등을 베풀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인들의 민화에 그려진 나무는 사실성보다는 꽃과 열매, 새가 한데 어우러진 풍요로운 형상을 추구한다.
칼파타루(Kalpataru)라는 인도의 전설 속 나무는 단순히 과일과 땔감, 그늘을 베푸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나무 밑에 앉아 소원을 빌면 모두 다 성취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긴 여행 중에 큰 평원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걷느라 지친 그는 나무 그늘 밑에 주저앉아 늘어지게 푹 잘 수 있는 푹신한 침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는 지금 자신이 신성한 나무, 칼파타루 아래 앉아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놀랍게도 그의 옆에는 멋진 침대가 나타났다. 그는 너무나 놀랐다. 곧이어 기지개를 켜며 침대 위에 누운 그는 예쁜 여인이 나타나 다리를 주물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정말 예쁜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그의 팔과 다리를 시원하게 주물러주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이내 배고픔이 몰려들자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얻었다. 그렇다면 음식이라고 못 얻을 게 없지 않은가?’ 순간 그의 앞에는 맛좋은 음식이 호화롭게 펼쳐졌다. 배불리 음식을 먹고 만족스럽게 침대 위에 누운 그는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일 호랑이가 나타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바로 다음 순간, 커다란 호랑이가 그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었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다.
칼파타루는 소원을 들어주는 신성한 나무다. 문제는 생각하는 ‘모든’ 것이 눈앞의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간만에 볼록 부른 배를 퉁퉁 두드리며 행복하게 침대에 누웠을 나그네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미래를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칼파타루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일까, 불행을 가져다주는 존재일까. 창극 <나무, 물고기, 달>에서 소녀가 ‘금어’ 덕분에 여러 무리와 함께 당도할 수 있었던 그곳, 수미산 정상에도 칼파타루와 같은 소원나무가 있었다. 이 소원나무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일까, 불행을 가져다주는 존재일까. 가만, 여기서 질문을 바꾸어보자. 행복은 무엇이고, 불행은 무엇일까. 좋은 것은 무엇이고, 나쁜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모든 것이 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일지도 모른다.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다.
좋고 나쁜 건 다 네 마음에서 생겨난 거라. 국립창극단 <나무, 물고기, 달> 중

서두에서 살펴본 인도의 가난한 농부 가족 이야기는 사실 신이 슬픔과 괴로움을 겪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신은 여기에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이제야 깨닫게 돼서 나도 행복하다.”
둥근 달은 여여(如如)하지만 우리 눈에는 빛과 어둠의 영역이 달리 보이는 것처럼, 우리 삶도 그러할 것이다.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는 하나, 우리는 여전히 찰나의 생각에 흔들릴 것이다. 우리 곁 어딘가 “이제야 깨닫게 돼서 나도 행복하다.” 말해 주는 신이 머물고 있음을 이따금 떠올리면서, 하루하루 마음 다스리며 살아보면 어떨까.

글. 송미경 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조교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춘향가 소리 대목 및 더늠의 전승 양상과 판소리사적 의미」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시대 문화로서의 판소리, 창극을 포함한 공연예술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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