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선율

악보계 배새롬이 이야기하는 도널드 워맥의 ‘서광’
눈에서 귀로, 악보에서 음악으로
국립국악관현악단에 도착한 새로운 악보를 누구보다 가장 먼저 펼쳐 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악보계 배새롬이다. 그는 눈으로 악보를 읽어 내려가며 그 악보가 모두의 손에 꼭 맞도록, 그리고 음악이 매끄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악보를 세심히 편집한다. 그런 의미에서 배새롬의 작업은 시각과 청각을 조율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그가 소개하는 음악은 시각을 청각화하는 도널드 워맥의 ‘서광’이다. 2021년에 초연된 워맥의 ‘서광’, 그리고 그 악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악보계 배새롬

오늘 소개해 주실 작품은 도널드 워맥의 ‘서광’입니다. 어떤 곡인가요?

전체적으로 희망과 빛에 관한 이야기를 표현한 곡입니다. ‘서광(Emerging Light)’이라는 제목처럼, 빛이 어둠을 향해 돌진하면서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악절마다 이어져요. 동시에 곡을 연주하는 단원이 고군분투하는 모습도 덩달아 그려지고요. (웃음) 저는 시각을 청각화하는 곡을 좋아하는데, ‘서광’은 빛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타오르다가 다시 서서히 꺼지는 장면이 선명히 그려지는 곡이에요. 또 몇 년 사이에 국악관현악이 많이 변화하고 있는 만큼 현재 시점의 국악관현악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이 곡을 소개하게 됐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곡이 ‘현재 시점’을 담고 있다고 보시나요?

편성이요.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원일 감독님이 계시던 때 이후로 특수 악기, 예를 들어 대피리·저피리·생황·양금을 많이 활용해 왔어요. 이 곡도 양금으로 시작되고 곡 안에서 저피리와 생황이 매우 적극적으로 쓰여요. 또 ‘서광’에는 현대적 기법도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선율적이고 화성적인 것보다는 음향이 더 효과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많죠.

워맥 악보 첫 장

‘서광’을 포함해서, 도널드 워맥의 음악이 지닌 특징이 있다면 뭘까요?

첫 번째로는 이 곡처럼 시각을 청각화한 곡이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굉장히 리드미컬하다는 거예요. 특히 현악기의 쓰임에서 그런 것들이 잘 드러나요. 타악기에서 박자를 쪼개듯이 현악기에서도 박자를 세밀하게 쪼개는 거죠. 도널드 워맥뿐 아니라 서양음악에서 출발해 국악기를 다루는 작곡가는 아무래도 한국 전통악기가 지닌 특수성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더 과감한 시도를 하기도 해요. 과감한 만큼 연주가에게는 시련이 되기도 하죠. 그래서 연주가들이 악보를 보고 ‘말도 안 돼, 큰일 났다’라며 놀라기도 해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어느새 능숙하게 연주하고 계시더라고요. 어쩌면 그런 부분이 국립국악관현악단을 발전시키는 데 한몫하지 않았나 싶어요.

신작 악보가 도착하면 누구보다 먼저 열어 보실 텐데요. ‘서광’의 악보를 처음 펼쳐 봤을 때는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사실 악보를 받으면 그걸 여유롭게 읽어볼 시간이 없어요. 리허설 전까지 이 악보를 빨리 정리해서 파트보로 깔끔히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라서요. 파트보 하나 만드는 데 보통 4~5시간 걸려요. 그 작업을 악기별로 다 해야 하니 시간이 꽤 걸리죠. 물론 악보를 딱 펼쳐 봤을 때 모양만 봐도 ‘아, 이거 까다롭겠다’ 싶은 부분을 먼저 파악해 두긴 해요.

파트보 만드는 작업에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악보를 넘기는 포인트나 가독성 등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정말 많잖아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특히 가독성 좋게 편집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해요. 낯선 신작을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을 텐데, 악보까지 읽기 어려우면 안 되니까요. 악보를 넘기는 포인트도 마련해 두고, 또 한 단락이나 프레이즈가 끊기지 않게 구성하는 등 큰 흐름부터 작은 부분까지 많이 고려하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악보를 정돈할 때, 국악관현악이기 때문에 더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악보 자체는 서양음악과 다를 바 없어요. 국악기로만 연주할 뿐 똑같아요. 다만 국악기 부호 같은 게 위치에 맞게 잘 들어와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국악기는 음역이 매우 한정적인데 간혹 악보를 살피다 보면 각 악기의 음역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부분은 제가 먼저 검토해 연주가에게 보이고, 수정할 필요가 있는지 확인 과정을 거치기도 해요. 그리고 타악보를 만들 때는 연주가의 요청에 따라 늘 대금 파트보를 함께 얹어요. 이렇게 파트별 맞춤 요청이 있을 때는 그때마다 상황에 맞게 악보를 편집하기도 합니다.

워맥의 ‘서광’에서 쓰인 국악기 부호들을 소개해 주세요.

우선 거문고 악보에 쓰인 기호 중 ‘文·大’가 있는데, 이건 ‘문현, 대현’을 뜻하는 거예요. 그 현에서 이 음을 연주하라는 뜻이고요. 꼬불꼬불한 모양처럼 생긴 기호는 음을 굵게 떨어서 내라는 표시예요. 아래로 향한 화살표에 줄이 하나 그어져 있는 기호는 음을 강하게 눌러서 내라는 뜻입니다. 이외에도 많죠. 옛날에는 이런 기호들이 없어서 하나하나 마우스로 그렸었는데, 서울대학교 국악과에서 국악기 기호 폰트를 만들어 한결 편해졌어요. 이런 기호들은 워맥 작품에서만 특별히 쓰는 건 아니고 많이 통용되는 것이에요.

혹시 오선보가 아닌 악보를 보내는 작곡가도 있나요?

원일 감독님 계시던 때에 했던 ‘시나위 프로젝트’에서는 그런 적이 있었어요. 즉흥으로 하는 연주가 많으니까, 악보라기보다는 지시문 같은 걸 쓰거나 음계만 그려놓은 경우가 더러 있었죠.

언젠가 악보의 형태가 바뀔 수도 있을까요?

악보는 음악을 기록하는 수단이고, 약속의 체계잖아요. 많은 사람이 함께 연주하는 관현악단에서 악보는 필수예요. 그 방식이 무엇이든 악보로 쓰일 수 있는 기본 형태만 갖추고 있다면 악보도 변할 수 있겠죠. 지금 국악관현악의 연주 기법이나 작곡 기법이 많이 발전하고 변화한 것처럼요.

그동안 수많은 악보를 다듬어오셨을 텐데, 그중 인상에 가장 깊게 남은 악보가 있을까요?

작업하기 가장 어려웠던 악보가 떠오르는데요, 2007년에 작업한 나효신 작곡가의 ‘태양 아래’라는 곡이에요. 우선 악보 표지에 ‘제가 손으로 그려놓은 그대로 구현됐으면 좋겠다’라는 작곡가의 자필 메모가 적혀 있었어요. 그때는 국악기 기호 폰트도 없을 때라 하나하나 그려야 했던 시절이고, 특히 굵게 떠는 표시를 작곡가가 그린 모양 그대로 구현해야 했는데 이건 마우스로 그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게, 반원을 만들고 하나하나 연결해서 기호를 만들고 이걸 일일이 붙이는 방식이었어요.
그때 제가 20대 초중반이었고, 갓 연수 단원으로 들어온 때라 요령도 없었어요. 집에 가져가서 작업하고, 꼬박 밤늦게까지 붙잡고 있었는데도 사보하는 데만 거의 한 달이 걸렸죠. 그걸 하다가 처음으로 위염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어요. 아무튼 그걸 전부 다 만들고 난 다음에 파트보를 추출하려고 하니까, 제가 그렇게 공들여 만든 그 기호들이 다 어그러지는 거예요. 그래서 출력한 악보를 직접 한 줄씩 잘라서 이어 붙였어요. 그때 악보계로 같이 일하던 동료 한 명과 저 그리고 네 명의 아르바이트생까지 총 여섯 명이 함께 작업했는데요, 정말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작업이었어요.

완성했을 때 정말 뿌듯하셨겠어요. 신작 연주를 위한 첫 과정을 도맡아 작업하신 거니까요.

그랬죠. 언젠가 원일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악보계 또한 하나의 공연이 만들어지는 데 일조하는 사람이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요. 저는 정말 자부할 수 있는 게, 국립국악관현악단 악보는 제가 정말 잘 만들어드린다는 거예요. 간혹 연주가분들이 국립국악관현악단 악보가 좋다고 이야기하시면 정말 뿌듯해요.

악보 라이브러리 관리도 맡고 계시죠. 지금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보관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악보는 뭔가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1995년에 창단됐으니 1990년대 악보가 가장 오래된 것이죠. 그사이에 워낙 많은 곡이 만들어졌다 보니 분실되었거나 못 찾는 악보도 있지만요.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음악이지만 이 장르 자체의 역사를 고려해 보면, 어쩌면 국악관현악을 넓은 의미의 현대음악 혹은 동시대 음악 중 하나로 보는 게 더 적합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예전에는 저도 현대적인 곡을 받으면 국악적인 요소 없이 쓰인 곡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런 부분을 어색하게 느낄 만한 시기는 지난 것 같아요. 국악적 요소가 있는지 여부를 따지기보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국악기로 다양한 곡을 연주한다.’라고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 고민할 게 많아요. 악기 개량 역시 안 좋게 보는 분도 있지만, 조금은 필요하다고 봐요. 지금은 순전히 연주가의 엄청난 노력과 연습으로만 작곡가의 상상력을 구현하고 있으니까요. 또 음향에 대해서도 조금 더 유연한 태도로 접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여기엔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아마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고민하고 계시겠죠.

마지막으로, 국악관현악이라는 장르의 매력은 뭘까요?

여전히 국악기 소리를 들으면 고리타분하고 예스럽다고 느끼는 분이 더러 있지만, 사실 그 악기 자체가 가장 큰 매력이에요. 한 번만 그 문턱을 넘으면 정말 신선하고 멋진 소리를 들을 수 있거든요. 특히 국악관현악은 악기의 한계를 자꾸 넘어서는 연주를 들려주죠. ‘이렇게도 연주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새로운 음향을 찾아 듣게 되는 것도 국악관현악의 매력 중 하나예요.

글. 신예슬 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음악학을 공부했고, 『음악의 사물들』을 썼다. 종종 기획자, 드라마투르기, 편집자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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