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높이 솟아 있던 조명은 바닥까지 내려와 있고, 크고 작은 세트들이 이어지고 세워지며 저마다의 위치에 들어선다. 소리만 들으면 여느 공사장과 다를 바 없는 이곳은 화려한 미감으로 장식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대 위다. 아직 막이 오르지 않은 무대 위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책임장치감독을 만나봤다.
무대조립원 혹은 무대기계조정원은 한국직업사전에서 무대세트와 연계된 직업으로 명기되는 직군이다. 설계도에 따라 무대세트를 조립하거나 설치하고 무대 기계를 조정해 무대장치를 전환하는 이를 뜻한다. 국내 몇 안 되는 제작극장인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올리고 내리는 장치감독 역시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일까.
강승구: 무대조립원과 무대기계조정원의 두 직군을 합해 조금 더 확장하면 무대장치제작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대디자이너의 도면을 통해 세트를 제작·설치하고 무대장치를 전환하며 공연을 마친 후에는 철수하는 것까지는 같아요. 거기에 소요 예산을 산출하고, 미술·행정 등 공연을 기획·제작하는 여러 부서와 디자이너 사이의 의견을 모으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한정된 예산 범위 내에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자재 및 재료비 등의 가격을 합리적으로 산출합니다. 같은 이유에서 필요한 무대 세트 역시 되도록 직접 제작하고 있죠. 이 과정에서 작화·소품·장신구·의상 등 약 10개 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공연을 마친 후에도 세트나 장비의 운용 및 보관까지가 저희의 업무입니다.
무대장치 제작실은 무대디자인이 나오면 그로부터 공연이 끝나는 시점까지 하루하루가 빠듯하게 이어진다. 짧게는 하루 만에 설치와 철수를 진행해야 하고 길게는 사전 제작만 6개월 이상 걸리기도 한다. 게다가 무대장치·조명·음향·리허설 등 순서를 기다리는 분야가 줄지어 있어 일정을 미룰 수도 없다.
강승구: 저는 대학에서 가구제작을 전공했어요. 가구는 1밀리미터의 차이로도 사용감이 달라지죠. 그러다 보니 작은 부분까지 신경 써 작업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어요. 조금만 더 신경 써 제작하면 심미성이 높아지니 시간을 들여 작업하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신입 시절엔 선배들이 속도를 높이라고 다그치기도 했죠. 하지만 30년이 지나고 나니 이젠 오히려 제가 후배들을 재촉하게 되더라고요. 최근 공연한 국립창극단 <귀토>(8월 31일~9월 4일)의 경우 1,500개의 각재를 1만 개 이상의 피스로 고정해 가로 14미터, 세로 18미터의 기본 무대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세트 중앙을 비워 가로세로 8미터의 LED 무대를 넣고 나머지는 폭 36밀리미터의 긴 각재를 9밀리미터 간격으로 나열해 상하로 이동하도록 제작했죠. 각 파트마다 정해진 일정이 있기 때문에 되도록 기한 안에 작업을 마무리해야 해요. 한 파트라도 일정이 어긋나면 전체 일정에 무리가 생길 수 있기에 반드시 지켜야 하죠.
국립극장 무대미술팀 장치제작실의 경우 13명의 정해진 인원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데다가 공연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경우가 있어 언제나 시간이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지난 3월에 공연한 국립창극단 <리어>에서는 가로 14미터에 세로 10미터 깊이 15센티미터의 무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20톤 이상의 물을 담는 무대를 만들었는데, 빠듯한 일정에 팬데믹으로 인한 초유의 사태가 발생해 무대 제작에 난항을 겪기도 했다.
강승구: <리어> 세트를 만들 당시 20톤의 물을 무대 위로 올리고 그 상태에서 2톤 이상의 물을 배출하고 채우기를 반복했어요. 또 1.5톤 이상의 다리 2개가 업-다운하도록 제작했죠. 사실 무대 위에 물길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할 때가 어렵죠. 이번 <리어> 때는 세트업을 일주일 남기고 저를 포함한 장치제작실 5명이 코로나19에 확진됐어요. 코앞으로 다가온 공연 일정 때문에 아픈 중에도 전화기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죠. 또 공연 뒷부분에 극 중 배우가 물속에 눕는 장면이 있는데 배우가 찬물에 들어가 일정 시간 동안 연기해야 하다 보니 체온 저하라는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추가로 배관을 연결해 따뜻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조정해야만 했어요.
극장은 밀폐된 공간에 다수의 사람이 한 방향으로 시야를 모은 채 공연을 관람하는 곳이기에 안전을 지키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 그렇기에 무대 위에서 화기 물질을 쓰거나 적은 양의 물을 쓰는 것조차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무대 위에서 20톤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운용할 수 있는 건 숙련된 전문가들이 곳곳에 포진한 덕분이다.
강승구: 망치·에어태커(air-tacker)·톱·압축기 등과 같이 장치 제작 시 사용하는 도구 자체만으로도 위험한 것이 많아요. 높거나 비좁은 곳에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 공간 제약까지 있다 보니 항상 집중해야 하죠. 그래서 안전담당관이 지정돼 있고 옆에서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안전관리자가 두 명 있어요. 물을 사용하는 경우 미끄러지거나 감전 사고 등이 있을 수 있어 더욱 매뉴얼을 숙지하고 기본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1992년 덕수궁에서 치른 공연을 시작으로 무대장치 제작의 길을 걷게 된 강승구 감독은 그해 11월 국립극장에 입사해 곧 근속 30년을 맞는다. 그사이 업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98년까지는 기능사 자격증을 갖추면 무대장치 제작 직무에 지원할 수 있었지만 1999년 무대예술전문인 자격검정위원회 제도가 생기면서 3급에서 1급까지 3단계로 자격증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됐다. 또 대학에서 무대디자인을 전공했거나 연극영화과에서 무대세트를 공부한 이들 혹은 인테리어를 전공한 이들이 많이 지원해 자격증과 학위를 중심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추세다.
강승구: 자격증이나 학위 과정을 이수하면 현장에서 실무를 접했을 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해요. 다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현재의 무대 제작 방식이 언제까지 통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결국엔 현재와 미래의 방식이 공존할 수 있도록 여러 분야가 분업과 협업을 지속해 하나의 팀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누구든 공연 현장에서 함께하고 싶다면 주저 없이 스며들어 자신의 열정을 불태워 주면 좋겠습니다.
※ 본 기사는 국립극장 책임장치감독 강승구 님과 진행한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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