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고전여행

판소리 열두바탕을 찾아서
넘치는 사랑 끝에 남은 것
판소리 ‘숙영낭자전(숙영낭자가)’은 판소리의 전성기인 19세기에 크게 유행한 동명의 소설을 판소리로 각색해 부른 것이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숙영낭자가’를 판소리 열두 마당 중 하나로 꼽으면서 특히 전해종 명창이 잘 불렀던 작품이라는 것을 간단히 언급했다. 전해종 이후 정정렬 명창도 ‘숙영낭자가’를 불렀고, 그것을 박녹주 명창에게 전수했지만, 그것은 정정렬이 스승인 전해종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재편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현재는 초창기에 불린 ‘숙영낭자가’의 창본 또는 그 연행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존재하지 않아 원본이 어떻게 불렸는지를 가늠하기 힘들다.

판소리 ‘숙영낭자가’는 어느 순간부터 잘 불리지 않게 됐지만 소설 『숙영낭자전』만큼은 필사본만 지금까지 무려 101종이 확인됐다. 참고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 국민의 인기를 얻었다는 『춘향전』의 국문 필사본은 119종이다. 이본이 많다는 것은 독자들이 작품을 읽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필사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는 작품에 대한 당대 독자들의 높은 관심과 애착을 증명한다.

낭만적 애정이 불러온 역설적 비극

‘숙영낭자가’는 선군과 숙영 낭자의 낭만적 애정사를 전면에 그리고 있다. 남녀 주인공의 애정 문제로 촉발되는 다양한 서사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멜로드라마’로 이해되기도 한다. 주인공 선군과 숙영은 천상에서 죄를 지어 인간 세상에 내려온 신선들이다. 숙영은 천상계도 지상계도 아닌 공간인 옥련동에서 살아가지만, 선군은 안동에 사는 백상공의 외동아들로 인간계에서 태어나면서 자신이 신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선군이 결혼할 나이가 되자 숙영은 그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천상배필임을 알려주는데, 선군은 꿈속 낭자에게 한눈에 반해 상사병에 걸리고 만다. 온갖 방법을 써도 병이 호전되지 않자 선군은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숙영을 찾아 집을 나오고, 하늘에 호소한 끝에 옥련동을 찾아 숙영과 만난다. 그러나 아직 숙영에게는 죄를 씻기 위해 하늘이 정한 3년의 기한이 남아 있었던 터, 계획보다 일찍 찾아온 선군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그러나 선군의 끝없는 구애에 둘은 운우지정을 맺고 남매를 낳아 기르며 몇 년간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선군이 부친의 강권에 학업을 재개해 과거길에 오르는데 그사이 일이 벌어지고 만다. 혼자 남은 숙영이 다른 남자와 사통했다는 모해를 받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결한 것이다. 그 후 장원급제해 돌아온 선군이 진실을 밝히고 숙영은 살아나 둘이 함께 승천하게 된다.
적강 남녀의 애정 이야기는 ‘춘향가’의 춘향과 몽룡의 관계를 떠올리게 할 만큼 익숙한 것이다. 하지만 ‘숙영낭자가’에서 선군이 숙영 낭자를 향해 보여주는 애정은 다른 고전적 애정서사에 비할 바 없을 정도로 과잉돼 있으며, 선군의 사랑은 숙영을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자신의 배필에 대한 집착과 같은 열정적 사랑, 그것은 우리 고소설 속 남녀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현대의 통속소설이 다루는 로맨스와 더 가까워 보인다.
문제는 숙영을 향한 선군의 불도저 같은 애정 공세가 역설적으로 숙영 낭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선군은 과거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난 뒤 숙영이 그리워 몇 번이고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동침하는데, 백상공은 그것이 자신의 아들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며느리가 다른 남성과 동침했다고 오해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 선군과 숙영의 관계를 질투하던 매월이 숙영을 모해하면서 이 일로 인해 숙영은 결백을 증명하고자 자결한다. 숙영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근원에는 그녀를 향한 선군의 과잉된 애정이 자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안전한’ 자유연애에 대한 상상

선군과 숙영의 환상적인 애정 관계는 당대 자유연애를 꿈꾸는 고소설 독자와 판소리 청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환상을 걷어내고 보면, 현실적으로 그것은 양반 자제가 신분도 정체도 모호한(게다가 자신이 선녀라고 주장하는!) 한 여인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부모의 승인이 남녀의 결연에 반드시 필요했던 사회에서, 젊은 남녀의 사사로운 애정 표현은 불가능했으며 그 자체로 특히 여성의 명예에 큰 누를 끼칠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녀의 과감한 사랑을 한결 안전하게 그릴 수 있었던 장치가 바로 두 사람이 천계의 존재였으며, 운명론적으로 짝지어진 존재였다는 서사적 설정일 것이다. 숙영과 선군은 서로에 대한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관계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남녀의 사사로운 만남이었으며, 또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아내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내는 남편의 모습 역시 유교적 관점에서는 분명 비난의 대상이었다. 선군의 부모가 숙영을 받아들인 것도 출신이 불분명한 숙영의 존재를 인정해서라기보다는 상사병을 앓아 죽어가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심지어 백상공은 며느리를 억울하게 죽여놓고서도 책임을 회피하며 아들을 임소저와 재혼시키기에 급급하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숙영낭자전』의 특징으로 말할 수 있는 또 하나는, 이본에 따라 숙영의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이 다양하게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보통은 살아난 숙영이 백상공 부부를 모시고 살거나 선군과 함께 승천한다는 결말을 취하는데, 특히 눈여겨볼 이본이 있다. 바로 재생한 숙영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결말을 가진 이본이다. 다시 살아난 숙영은 자신을 비난한 백상공을 모시지 않는다. 백상공은 숙영의 죽음 이후 선군을 재혼시키려고 집에 들인 두 번째 며느리인 임소저에게 맡겨진다. 시부모와 동거하기를 거부한 숙영의 선택은 당대 사회에서 상당한 파격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숙영이 ‘정절을 지킨 훌륭한 여성이기 때문에’ 용인될 수 있는 서사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양반 좌상객을 의식한 ‘진짜 신선타령’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 실창한 것으로는 ‘가짜신선타령’도 있다. 신선이 되고자 한 양반을 풍자한 내용이라 알려져 있는데, 이 ‘가짜’ 신선타령과 대치시킬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선군과 숙영이라는 ‘진짜 신선’들의 이야기인 ‘숙영낭자가’인지도 모른다. 완전한 인간으로 윤회한 선군과 달리 숙영은 선녀인 채로 그와 만나게 됐고, 결혼 후 8년간 둘은 산속에 정자를 지어놓고 칠현금을 타면서 부부지정을 즐겼다. 말 그대로 ‘신선놀음’을 한 것이다. 양반 좌상객들의 관점에서 당대의 가족 질서를 어지럽히는 선군과 숙영의 과잉된 애정 관계는 이들이 ‘신선이기 때문에’ 용인될 수 있었고, 또 두 사람의 서사가 양반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안전하고 또 낭만적인 이야기로 봉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역설적이게도 ‘숙영낭자가’는 양반들의 기호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서민 의식의 부재를 불러왔다. 판소리란 기본적으로 19세기 서민 청자들의 신분 상승 욕구나 사회적 문제의식을 투철하게 반영하는 장르가 아니던가. 서민 의식이 양반 의식과 공존한 채 공연 현장에 참여한 상·하층 청중의 지적 욕구를 경쟁적으로 자극하고 충족시킨다는 점이 판소리의 큰 매력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 오직 양반 사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사건과 양반들의 취향에 경도돼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숙영낭자가’가 판소리로서 빛을 잃게 된 가장 큰 이유라 추측된다. 선군의 과잉된 애정만큼이나 과잉된 양반 의식이 불러온 안타까운 결과가 아닐까.

글. 이채은 판소리 연행의 의미화를 몸의 관점에서 살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전을 통해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글을 읽고 쓰고 있다.
그림. 김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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