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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명색이 아프레걸’ 리뷰
어제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아프레걸을 위한 찬가
초연 당시, 5회 공연으로 아쉬움을 남긴 ‘명색이 아프레걸’이 확장된 공간과 두 배가 넘는 출연진이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덕션으로 돌아왔다.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바람과 삶을 향해 나아가던 아프레걸을 만나볼 시간이다

국립극장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은 일단 참신한 제목부터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다소 낯설고 이국적으로 들리는 ‘아프레걸(Apres-girl)’이란 용어는 프로그램 북에도 나와 있듯이 “한국전쟁 이후 등장한 새로운 여성상을 일컫는 당시의 신조어로, 봉건적 사회구조와 관습에 구속되기를 거부하며 자기 역할을 찾았던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아프레걸’은 과연 누구이며, 그들은 어떻게 자기 역할을 찾았던 것일까.
일차적으로 아프레걸은 이 작품의 주인공 박남옥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박남옥의 삶과 작업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무대 위에는 제작비를 구하러 다니느라 동분서주하고, 예산을 아끼기 위해 배우와 스태프의 점심밥을 손수 지으며 촬영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숙한 여성상과 모성애를 강조하던 시대에 거친 영화판에서 뭇 사람들을 이끌어가며 영화를 찍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온갖 사회적 편견과 압박에도 포기하지 않고, 갓난아기를 업은 채 현장에서 “레디-고!”를 외치는 박남옥 감독의 모습은 과연 “봉건적 사회구조와 관습에 구속되기를 거부하며 자기 역할을 찾았던” 아프레걸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서로를 비추는 아프레걸들

한편 작품 속에는 또 다른 아프레걸의 모습이 등장한다. 바로 극중극 형태로 펼쳐지는 박남옥의 영화 ‘미망인’ 속 인물들이다. 박남옥 감독은 기존의 인기 레퍼토리인 ‘춘향전’ ‘심청전’이 아니라 현실에 살아 숨 쉬는 인물의 이야기를 찍고자 했고, 전쟁 후 급증한 미망인을 주인공 삼아 촬영을 시작한다. ‘미망인’의 주인공 ‘신’은 6.25 때 남편을 잃고 어린 딸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일부종사를 고집하는 기존의 정숙한 미망인상(像)과 달리, 그녀는 젊은 남자 택과의 사랑을 위해 자식을 멀리 보내는 것을 서슴지 않을 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한 여성이다. 또한 이웃인 ‘숙’ 역시 기존의 관습을 거부하는 씩씩하고 당당한 아프레걸로 등장한다.
원래 박남옥이 찍은 오리지널 영화는 마지막 부분의 필름이 없어서 결말을 알 수 없고, 후반부 사운드도 손상됐다. 하지만 ‘명색이 아프레걸’에서는 이러한 결말을 새롭게 각색해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다. 작품 전체의 메인 테마곡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장면이다. 고연옥 작가의 상상력으로 새롭게 쓰인 ‘미망인’에서 주인공 ‘신’과 ‘숙’은 떠나간 애인을 원망하거나 그리워하는 대신, “실패한 사랑 따위 오만 오천 개라도 끄떡없이/ 망한 세상 있는 힘 다해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활기찬 합창으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이 노래는 공연의 마지막에 이르러,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한 박남옥이 다시 삶의 의지를 다잡으면서 부르는 대규모 합창으로 반복된다. 이처럼 ‘명색이 아프레걸’의 박남옥과 그가 찍은 ‘미망인’ 속 ‘신’과 ‘숙’은 몇몇 노래와 장면 속에 아프레걸의 이미지로 겹쳐지면서, 영화와 현실이 서로를 비추는 양상으로 형상화된다.
한편 ‘명색이 아프레걸’에서는 박남옥의 회상과 독백을 통해 서로 다른 시기를 살아갔던 여성 예술가 최승희·윤심덕·김신재 등이 무대 위에 소환되면서 한층 확대된 아프레걸들의 교감과 연대가 펼쳐진다. 어린 시절 최승희의 춤을 보고 예술의 세계에 매료된 박남옥은 당대의 스타배우 김신재를 동경하면서 영화에 대한 꿈과 애정을 키웠고, 일본 밀항 길에 풍랑을 만났을 때는 뜨겁게 살다가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의 삶과 죽음을 회상한다. 이들은 모두 다른 시대, 다른 장르에서 활동했지만 기존의 사회 관념에 구속되기를 거부하고 시대의 무게와 여성이라는 굴레를 예술을 통해 극복하거나 감내해 나간 이들이다. 무대 위 박남옥의 회상 속에서 이들은 하나로 이어지고, 이러한 맥락에서 ‘아프레걸’은 단순히 6.25전쟁 후 새롭게 등장한 신조어의 범주를 벗어나 시대의 관습과 편견에 맞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모든 예술가, 특히 여성예술가의 형상으로 확대된다.

영화라는 이름의 ‘다시 쓰기’

극 중 ‘아프레걸’ 박남옥이 만만치 않은 현실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방식은 바로 영화 만들기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박남옥의 삶 중에서도 특히 ‘영화’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극은 박남옥이 아이를 출산한 지 3일 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친구들의 격려에 힘입어 이제 자기 손으로 영화를 만들겠다 결심한 박남옥은 제작비와 배우들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온갖 어려움 끝에 간신히 영화 ‘미망인’을 완성한다. 그야말로 영화관에서 시작해 다시 영화관에서 끝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작품이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선 박남옥 감독의 일대기나 눈물겨운 성공 스토리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최초의 여성감독 영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기는 하지만 실제로 ‘미망인’은 흥행에 실패했고, 박남옥은 차기작을 찍지 못한 채 다른 일을 찾게 된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무대 위에서 박남옥의 유일한 영화 ‘미망인’을 재현하거나 복원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실 오리지널 필름 일부가 손상되었기 때문에 복원 자체가 불가능하며, 공연 중간중간 ‘미망인’의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영화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이를 찍는 박남옥의 모습과 현장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영화’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사실 이 작품은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극 중 박남옥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을 뛰어다니며 촬영을 이끌고, 제작비를 구하고, 편집을 마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가 늘 업고 다니는 아기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면서도 영화를 놓지 못했던 그녀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메타포다. 결국 영화는 3일 만에 간판을 내렸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이 작품의 시선이 향하는 것은 박남옥이 어떤 영화를 만들었느냐는 결과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었느냐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왜 그 시대를 살아가던 박남옥은 다른 장르가 아닌 영화 만들기에 그토록 매달렸을까.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고연옥 작가가 주목하는 지점은 바로 현실에 대한 ‘다시 쓰기’로서의 영화이다. 답답한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 새로운 삶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영화 만들기라는 작업으로 발현된 것이다. 그래서 박남옥은 그토록 자기만의 영화를 만들고자 했고, 또한 작가는 ‘미망인’이란 영화의 결말을 새롭게 고쳐 씀으로써 그의 꿈과 욕망을 무대에서 이어가는 것이다. 극 중 ‘미망인’의 몇몇 장면을 재현하면서 의도적으로 일부 대사와 내용을 바꾼 것 또한 이러한 맥락, 즉 예술을 통한 ‘다시 쓰기’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초연 당시 단 5회 공연으로 아쉬움을 남긴 ‘명색이 아프레걸’이 이번에는 해오름극장으로 무대를 옮겨 한층 확장된 공간과 두 배가 넘는 출연진이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덕션으로 돌아왔다. 박남옥의 삶과 회상, 극중극인 영화 속 장면이 뒤섞이는 시공간의 변화무쌍한 운용과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 모두를 아우르는 장면 진행 모두 쉽지 않은 작업이었겠지만, 김광보 연출은 시대의 굴레를 극복하는 행위로서의 ‘영화 만들기’라는 극 전체의 초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풍부한 시청각적 효과로 생동감 넘치는 무대를 구현해 냈다. 에피소드와 캐릭터를 압축해서 보여준 이경은의 안무는 현실을 비추는 예술의 기능을 은유적으로 강조하는 하나의 장치였다. 작곡가 나실인의 친근하고 선율을 강조한 멜로디 또한 극의 무게를 조절하며 관객이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출연진이 ‘명색이 아프레걸이라면’을 합창하는 가운데 관객도 흥겹게 따라 부르는 모습에서는 이 노래가 어제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아프레걸을 응원하고 힘을 실어주는 경쾌한 찬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글. 김주연 월간 ‘객석’ 기자로 출발해 공연 현장과 이론을 잇는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여러 매체에 공연 및 예술에 관한 칼럼을 쓰면서 대학 강의와 드라마터그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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