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하나

NTOK LIVE+ ‘로미오와 줄리엣’ ‘엉클 바냐’ 프리뷰
연극도, 사랑도, 그리고 우리의 삶도 계속될 거예요
극장의 문은 다시 열리고, 연극은 계속될 것이며, 우리의 삶도 이어질 것이라고….
- ‘엉클 바냐’ 중에서 -

2021-2022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를 꼽으라면 NTOK Live+(엔톡 라이브 플러스)다. 2014년부터 선보인 국립극장 NT Live의 오랜 팬이기 때문이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베네딕트 컴버배치 ‘햄릿’ 티켓을 사려다 컴퓨터가 다운되었을 때도, 질리언 앤더슨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티켓을 구하지 못하고 영 빅 시어터(Young Vic Theatre)에서 쓸쓸히 발길을 돌렸을 때도, 사실 믿을 구석이 있었다. 한국에서 NT Live로 볼 수 있겠지.
국립극장의 NT Live는 국내 공연 관객의 인식을 바꾸어놓은 시도였다. 녹화된 영상을 공연으로 볼 것인가. 이 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사이 우리는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코로나를 맞이했고, 공연영상화는 ‘피치 못할 대안’에서 ‘새로운 관람 문화’로 정착하고 있다. 극장과 국경의 문이 동시에 닫힌 지난 시간 동안, 그나마 내 숨통을 틔운 건, 국립극장의 NT Live와 영국 국립극장이 2020년 새롭게 서비스를 시작한 NT at Home이었다. 언제든 집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골라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그래도 잘 번역된 한글 자막과 대형 스크린으로 보는 재미를 느끼려면 남산으로 올라야 제맛이다. 덕분에 영국의 무대에서라면 미처 놓쳤을 컴버배치의 땀에 푹 젖은 잿빛 셔츠와 앤더슨의 신비한 연회색 눈동자에 맺힌 눈물을 볼 수 있었으니까.
국립극장은 이제 NTOK Live+로 우리의 선택을 영국뿐 아니라 세계의 유수한 극장으로 한층 확장시킨다. 이미 2021년 하반기에 기존의 NT Live 라인업에 더해 파테 라이브(Pathe Live)의 ‘스카팽의 간계’, 이타 라이브(ITA Live)의 ‘오이디푸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상영되는 ‘로미오와 줄리엣’ ‘엉클 바냐’ 두 작품이야말로 NTOK Live+를 제대로 경험할 기회다. 2009년부터 공연영상화를 이끌어온 영국 국립극장의 새로운 챕터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현장에 있는 듯, 영상 중계로 생생하게 전해지던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웅성거림과 박수 소리는 사라졌다. 대신 굳게 닫힌 공연장, 텅 빈 객석에는 오롯이 배우들뿐이다. 무대와 영상을 가르는 경계는 더욱 확장되고, 카메라 워크는 더욱 정교해졌으며 영상미는 더욱 유려해졌다. 자, 그럼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관객도 없이 연기한 영상을 공연 영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필자에게는 그렇다. 적어도 이 영상은 전 세계적 팬데믹 시대를 견뎌낸 공연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로미오와 줄리엣’ ⓒRob Youngson
코로나 시대, 영상으로 되살린 불멸의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

2019년 영국 국립극장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라인업에 올렸다. 하지만 코로나는 영국의 모든 극장의 셔터를 내리게 했다. 2020년 여름, 무대에 올릴 계획이었던 ‘로미오와 줄리엣’ 프로덕션도 무산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영국 국립극장은 객석 거리두기를 하며 극장의 문을 조심스레 다시 열기 시작했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하나둘, 극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관객을 맞기에는 무리였다. 코로나는 언제든 다시 극장의 문을 닫게 할 수도, 모든 티켓을 환불 조치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영상으로 제작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렇다면 촬영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전염의 위험을 막기 위해 가장 적은 인원이 모여서 하나의 신(scene)을 만들 것, 영국 국립극장의 모든 공간이 열렸다. 무대와 드레스룸, 기계장치실, 먼지 쌓인 사무실과 관객이 없는 텅 빈 객석까지. 이 모든 공간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만나는 파티장으로, 사랑을 맹세하는 줄리엣의 발코니로, 또 차갑게 식은 서로의 시신을 포옹하고 있는 장례식장으로 바뀐다. 이렇게 17일간의 촬영이 90분의 영상으로 만들어져 2021년 4월 4일부터 5월 3일까지 영국 스카이 아츠(Sky Arts) TV로 공개되었다.
‘막이 열리면’이라는 시작은 맞지 않겠다. 영상이 시작되면, 카메라는 텅 빈 백스테이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배우들의 얼굴을 하나씩 쫓는다. 낡은 철제 캐비닛, 공연 의상이 잔뜩 걸려 있는 행거, 여기저기 바닥에 널브러진 소품 사이로 배우들이 의자를 가지고 자리를 잡는다. 공연을 앞둔 배우들의 들뜬 분위기,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잊지 마, 네가 보게 될 건 영화가 아니라, 공연이야”라고 말하듯이. 줄리엣 역의 제시 버클리(Jessie Buckley)와 로미오에 캐스팅된 조시 오코너(Josh O’Conner)의 눈빛이 스친다. 두 사람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 사랑에 빠진 연인의 얼굴에서 감출 수 없는, 생기 넘치고 화사한 웃음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1597년에 쓴 이 불멸의 러브 스토리가 5막 비극이 아니라 해피엔드로 끝날 것만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 ⓒRob Youngson

조시 오코너와 제시 버클러는 무대와 영상 문법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대담한 도전자이자 바로 지금, 가장 사랑받는 젊은 배우들이기도 하다. 조시 오코너는 영국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찰스 왕세자 역할로 73회 에미상 남우주연상, 78회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모두 휩쓸며 2021년 가장 주목받는 배우로 떠올랐다. 실패한 사랑과 결혼의 주인공 찰스 왕세자가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로미오로 드라마틱하게 변신한다니. 하지만 내게 더 인상적이었던 건 줄리엣 역의 제시 버클리였다. 영화 ‘더 스파이’에서 남편의 외도를 알고 좌절하던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부인이, HBO 시리즈 드라마 ‘체르노빌’에서 원폭에 노출된 소방관 남편을 찾기 위해 병원을 헤매던 파마머리 부스스한 그 여자가, 그리고 영화 ‘와일드 로즈’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가창력 있는 시골 아가씨까지, 사실 이 모든 배역의 주인공이 한 사람이라는 걸 최근에 알았다. 그녀가 제시 버클리였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 역시 잠이 드는 독약을 마시기 직전, 로미오를 향한 사랑과 깨어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리는 줄리엣의 긴 독백이다. 모든 배우는 그녀를 둘러싸고 이 신성한 의식을 지켜보고 있다. 독약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줄리엣의 시선 속에서 배우들은 마치 유령처럼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사이먼 고드윈(Simon Godwin) 연출은 가장 연극적인 이 장면을, 가장 아름다운 카메라 워킹으로 영상에 담아냈다. 에밀리 번스(Emily Burns)의 각색은 ‘로미오와 줄리엣’ 역사상 가장 강한 여성들을 탄생시켰다. 줄리엣은 더욱 강하고 저항적인 딸이자 여성으로, 그리고 줄리엣의 어머니 캐풀렛 부인은 차갑고 오만하게, 그리고 위협적이고 압도적으로 캐풀렛가를 지배한다. 이 오래된 사랑 이야기가 반복되고 반복되는 건, 오랜 시간 원수로 대립해 온 베로나의 두 가문을 배경으로 어린 연인의 비극적 죽음 뒤에, 복수 대신 맞이하는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가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 ‘2022 신년 음악회’ ‘엉클 바냐’ ⓒJohan Persson
가장 아름다운 오프닝, ‘엉클 바냐’

무대장치와 소품이 쌓여 있는 해럴드 핀터 극장 백스테이지 문 너머로, 비 내리는 런던 거리가 보인다. 우산에 묻은 비를 털며 도착한 배우들은 하나둘 텅 빈 무대로 들어선다. 영화 같은 영상미가 돋보이는 이 장면 위로 자막이 흐른다. “2020년 초반, 세계의 극장은 코로나로 문을 닫고, 3월 16일 ‘엉클 바냐’의 스태프와 배우들은 마지막 공연을 한 주 앞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들은 극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오랫동안 비워놓은 빈집의 가구마다 드리워진 하얀 천을 조심스레 벗겨내듯 배우들은, 무대 세트 위의 소품과 가구를 가려놓은 장막을 정성껏 걷어낸다. 수많은 공연 영상 중 가장 아름다운 오프닝으로 꼽고 싶은 이 장면은 결국 ‘엉클 바냐’의 엔딩과도 연결된다. 삶에 낙심한 바냐 아저씨를 다독이는 소냐가 “그래도 살아나가요”라고 하는 긴 독백처럼 “극장의 문은 다시 열리고, 연극은 계속될 것이며, 우리의 삶도 이어질 것이라고”.
언제 깨진 지도 모를 커다란 창문 사이로 손질을 멈춘 정원의 넝쿨 가지가 손을 뻗어 드리워져 있다. 무대 디자이너, 래 스미스(Rae Smith)는 쇠락한 가문의 지난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황폐하고 오래된 집의 넓은 거실을 정교하게 만들어냈다. 이 낡은 집과 함께 거실 한 켠 움푹 꺼진 소파 위에서 나이 들어가는 유모 나나만이 참을성 있게도 거실에 오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좌절을 조용히 관조한다.
1899년 모스크바 예술극장(Chekhov Art Theater)에서 초연된 안톤 체호프의 ‘엉클 바냐’는 ‘바냐’라고 불리는 이반과 그의 죽은 누이동생의 딸 소냐가 함께 살고 있는 시골 영지에 소냐의 아버지 세레브랴코프와 젊고 아름다운 후처 옐레나가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체호프의 장기인 엇갈린 사랑의 화살표는 이곳에서도 마구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데, 바냐는 옐레나의 뒤를 쫓고, 소냐는 마을 의사인 아스트로프를 사랑한다. 하지만 아스트로프의 마음은 옐레나의 것이다. 엇갈린 삼각관계 속에서 세레브랴코프는 시골 영지와 저택을 팔겠다며 선포하고, 바냐는 자신의 청춘을 바쳐 일해 온 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에 비관하며 세레브랴코프에게 권총을 겨눈다. 결국 이 모든 소동이 끝나고 모두가 떠난 뒤, 다시 바냐와 소냐의 지루하지만 평온한 삶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자유롭고 도전적인 젊은 작가를 발굴하는 데 힘쓰고 실험적인 연극을 선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영국 로열코트(Royal Court)의 연출가이자 예술감독이었던 이언 릭슨(Ian Rickson)과 개성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바냐 역의 토비 존스(Toby Jones)가 2019년 해럴드 핀터의 ‘생일 파티’에 이어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다. 무엇보다 궁금했던 건, 코너 맥퍼슨(Conor McPherson)의 각색이었다.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극을 쓰고 연출하는 그는 이 시대에 체호프를 어떻게 불러낼까. 한국 관객에게도 소개된 코너 맥퍼슨 작, ‘거기’와 ‘샤이닝 시티’는 지금도 나의 오랜 페이버릿 리스트일 만큼, 사실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언 릭슨 연출과 코너 맥퍼슨은 원작을 현대적으로 각색하는 대신 오히려 체호프의 이야기를 그대로 들어보자 한다. 이 혼란한 시대를 통과하는 우리에게 등장인물 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어긋난 사랑은 더욱 고통스러워졌으며, 무력한 사람들을 향한 풍자는 더욱 시니컬하게 다가온다.

‘엉클 바냐’ ⓒJohan Persson

그동안 수많은 버전의 ‘엉클 바냐’를 봤지만, 이번 프로덕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단연 리차드 아미티지였다. 이처럼 섹시한 시골 의사 아스트로프가 또 있을까. 2014년 런던 올드 빅 시어터(Old Vic Theatre)에서 아서 밀러의 ‘시련’에서 리차드 아미티지의 열연을 본 이후 6년이 흘렀다. 다시 만난 그는 희곡 속 대사처럼 ‘좀 더 나이 들고, 지쳤지만’ 훨씬 더 깊어진 눈빛으로 옐레나를 사랑하고, 또 나이가 들면 체념도 쉬워지듯 그녀를 놓아준다.
팬데믹이 드리운 장막은 쉽게 걷히지 않고, 영상으로 공연을 보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이 고전적인 두 희곡은 우리에게 스크린을 넘어 이렇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우리에게 주는 시련을 참아내요,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연극도, 사랑도, 그리고 우리의 삶도 계속될 거예요.”

글. 최여정 무대를 사랑하고, 보고, 쓴다. 저서로는 ‘이럴 때, 연극’ ‘셰익스피어처럼 걸었다’가 있으며, 좋은 공연과 책 이야기를 나누는 유튜브 ‘문발살롱’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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