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국립발레단 ‘주얼스’ 프리뷰
발란신이 훔친 보석
아름답게 세공된 작품으로 국립발레단 창립 60주년을 장식하다
JEWELS(다이아몬드-김리회·박종석) ⓒ국립발레단
보석은 그 값어치가 변할지 몰라도,
발란신의 보석(‘주얼스’)은 언제나 흥행을 보증한다
- 1967, ‘뉴욕타임스’ -
보석과 발레, 필연적 만남

괴도 뤼팽이 반짝이는 보석을 훔친다면 여기, 보석의 아름다움을 훔친 이가 있다. 무용가 조지 발란신(1904~1983). 러시아 출신으로 10세에 황실 발레학교에 입학한 그는 유럽을 거쳐 미국에서 안무가로 활약했다. 1966년 초, 발란신이 명품 매장이 즐비한 뉴욕 5번가의 보석상을 방문한 뒤 최초의 전막 신고전주의 발레 ‘주얼스’(1967)가 탄생했다. 이 작품에는 사랑에 빠진 순진한 아가씨도, 백마 탄 왕자도, 하다못해 그 흔한(?) 요정도 나오지 않는다. 총 3막으로 구성된 줄거리 없는 발레 ‘주얼스’에서 발란신은 무용수의 의상과 움직임, 음악만으로 에메랄드(1막)·루비(2막)·다이아몬드(3막), 세 가지 보석이 지닌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물건 정리법으로 반향을 일으킨 곤도 마리에의 이 말은 순수예술의 신봉자를 자처한 발란신의 안무 경향을 설명하기에도 적합한 캐치프레이즈다. 그는 발레 본연의 아름다움은 무대 위 무용수의 신체와 움직임 그 자체에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고전의 유산에서 자신을 ‘설레게 하지 않는 것’을 과감히 덜어냈다. 그중 하나가 줄거리다. ‘지젤’ ‘호두까기인형’ ‘백조의 호수’ 등 우리에게 익숙한 낭만발레에서 이야기 구조는 빠지지 않는 요소지만, 줄거리를 비롯한 장식적인 무대장치와 의상, 불필요한 마임 등 정형화된 요소를 배제하고자 했다. 대신 고전발레의 테크닉은 현대적으로 계승해 신고전주의 발레를 창시했다. 발란신은 모던발레의 출발점이 된 발레 뤼스(1909년 프랑스에 조직된 러시아 발레단), 미국에 정착한 뒤 설립한 아메리칸 발레학교·뉴욕 시티 발레단을 거치며 창작한 ‘아폴로’(1928) ‘돌아온 탕아’(1929) ‘세레나데’(1935) ‘알레그로 브릴리언트’(1956) ‘차이콥스키 파드되’(1960) 등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고히 했다.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춤언어와 함께 리듬에 맞춰 분절된 동작, 빠르고 화려한 스텝, 선율에 따른 변화무쌍한 대열이 ‘보이는 음악, 들리는 춤’을 지향한 발란신 안무의 특징으로 꼽힌다.

무용수의 신체가 돋보이도록 짧고 몸에 딱 달라붙는 간결한 무대의상을 선호한 발란신이지만, 그의 후기작이라 할 수 있는 ‘주얼스’를 구상할 때 출발점이 된 것은 화려한 보석을 걸친 무용수의 이미지였다. 그에게 영감을 준 보석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의 보석상 클로드 아펠은 “원석을 보석으로 만드는 세공 과정”에 대한 작품 아이디어를 제안했으나, 발란신은 “내가 관심을 둔 것은 오로지 보석의 아름다움이었다”라고 잘라 말했다. 발란신의 오랜 파트너였던 뉴욕 시티 발레단의 의상 제작자 바바라 카린스카(1886~1983)가 입고 춤추기엔 너무 무거운 보석 대신 그에 가깝게 만든 장식으로 ‘에메랄드’ ‘루비’ ‘다이아몬드’의 의상을 만들었다. 발란신은 쇤베르크의 음악을 쓰는 ‘사파이어’도 구상했으나, 사파이어 빛깔의 의상을 제작하기가 어려워 포기했다고 아쉬움을 전한 바 있다.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보석과 발레, 그 둘의 만남은 유미주의자였던 발란신에겐 아마 필연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JEWELS(루비) ⓒ국립발레단
JEWELS(에메랄드) ⓒ국립발레단
발란신의 세공 솜씨

뉴욕 시티 발레단이 1967년 4월 뉴욕 주립극장에서 세계 초연한 ‘주얼스’는 즉각 대성공을 거둔다. 흥행에 힘입어 그해 발레단의 가을 시즌 오프닝 작품으로 다시 선보이기까지 했다. “신은 창조하지만 나는 창조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본 것, 무용수들의 움직임, 다른 이들의 작업 등 필요한 모든 곳에서 모으고 훔쳐 올 뿐이다”라는 말을 남긴 발란신. 실로 ‘주얼스’에는 그가 발레 인생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원석을 모아 보석을 만들어낸 발란신의 세공 솜씨는 감탄할 만하다.
1막 ‘에메랄드’의 우아함과 사랑으로 충만한 감정은 프랑스 낭만발레에서 가져왔다. 투명한 녹색 로맨틱 튀튀를 입은 무용수들은 프랑스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1845~1924)의 ‘펠리아스와 멜리장드’(1898) ‘샤일록’(1889)에 맞추어 부드럽고 유려하게 움직인다. 2막의 타오르듯 정열적인 ‘루비’는 역동적이고 활기찬 미국에서 발란신이 발전시킨 혁신적인 발레 스타일을 가장 잘 보여준다. 발란신의 음악적 파트너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카프리치오’(1929)는 여기에 자유로움을 더한다. 체조 의상 같은 붉은색 발레복 차림을 한 무용수들은 직선적인 몸의 형태가 특징인 독창적 안무를 음악에 맞춰 재기발랄하게 선보인다. 보석의 왕, ‘다이아몬드’를 테마로 한 3막에서 발란신은 러시아 황실 발레로 회귀한다. 자신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차이콥스키(1840~1893)의 교향곡 3번 ‘폴란드’(1875)를 사용했다. 마지막 5악장의 폴로네즈 선율에 따라 남녀 무용수가 짝을 지어 춤추는 피날레는 총 3막 중 가장 많은 무용수가 동원되는 장면으로, 마치 성대한 황실 결혼식을 보는 듯하다.

단박에 관객을 열광시킨 환상적인 작품이지만, 초창기 평단의 반응은 엇갈렸다. 노골적인 수익 창출용 작품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근래에 각광받는 브랜디드 콘텐츠(문화적 요소와 브랜드 광고를 결합한 콘텐츠) 마케팅에 비견될 만큼, 초연 당시 ‘주얼스’ 프로그램 노트에는 보석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이 뚜렷이 적혀 있다. 낭만발레·모던발레·고전발레 각 스타일로 구성된,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관객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안무한 데는 발란신의 전략적 판단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 무렵 뉴욕 시티 발레단이 대극장으로 무대를 옮기면서, 보수적 취향의 백인 중산층 계급의 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광고 상품이냐 예술 작품이냐의 논란을 잠재운 것은 ‘주얼스’가 품은 뛰어난 예술성. 세상에 나온 지 55년이 지난 지금까지 뉴욕 시티 발레단은 물론 파리 오페라 발레단, 마린스키 발레단, 로열 오페라 발레 등 세계 주요 발레단에서 중요한 모던발레 레퍼토리로 ‘주얼스’를 선보이고 있다. 진짜 보석의 가치는 세월이 흐를수록 빛나는 법이다.

국립발레단 창립 60주년을 장식하다

국립발레단(단장 겸 예술감독 강수진)의 ‘주얼스’(2021년 10월 20~24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초연 소식은 코로나 2년 차로 침울했던 2021년 공연예술계를 환히 밝혀주었다. 그간 국내에서 발란신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데다가, 특히 ‘주얼스’는 무용수의 뛰어난 기량을 한껏 과시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많은 기대를 모았다. 발란신 작품을 보존할 목적으로 1987년 설립된 조지 발란신 트러스트 재단에서 파견된 연습 코치가 한국을 찾아 직접 단원들을 훈련했다. 무용수들이 테크닉에만 치중하지 않고, 스텝의 의도와 음악성을 이해하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관객과 평단의 호평에 힘입어 국립발레단은 창립 60주년을 맞은 2022년의 시작을 ‘주얼스’와 함께한다. 2014년부터 국립발레단을 이끌고 있는 강수진 예술감독이 취임 당시 “국립발레단이라는 원석을 갈고닦아 반짝이는 보석이 되도록 만들겠다”라는 포부를 밝힌 바 있어 더욱 의미 깊다. 이번 공연 장소 또한 창립 축하 공연의 의미를 더한다. 오랜만에 국립발레단이 태동한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3일간 무대를 펼치는 것. 1962년 국립극장의 전속단체로 출범한 국립발레단은 2000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하며 현재의 예술의전당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주얼스’는 발란신이 뉴욕 주립극장이라는 큰 규모의 공간을 갖게 된 자신의 발레단이 넓은 무대를 누비며 춤추도록 훈련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작년 초연이 이뤄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보다 넓은 무대를 가진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발란신의 의도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JEWELS(다이아몬드) ⓒ국립발레단
글. 박서정 월간 ‘객석’ 기자.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문화예술을 좋아한다. 현장과 기록의 힘을 믿으며 매달 공연예술 기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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