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을
주는 곳

돈의문박물관마을
시간을 달려 동네 한 바퀴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서울의 중심부, 한때 새문안 동네라 불리던 골목 어귀에 들어서면 과거를 간직한 마을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느리고 오래된,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온갖 것이 여기에 모여 있었다.
돈의문박물관마을 입구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오른편에 음악이 들려오는 이층집이 보인다.

새문안 동네에서 돈의문박물관마을로

우리에게는 서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그러니까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이었던 돈의문은 풍수를 이유로 폐쇄되었다가 1422년 현재의 돈의문 터에 새롭게 지어졌다. 이때부터 돈의문에는 새문新門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돈의문 안쪽 동네는 새문안골·새문안 동네로 불렸다.
조선시대 이 돈의문 밖 일대는 군사·외교, 그리고 경제적으로 교통의 요지였다. 공문서를 전달하는 파발꾼, 군수물자를 납품하는 상인, 순찰하는 군병들로 늘 붐볐고 싸전과 약국, 신발과 땔감 등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1876년 조선과 일본의 수호조규가 체결된 이후 1899년에는 돈의문에서 청량리를 왕복하는 전차가 개통됐고, 돈의문 앞에 경인철도 서대문정거장이 설치되었다. 경인철도를 통해 외국인과 외국산 화물이 돈의문으로 속속 도착했고, 돈의문은 자연스럽게 신문물을 조선에 소개하는 창구가 되었다. 광복 이후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가정집을 개조한 과외방이 성행했고, 1980년 과외 금지법이 시행된 뒤 1990년대 초부터는 주민들이 떠난 주택을 개조해 식당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새문안 동네는 식당 골목으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 늘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이는 활기찬 동네였다는 얘기다.
서울은 백제의 수도 한성부터 고려의 남경, 조선의 수도 한양을 거쳐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도로 2,0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품은 도시다. 그러나 보존되어야 할 역사도시 서울의 숱한 동네가 전쟁과 산업화, 무분별한 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새문안 동네 역시 2003년 ‘돈의문 뉴타운’을 조성할 때 근린공원이 될 예정이었으나 동네가 지닌 100년간의 문화·역사적 가치에 대한 고민이 뒤따랐다. 결국 기존 건물을 철거하는 대신 원형을 유지하고 되살리는 ‘서울형 도시재생’ 방식으로 계획을 선회했고, 옛 새문안 동네는 이곳에 살았던 이들의 삶과 기억, 그리고 도시의 오래된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돈의문박물관마을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돈의문구락부의 내부 모습. ‘구락부俱樂部’는 ‘클럽Club’을 일본식으로 음역한 단어로,
마을에 거주했던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의 이야기와 자동차, 양장, 구두 등 근대 신문물을 살펴볼 수 있다.

과거로 떠나는 시간 여행

1930년대 지어진 유한양행 사옥을 리노베이션한 서울도시건축센터 옆 좁다란 계단을 오르면 근대 사교장의 모습을 재현한 ‘돈의문구락부’와 1960~80년대 과외·하숙방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삼대가옥’이 먼저 눈에 띈다. 더 깊숙이 마을 안쪽 골목에 들어서면 여러 시대에 걸쳐 지어진 집들을 만날 수 있는데, 1930년대의 도시형 한옥과 프랑스식 주택, 1960~70년대에 지어진 슬래브 양옥, 흔히 적산가옥이라 불리는 일식 주택까지 보존되어 있어 마치 100년의 세월이 마을 안에 머무는 듯하다. 오래 쌓인 시간만큼 반질반질한 나무 바닥과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낡은 계단,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부했을 자그만 방까지 서민들의 질박한 삶의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어 숨을 크게 들이켜면 밥 짓는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울 것만 같다.
마을 내 공간들은 모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데, 건물 하나하나가 박물관, 전시관, 공방, 예술가의 작업실 등으로 활용되는 덕분이다. 이탤리언 레스토랑 ‘아지오’와 한식 식당 ‘한정’으로 사용되던 양옥은 이제 ‘돈의문역사관’의 전시실이 되었다. ‘이조순대국’과 ‘고인돌’ 집은 교육관이 되었으며, ‘무진장’과 ‘한양삼계탕’ 집터에는 경희궁 궁장과 근대 건물지의 흔적들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 유적전시실을 조성했다. 여기에 6080세대에게 익숙한 가정집과 그 시절의 만화방, 오락실, 이발소, 극장 등 아날로그 감성이 흐르는 공간을 그대로 재현해 기성세대에게는 향수를, 젊은 세대에게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볼거리는 물론 6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마을 장터를 현시대에 맞게 구현한 ‘돈의문 골목시장’이 열려 즐길 거리까지 가득하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의 도심 관광형 프로젝트로, 정감 어린 골목을 거닐며 수공예품과 다양한 먹을거리, 마술, 거리극까지 만나볼 수 있다.
낯설고도 익숙한, 이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살아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부지런히 마을 구석구석을 걷다 보면 글귀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유적에는 과거의 오래된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보편적으로 역사적 가치로 인식되는 가까운 과거들도 포함된다. 그것은 시간의 길이로 재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기억의 무게로 결정하는 것이다.
- 정기용 『사람 건축 도시』

1956년에 지어져 3대가 살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삼대가옥'.
도시 한옥과 양옥, 일본식 가옥의 구조가 합쳐져 근대 우리나라 건축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1960~70년대를 재현한 '학교 앞 분식' 건물. 1층은 분식점으로, 2층은 '추억의 음악다방'으로 운영된다.
매주 토요일 정오부터 3시까지 46년 경력을 자랑하는 최장수 DJ를 만나볼 수 있다.

그래, 빛바랜 교과서와 케케묵은 솜이불, 시간이 비켜간 이 마을에 왠지 마음 한편이 시큰했던 건 유년의 기억이 닿아 있기 때문이리라. 오래된 것들은 쉬이 자취를 감추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것들이 빠르게 채워가는 시대. 그래서 더 사람의 역사를, 그리고 마을의 역사를 열심히 기억하고 기록해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

돈의문박물관 바로가기 https://dmvillage.info/
취재. 편집부 사진. 김성재 SSSAUN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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