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국립무용단 <산조>
귀히 돌아보는 한국춤의 토대
산조散調. 전통음악과 춤의 정수인 산조를 제목으로 내세움으로써,
국립무용단은 ‘전통의 현대화’라는 거대 담론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있음을 선언했다.

국립무용단의 <산조>가 돌아온다. 2년 만이다. 초연 당시 화려한 조합의 창작진으로 화제를 모았고, 화제만큼의 성과를 보여준 작품이다. 그런데 창작진보다 더욱 큰 관심을 끈 것은 작품 소재였다.

흩어진 가락의 미학

산조는 민속음악에 속하는 기악 독주 양식이다. ‘흩어질 산’에 ‘가락 조調’이니, ‘흩어진 가락’ 혹은 ‘허튼가락’을 뜻한다.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으로 이어지며 다양한 가락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선율을 만든다. 기본적인 장단과 조성이 있되 이에 얽매이지 않고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구성하고 변형한다. 따라서 산조를 연주한다는 것은 오랜 수련을 거쳐 쌓아온 토대가 탄탄하다는 뜻이요, 이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노닐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뜻이다.
산조에서 가야금·거문고·대금 등의 독주 악기가 장구 장단에 맞춰 기량과 개성을 발휘한다면 춤꾼은 그 위에서 노닌다. 바로 산조춤이다. 역시나 오랜 수련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풀어내는 몸짓인 산조춤은 한국춤의 미학을 응축하고 있다. 산조가 음악 양식인 동시에 춤 양식으로 발전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산조나 산조춤 모두 개인이 호젓하고 내밀한 방식으로 체득의 경지를 풀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즉흥성이 강하니 솔로 퍼포먼스에 적합한 장르인 셈이다. 그렇다면 수십 명의 무용수가 대극장 무대에 오르는 국립무용단의 대형 작품으로는 합당치 않은 게 아닌가.
국립무용단의 <산조>는 산조의 양식적 특성뿐 아니라 그 바탕을 이루는 철학을 탐구했다. 산조를 춤의 반주 음악으로 소비하는 것에서 나아가 몸에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다루는 방식에 주목한 것이다. 수련 끝에 얻은 자유로움이란 지극히 개인적으로 체득된 경지이지만 한 걸음 떨어져 성찰해 보면 전통과 현대, 고전과 창작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지점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통을 계승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국립무용단의 사명과 조우한다.

전통의 현대화를 이끄는 사람들

전통과 현대, 고전과 창작의 조화로움에 대한 고민은 창작진의 구성에서 드러난다. 안무는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 출신의 중견 안무가인 최진욱이 맡았고, 현대무용단 고블린파티의 임진호가 협력 안무가로 참여했다. 국립무용단원의 몸에 밴 움직임과 경험, 관점을 충분히 녹여내되, 이를 낯설게 바라보고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고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음악에서도 전통에 대한 존중과 현대적 해석이 어우러진다. 1막에서 이선화(거문고), 김동원(장고)의 단출하고도 힘 있는 거문고 산조가 모던한 미장센과 어우러져 큰 극장의 여백을 채운다면, 2막과 3막에선 안무가이자 음악가인 김재덕이 김영길 명인의 아쟁 산조와 구음, 일렉트로닉 선율을 조합해 산조를 재해석한다.
그리고 정구호가 있다. <묵향>(2013), <향연>(2015) 등 국립무용단과 여러 해 작업해 온 그는 세련되고 과감한 디자인으로 ‘전통의 현대화’라는 담론을 누구보다 성공적으로, 그리고 끈기 있게 수행하는 인물이다. 안무가가 아니면서 한국춤을 이처럼 강력하게 바꾸어놓은 이는 드물다. 정구호가 연출 및 무대·의상·영상디자인을 담당한 <산조>는 ‘정구호 시그너처 한국춤’의 전형에 들어맞으면서도, 가장 과감하고 성찰적이다.

독특한 미감으로 드러낸 정체성

전통과 현대의 조화는 필히 정반합正反合의 구조를 끌어들인다. <산조>는 총 3막 9장으로, 각 막이 세 장으로 구성되었으니 완전한 삼각 체제를 이룬다. 1막 ‘중용中庸’은 거대하고 억압적인 평온을, 2막 ‘극단極端’은 불균형과 불협화를, 3막 ‘중도中道’는 평온과 불협이 만나 이루는 새로운 균형을 보여준다. 단단했던 질서가 무너지고 다시금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한국춤의 움직임을 해체·분석하며 ‘새로운 전통’을 세운다.
1막 ‘중용’은 전통적 질서를 시원始元의 풍경처럼 그린다. 지배자 같은 여성 무용수 한 명과 군무가 계층을 이루고, 여성 군무와 남성 군무가 전통사회의 성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2막 ‘극단’에선 계층이 사라지고 남녀 성역할도 흐리다. 하지만 게임 속 캐릭터처럼 평면화되고 파편화되어 만민에 대항해 경쟁한다. 3막 ‘중도’는 남녀 모두가 억압적 구조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정중동을 추동하는 힘은 작고 독특한 몸짓들이다. 머리 빗고 세수하고 바닥을 닦는 등 일상에서 길어 올린 찰나적 몸짓들이 ‘부채춤’ ‘장구춤’의 춤사위처럼 국립무용단원들의 몸에 밴 양식화된 움직임과 어우러지며 독특한 미감을 형성한다.
막대는 <산조>를 관통하는 소품이다. 1막에선 화려하고 과시적인 비녀로, 2막에선 공격과 방어의 도구로, 그리고 3막에선 일상용품이자 무구舞具로 등장한다. 무용수들은 다양한 사이즈의 막대를 온갖 방식으로 활용하는데 이 과정에서 막대에 켜켜이 배어든 몸짓의 역사가 드러난다. 막대의 빅히스토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신나게 노는 와중에 언뜻언뜻 보여주는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모두 무용수 몸에 깊이 밴 테크닉이요 풍부한 레퍼런스들이다. 무용수들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중에 드러나는 노련한 북놀림과 매서운 발걸음이야말로 국립무용단의 정체성이요 미학이다.
정반합의 세계관은 무대 위에 매달린 무대장치로도 친절하게 설명된다. 1막에서 무대를 메울 정도로 커다랗고 거친 바윗덩어리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며 육중하고도 거친 전통을 가시화한다. 2막에선 날카로운 예각 삼각형 세 개가 겹쳐 회전하며 대립하는 힘의 역동을 보여준다. 3막에선 수묵화처럼 부드럽게 다듬어진 자연이 원형 LED 구조물 안에 포섭되며 안정적인 구조를 이룬다.
마지막 장면에선 스무 명의 무용수가 5열 종대로 늘어서서 두 팔을 몸통 앞뒤로 맺고 푼다. 한국춤의 토대인 호흡과 팔사위를 새롭게, 귀히 돌아본다 하겠다. 고요히 두 팔을 좌우로 뻗고 천천히 제자리에서 도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질서정연한, 그러나 조금씩 어긋나는 느슨한 원들은 질문과 성찰로 쌓아 올린 세계다.

글. 정옥희 무용연구자 및 비평가. 춤과 춤이 아닌 것, 무용수와 무용수가 아닌 이 사이의 경계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는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이 춤의 운명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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