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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절창Ⅲ>
경계 너머, 넓은 판 깊은 소리로
귀명창은 아닌지라 추임새 한번 못 하고 돌아왔고,
이 소리꾼들이 왜 이렇게나 멋진지 정확한 말로 표현할 재주도 없었지만,
이 공연이 대단한 힘을 지녔다는 것만큼은 틀림없이 알 수 있었다.

국립창극단은 ‘절창’을 “젊은 소리꾼을 통해 판소리의 현재와 미래를 감각적으로 사유해 보는 무대”라고 말한다. 어떤 한 장르의 ‘현재와 미래’를 언급하는 일은 꽤 조심스럽고 무거운 일이다. 그렇지만 ‘절창’은 정말로 판소리의 현재와 미래를 떠올리게 하는 무대인 것 같았다. 지금의 나 같은 초보 판소리 청자도 언젠가 귀명창이 되어 쟁쟁한 소리꾼의 목소리를 더 섬세히 감각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니 말이다.

안이호
이광복

세 번째 ‘절창’

지난 5월 6~7일에 열린 <절창Ⅲ>는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는 소리꾼 이광복과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이날치의 보컬이자 소리꾼인 안이호가 그 주인공이었다. 절창 시리즈에서 계속 시도되어 온 것처럼 이번 공연에서도 두 명의 소리꾼이 교대로 등장하며 매력적인 대목을 선보였다. 이광복은 ‘심청가’를, 안이호는 ‘수궁가’를 부르며 등장해 각자의 무대를 장악하는 방식이었다.
지금까지 절창 시리즈에서 두 소리꾼이 이야기와 무대를 이끌어가는 방식은 매번 달랐다. 먼저 <절창I>에서는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수궁가라는 공통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자의 무대를 선보였다. 이어진 <절창Ⅱ>에서는 민은경이 춘향가를, 이소연이 적벽가를 부르며 각자의 무대를 만들었지만, 어느 한순간엔 서로 다른 판소리의 한 대목을 ‘동시에’ 노래했다. 소리꾼이 나란히 앉아 서로 다른 이야기와 소리를 함께 하는 일은 무척 생경하면서도 한편으론 절묘했다.
돌이켜보면 심청가와 수궁가에는 모두 바다와 뭍을 오가는 존재가 있다.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바다로 뛰어들고, 바닷속 별주부는 용왕의 병을 낫게 해줄 토끼의 간을 찾기 위해 바다를 떠난다. 심청과 별주부, 어쩌면 그들은 바닷속에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었고, 언젠가는 서로 힘을 합쳐 뭍으로 나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이광복의 ‘심청가’와 안이호의 ‘수궁가’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했다.

뭍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뭍으로

뱃머리에서 출렁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이광복은 ‘심청 인당수 빠지는 대목’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카랑카랑하고 단단한 그의 소리에 관객은 곧장 추임새를 넣었고, 이어서 곧 빠른 장단과 여러 사운드가 더해지자 분위기는 한층 긴박해졌다. 애달프고도 절절한 이광복의 목소리에 고수 이준형과 타악 황민왕은 동해안별신굿장단을 접목하면서도 때때로 그에 맞춰 곡소리를 냈다.
이광복의 소리와 굿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를 함께 들으며, ‘심청가’와 ‘수궁가’는 뭍과 바다를 오가는 이야기이지만 생과 사를 오가는 이야기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심청에게 바다는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들어야 하는 곳인 한편, 용왕과 별주부에게 바다는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삶의 터전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뭍으로 나가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다. 바다와 땅, 생과 사. 무대는 서로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이 장소를 장면마다 바꿔 보여줬어야 했다.
한결 효과적으로 장소 전환을 상상하게 한 장치는 사운드였다. 앞선 절창 공연에서도 고수 외에도 여러 악기 연주자가 함께했지만, 전자음악가가 함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자음악은 다채로운 소리를 무대 위로 불러올 수 있기에 무대의 공기를 일순간 바꿔놓기도 했다. 조은희는 이야기의 흐름이 바뀔 때마다 그곳의 소리 풍경을 들려주며 무대를 특별한 음향적 장소로 만들었다. 때로 그 사운드와 무대 위의 빛, 소리꾼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질 때, 관객은 일순간 추임새를 멈추고 이야기의 세계에 깊이 몰입했다.
안이호가 이끌어간 수궁가 중 ‘약성가’는 자진모리장단과 전자음악이 한 몸이 되어 움직인 대목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사운드와 장단이 한데 맞물리는 것도 대단했지만 그 사이에 선 안이호의 존재감도 엄청났다. 장단과 비트가 동시에 쏟아지는 와중에 그는 묵직하면서도 여유 있는 목소리, 그리고 특유의 능청스러운 태도로 온갖 까다로운 말과 소리를 연신 유창하게 뻗어냈다. 장단과도, 비트와도 자연스레 호흡을 맞추는 그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넓은 영역을 오가며 활동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수궁가는 안전한 바다와 낯선 땅을 오가는 여정이다. 그렇게 폭넓은 세계를 두루 살피는 일은 안이호가 지나온 시간과도 아주 다르지 않은 듯했다.
무대와 이야기는 시시각각 변하지만, 소리꾼은 그 중심에 서서 계속해서 다른 기량을 선보이며 공연을 이끌었다. 별주부와 심청이 바닷속에서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대목에서는 그들의 능숙한 재담이, 별주부가 자신의 삶을 찾아 바다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는 안이호의 선명한 목소리와 마음을 움직이는 연기가 반짝였다. ‘심봉사 눈 뜨는 대목’에서는 다시 한번 이광복의 절절한 소리가 극장을 뒤흔들었다. 소리꾼의 다채로운 모습을 고루 보여주던 이 무대에서 소리꾼의 모습은 때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90분간의 <절창Ⅲ>은 소리꾼이 그들의 목소리 하나만으로 어떻게 수백 명의 관객을 쥐락펴락하는지를 똑똑히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 타악 황민왕·이준형
  • 전자음악 조은희

소리꾼의 길

연출가 이치민의 말처럼 <절창Ⅲ>의 주인공은 “두 명의 소리꾼과 그들이 들려주는 최고의 소리”였지만 동시에 이 공연은 이 소리꾼이 지닌 재능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공연을 보는 도중, 어떤 순간엔 아주 전통적인 판소리의 한 대목을 보고 듣는 것 같았고, 어느 때엔 창극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으며, 때로는 무대 언어가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음악극의 한 부분이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소리꾼은 이 모든 것을 자연스레 아우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소리꾼이 가다듬는 그 최고의 소리가 어떻게 더 깊어질지를 떠올리는 동시에 그들의 영역이 어떻게 더 넓어질지를 상상했다.
절창 시리즈는 이야기를 가다듬는 과정에서 지금 우리 시대의 관점을 담고, 원작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찾는다. 적벽가에서는 명분 없이 희생된 사람의 모습, 춘향가에서는 불평등한 요구와 그에 맞선 여성의 힘에 주목하는 식이다. 이번 <절창Ⅲ>에서 심청가와 수궁가의 주인공들은 타인을 위한 삶이 아닌,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하는 캐릭터가 돼 그들 자신의 길을 걸어나간다. 나는 그 이야기에서 소리꾼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삶 속에서 수많은 음악을 스스로 택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소리꾼의 모습을 보았다. ‘절창’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그들의 여정은 판소리의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를 떠올려보게 한다.

글. 신예슬 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음악학을 공부했고 동시대 음악과 소리에 관한 이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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