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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국립창극단 <베니스의 상인들>
낭만적 창극의 탄생

국립창극단 <베니스의 상인들>이 무대에 오른다. 셰익스피어 작 <베니스의 상인>에 현대적 감수성을 더해 각색한 작품이다. 16세기 베니스의 이야기를 현대의 관객이 이질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대제에 ‘들’을 붙여 각 인물의 무게를 더하고, ‘소상인연합과 대자본의 대립’, ‘여성의 주체성’을 더했다. 새로운 관계와 역할을 부여받은 고전 작품이 어떤 모습으로 현재와 관객을 마주할지, ‘캐릭터·미장센·의상·음악’으로 나누어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인물 소개

무대 위에는 서른두 명의 배우가 분한 쉰여섯 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여기에는 주인공 안토니오부터 돌고래와 인어 그리고 이름 모를 하인과 귀족까지 포함돼 있다. 베니스와 벨몬트라는 상반된 장소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의 대립과 우정 그리고 사랑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의 관계도를 살펴보자.

  • 샤일록 역 김준수
  • 안토니오 역 유태평양
  • 바사니오 역 김수인
  • 포샤 역 민은경
  • 네리사 역 조유아

미장센

무대는 이야기를 품은 하나의 작은 세상이다. 즉 활자로 적힌 서사에 실재감을 더하는 것은 단순히 관객의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극의 당위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과 같다. <베니스의 상인들> 무대 디자인은 지난 2021년 제31회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무대미술계의 거장, 이태섭이 맡았다. 수상 소감을 통해 54년간 뚝심 있게 무대를 지킨 소회를 전했던 그는 <심청가> <귀토> <리어> 등, 국립창극단과 협업하며 무대미학의 진수를 보여준 바 있다. 그런 그가 2막 13장에 달하는 상상 너머의 이야기를 열다섯 번의 무대전환, 실제와 환상을 오가는 오브제를 통해 구체화한다.

12미터 높이의 커다란 돛과 그 위에 걸터앉아 노래하는 안토니오의 모습. 공연은 안토니오 상인조합 무역선이 처음으로 출항하는 베니스에서 시작된다. 베니스는 물안개가 낀 듯한 회색 톤으로 만들어졌다. 수 척의 배가 무대 위를 부유하고,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로 6미터 길이의 범선은 극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예정이다. 바사니오가 곤돌라를 타고 이동하며 돌고래·상어·인어 등의 바다생물을 만나는 것은 환상의 섬 벨몬트로 가기 위한 일종의 관문과도 같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 베니스와 시간조차 멈춘 듯한 판타지의 섬 벨몬트는 각각 ‘현실과 꿈,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대립, 법·규칙·격식에 얽매인 무채색 사람들과 자유·사랑으로 포용하는 화사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으로 대비된다. 마치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듯한 인상이다. 야자수 열매가 열린 열대 휴양지 분위기의 벨몬트는 밝고 화려한 색감의 조명으로 따뜻하고 편안한 인상을 준다. 특히 포샤에게 구혼하는 이들의 시험 장면은 벨몬트섬의 꿈과 판타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3만여 송이 꽃이 공중에 부유하며 환상과도 같은 공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 제공. 무대디자이너 이태섭

무대의상

무대의상은 <심청가> <귀토> 등으로 호흡을 맞춘 바 있으며, 최근 방탄소년단BTS 한복 디자이너로도 잘 알려진 차이킴(김영진)이 맡았다. 극 중 공간이 베니스와 포샤의 저택이 있는 벨몬트로 극명하게 나뉘는 것에 따라 의상 역시 각 공간의 분위기에 맞췄다. 무대 위 쉰여섯 개 캐릭터가 저마다의 성격과 역할을 부여받았듯 의상 역시 인물과 그룹별 특징에 따라 디자인됐다.

먼저 베니스는 한국 전통의 재료와 질감을 활용하고 이탈리아 레이스와 자수를 더해 서구적 의상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16세기 베니스와 현대적 스타일의 차이킴 한복이 만난 셈이다. 베니스 상인의 자유로움과 화려함 그리고 시대를 앞서가는 의식 있는 실천자와 지식인들의 공정성을 의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안토니오의 경우 서양 복식의 패션을 동양의 라인으로, 바사니오의 의상은 학자들이 입었던 심의를 서양의 아우터로 해석했다. 남성 상인조합원의 의상은 톤 다운된 회색·갈색·올리브색 등을 사용했다. 여성 상인조합원의 의상은 공동으로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착용하고, 풍성한 소매와 화려한 꽃 패턴이 포인트가 되도록 했다.
대자본가 샤일록의 의상은 조선시대 무관의 웃옷인 직령을 아우터로 재해석했는데, 검은 바탕에 화려한 금색 패턴, 강렬한 붉은 동정이 특징이다. 샤일록의 직원은 직령을 한결 단순하게 디자인해 유니폼처럼 보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검은색 겉옷과 장갑, 화이트셔츠, 그리고 붉은 머릿수건과 포인트 장식을 활용해 통일감을 주었다.

포샤의 저택이 위치한 벨몬트는 다채로운 컬러와 활기가 넘치는 환상의 섬이다. 다양한 컬러로 화려함을 자랑하는 인도의 복식을 활용해 이국과 한국의 전통 복식이 공존하는 의상을 만들었다. 벨몬트섬이 지닌 평등과 자유, 그리고 밝은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포샤는 희망과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로 그를 상징하는 색은 노랑이다. 한국의 전통 소재인 오군자 갑사와 이탈리아 자수·레이스를 믹스 매치하고 퍼스 저고리와 인도의 주름바지, 철릭 원피스와 뷔스티에를 매치했다. 포샤의 비서로 찰떡 호흡을 보여줄 네리사는 철릭 튀튀 블라우스에 인도의 사리로 만들어진 옷을 입는다.

이미지 제공. 의상디자이너 차이킴(김영진)

음악

관객이 마주하는 무대와 그 안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는 저마다의 서사를 갖는다. 그들이 지닌 서사는 대사 혹은 내레이션으로 객석에 전해지기도 하지만 정제된 노랫말이나 대사 한 줄 없이 흐르는 음악만으로 관객에게 닿기도 한다. 2004년 이후 19년 만에 작곡가로 국립창극단과 함께한 원일과 작창가 한승석은 무려 62곡이라는 역대 최대 숫자의 작곡과 작창으로 음악적 풍성함을 더하며 관객과 마주했다.

한승석은 베니스와 벨몬트로 이원화된 작품 배경에 중심을 두고 작창했으며 각 인물이 지닌 서사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새롭게 작창한 수십 편의 작품 중에 ‘호랑이 이빨 같은 폭풍우’를 하이라이트 곡으로 꼽았다. 시칠리아로 향하던 무역선이 침몰하고 절망에 빠진 안토니오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부르는 노래로, 공동체가 흘린 땀과 눈물의 결실을 보겠다는 안토니오와 상인 조합원의 의지를 표현한 곡이다. 결의를 다지는 안토니오의 심정은 흘림장단에 담겼고 중중모리장단에 맞춰 부르는 남자 소리꾼의 합창이 이어져 안토니오와 상인 조합원 심중의 울림을 형상화했다. 비장하고 절박한 장면은 계면조로, 유장하고 호기로운 장면은 우조로, 화사하고 평화로운 장면은 평조로 작창하는 등 판소리의 장단과 선율을 충실하게 활용하고자 한 작창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전통 악조나 장단에서 벗어나야 하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땐 과감하게 판소리 외적인 음악 요소를 도입해 극적인 효과를 더했다. 이는 작곡가 원일의 영역에서 두드러진다.
작곡가는 샤일록과 포샤가 대립하는 장면을 가장 공들여 작곡했다. 샤일록 캐릭터가 가진 탐욕은 박자감을 살린 전자기타로 록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표현하고, 지혜와 사랑이 넘치는 포샤가 등장할 때는 스트링 악기와 전자악기를 사용해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특히, 극의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오프닝과 1막 끝 그리고 2막 끝의 바다로 나아가는 장면을 꼽았는데, 이때 연주되는 세 곡은 일종의 현대판 뱃노래다. 북과 같은 우리 타악기로 장단과 리듬감을 살리는 한편 마림바, 글로켄슈필 등의 유율타악기와 5대의 전자악기를 통해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보여준다. 전통의 요소를 올곧게 담되 그 외적 요소 또한 배제하지 않고 적절히 활용해 극적 효과를 더했다고 할 수 있다.

작곡가 원일은 “작품에 절대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작창이라면 작곡은 주제와 각 장면에 필요한 음악과 노래 그리고 테마곡을 창작하는 것”이라고 작창과 작곡에 대해 정의했다. 절대적 정체성과 주변적이지만 필수적인 작곡 영역을 맡은 두 음악가의 작업은 ‘캐릭터·미장센·의상’과 더해져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높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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