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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국립무용단 <넥스트 스텝Ⅲ>
낯선 춤에서 만난 한국무용의 미래
춤 좀 추던 조상님들께 이게 요즘의 한국무용이라고 소개하면 깜짝 놀랄
국립무용단의 <넥스트 스텝Ⅲ>을 위해 4월 8일 안무가 데이트부터 본공연(4월 20~22일)까지 함께했다.

한국무용에 구르기라니. 무술 시범을 하듯 날아다니는 것은 또 무엇이며 모처럼 지친 일상을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엄마들처럼 신나게 몸을 흔들기까지. <넥스트 스텝Ⅲ: 안무가 프로젝트>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관객이 보기에도 놀랄 노 자이긴 마찬가지였다. 자고로 한국무용이란 한복 곱게 차려입고 손에 부채 딱 들고 어허야 어깨를 덩실덩실하는 게 아니던가. 아니면 ‘한’의 정서를 한껏 발휘해 조지훈의 시 ‘승무’의 구절 ‘얇은 사 하이얀 고깔 고이 접어 나빌레라’처럼 추거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국무용이란 으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때 본 부채춤 때문일 터. 여자아이들이 단체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분홍색 부채를 들고 군무를 펼치던 모습이 학창 시절 경험한 한국무용의 전부였으니 한국무용이라면 당연히 그런 것이고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TV에서 보여주는 모습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국립무용단의 무대를 보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부채춤에 갇혀 살았을지 모르겠다. 조상님도 후손들도 놀라게 한 <넥스트 스텝>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을까.

최호종 안무 <야수들> 익숙함에서 탈출한 초현실적 한국무용

한국무용인데 어릴 때 태권도장에서 했던 것 같은 구르기로 신선한 충격을 준 주인공은 바로 최호종. 그가 만든 <야수들>은 한국인의 가족주의를 초현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는 소개가 붙어 있다. 예술 장르에 초현실적이라는 수식은 대개 ‘어렵다’의 또 다른 표현인데 실제로 <야수들>은 지난 3월 진행한 언론 공개회에서 잠깐 선보였을 때도 헝겊을 입에 무는 퍼포먼스로 만만치 않은 난이도를 자랑했다.
그런데 전체 완성본으로 감상한 <야수들>은 이 작품에는 초현실적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는 걸 깨닫게 했다. 옛날 게임에서나 들을 법한 배경음악은 네 명의 무용수를 현실의 인물이 아닌 게임 속 캐릭터처럼 다가오게 했다. 마임을 하듯 춤추고 흐느적거리다 무너지는 모습들은 뼈와 살로 이뤄진 구조를 바탕으로 동작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신체를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내면의 소리를 전달하려 한 ‘도깨비 언어’는 초현실의 결정체였다. ‘도깨비 언어’는 최호종이 지난 4월 관객과의 대화 당시 선보이기도 했다. 서로 못 알아듣는 말로 소통을 시도했는데 재치 있게 응한 관객 덕분에 의외로 소통이 잘 이뤄진 게 반전이었지만.
“언어를 제한하면 우리가 상대방의 뉘앙스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몸에서 다른 부분이 열리게 됩니다. ‘도깨비 언어’는 언어를 제한해 근육의 움직임이나 몸의 표현을 관찰하고 체험하기 위한 거였어요. 처음엔 무용수들과 아침마다 연습실에서 소리 지르며 훈련했는데 ‘도깨비 언어’에 익숙해진 후에는 오히려 자유롭고 재밌게 작업했습니다.”
최호종의 말처럼 <야수들>은 현실에서 익숙하게 통용되던 방식을 깨면서 한국무용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투명한 컨테이너 안에서 초현실적인 춤을 선보이던 무용수가 컨테이너가 걷히고 그 밖으로 나온 순간은 아직은 낯선 형태의 한국무용이 언젠가 관객과 가까워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박소영 안무 <라스트 댄스> 눈 마주치고 손 한번 잡아주는 일의 소중함

힘든 일이 있을 때 마주하는 시선은 큰 위로가 된다. 건강 잘 챙기라는 간단한 당부를 듣는 일이나 손 한번 잡아주는 일도 마찬가지다.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에게라면 더더욱 그렇다.
막춤 같아도 한국무용의 선이 곱게 녹아든 무용수의 흥겨운 춤 장면이 유쾌했던 <라스트 댄스>는 그런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 관한 작품이다. 무리와 따로 떨어진 한 사람은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 점점 서로에게 무관심해져 가는 세상이니 이 사람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싶지만 <라스트 댄스>를 만든 박소영은 그의 삶을 붙잡기로 한다. 실제 공황장애를 겪었다가 이겨낸 박소영이기에 그 위로의 무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다양한 감정을 춤으로 표현하는 동안 <라스트 댄스>는 절망에 빠진 한 사람을 향한 연대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한다. 작품의 분위기와 흐름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세상으로부터 소외됐고, 소외되려는 그를 작품에선 결코 그냥 죽게 두지 않는다. 그런 과정 끝에 살아갈 용기를 얻었을 것이기에 그 사람이 마지막에 다 같이 춤을 추는 장면이 더 감격스럽다.
작품의 핵심인 연대의 진정성은 <라스트 댄스>의 가장 큰 힘이다. 안무가 박소영은 소통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연습 첫날, 말없이 눈을 바라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눈을 보면서 선생님들(이번 작품에 참여한 무용수들)이 정말 많이 우셨고, 상대방의 삶과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됐다고 했다. 선생님들과 이 경험을 하면서 어떤 게 죽음 앞에 선 사람을 다시 삶으로 이끌어줄까에 대해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손 한번 잡아주고 안아주는 사소한 일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단원들이 직접 경험하고 담아냈기에 <라스트 댄스>는 마치 나에게 전하는 위로처럼 다가왔다.

정보경 안무 <메아리> 새처럼 날아오른 한국무용의 가능성

무용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화려한 군무는 금방 시선을 사로잡기 마련이다. 부채춤이 뇌리에 깊이 남는 것도, 정보경의 <메아리>가 인상 깊은 것도 그런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메아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모든 것이 언젠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울림을 준다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정보경은 관객과의 대화 당시 “살면서 느끼는 경험이나 감정이 일정한 시간이 지나 다시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게 메아리 같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라고 설명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던 감정이 어른이 돼가면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다시금 다가왔다고 말이다.
안무가는 어디론가 떠났다가 돌아오는 철새를 활용해 메아리를 표현했고, 무용수들은 철새가 됐다. 새에서 영감을 얻다 보니 일단 기본적으로 몸동작이 화려하다. 무술 시범에서나 볼법한 점프는 기본이고 무용수가 천장에 매달리기도 했다. 철학적인 깊이가 만만치 않은 작품이지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일단 시선을 끄는 동작에서 국립무용단원들의 역량을 느낄 수 있었다.
<메아리>는 한국무용은 대개 한의 정서가 담긴 절제의 미덕이 필수라고 여기던 ‘무알못(무용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깼다. 무용수는 감정을 아낀, 움츠러든 동작이 아니라 날아가는 새처럼 몸을 활짝 펼쳐 무대를 누볐고, 이들의 춤은 곧 한국무용의 가능성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것 같았다.

언젠가의 전통이 될 <넥스트 스텝>을 기대하며

한국무용을 만든 선조들을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면 절대적인 권위가 생기고 전통이라는 틀을 깨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그 역시 한국인으로서 당대의 정서와 문화를 담아 한국무용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오늘이라고 새로운 한국무용을 못 만들라는 법도 없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손인영 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은 지난해 “제가 한국 춤을 배울 때는 바꾸면 안 된다는 게 철칙이어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옛사람들도 즉흥성에 기반해 춤을 만들었을 테니, 선대로부터 받은 것을 토대로 우리도 새로운 걸 꽃피울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오늘의 무용수들이 만든 춤이 언젠가의 미래에는 전통이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상상하기 어려웠던 초현실이 점점 현실이 되고, 기존의 익숙하고 뻔한 방식은 점차 외면받는 시대다. 넥스트 스텝 시리즈는 한국무용의 춤 선을 바탕으로 기존의 틀을 깨고 오늘날의 방식으로 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한국무용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게 했다. 이렇게 자꾸 도전하다 보면 K팝과 방탄소년단처럼 전 세계 팬들이 열광할 한국무용과 무용 스타의 탄생으로 이어질 날이 오지 않을까.

4월 8일 국립극장 뜰아래연습장에서 진행된 ‘안무가 데이트’ (위부터) 최호종·박소영·정보경.
글. 류재민 서울신문 기자. 공연과 거리가 먼 인생이었다가 8개월째 공연을 담당하고 있다. 봐도봐도 아직 잘 모르겠어서 걱정하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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