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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국립창극단 <정년이>
옛 그릇에 새로운 것을 담아낼 때
웹툰에 창극이라니. 젊은 세대가 휴대전화 작은 화면으로 소비하는 최신의 엔터테인먼트를,
그들에게 여전히 낯선 우리 소리에 담아 무대를 통해 보여주겠다니. 그런데 그 일이 진짜 가능했다.
그것도 우아하게 균형 잡힌 스타일로, 관객의 환호를 받으며.

국립창극단의 창극 <정년이>는 새로운 것까지 담아내는 탄탄하고 유연한 옛 그릇으로서 창극의 저력이 만개한 또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격언은 적어도 창극에는 통하지 않는다. 스스로 정체성을 되물으며 변신을 거듭해 온 창극은 이제 탄력성과 장르적 포용성을 자신의 가장 유용한 무기로 장착하기 시작했다. 괄목할 만한 진화다.

극중 연구생 공연 <춘향>에서 이도령 역을 맡은 허영서(왕유정)

전통·파격·혁신의 삼박자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할 때 중요한 건 무엇보다 균형감각일 것이다. 너무 멀리 나가면 낯설어질 테지만, 너무 조심하면 맹탕이 될지 모른다. 그리스의 아폴론 신전에 있는 다리 셋 달린 ‘세발솥’은 조화와 균형을 상징한다. 면을 구성하려면 최소한 세 점이 있어야 하고, 세 발은 솥을 가장 안정적으로 지탱한다. 국립창극단의 <정년이>는 세발솥처럼 지혜롭다. 정년이의 세 발을 각각 전통·파격·혁신이라 불러보면 좋겠다.
먼저 전통. <정년이> 무대에서 가장 뜨거운 관객의 환호는 극 중 여성국극 공연 장면에서 쏟아진다. 국립창극단 배우는 이 장면에 각자 기량을 최대치로 발휘해 우리 소리의 진면목을 들려준다. ‘허영서’(왕윤정)가 ‘윤정년’(이소연·조유아)을 국극단에서 내쫓으려 방자 역할을 맡긴 뒤 시연을 하고 실제 연구생 공연 장면으로 이어지는 ‘춘향가’는 초반부 공연의 백미. 백제 석공 아사달의 이야기 ‘무영탑’ 오디션에서 정년이와 ‘박초록’(민은경)의 소리, 트이지 않는 목에 좌절했던 정년이가 어머니 ‘채공선’(김금미)에게 마침내 다시 여성국극 무대로 돌아갈 결심을 말할 때의 ‘추월만정’도 그렇다. 여성국극의 공간은 무대 위에 우리 소리의 뿌리를 단단히 내려 무게중심을 잡는 이 작품의 주춧돌과 같다.

극 중 채공선이 딸 정년(조유아)에게 ‘추월만정’을 가르치는 모습

트로트는 국극 바깥의 세계

두 번째, 파격은 국극 바깥의 세계를 표현할 때 도드라진다. 정년이가 분장에 쓸 분첩값이라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파스텔 다방은 의미 면에서 남성 중심 사회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공간. 동시에 음악적 형식 면에선 트로트에 기반한 낯선 박자와 음률을 공간의 힘으로 창극 무대에 녹여내는 역할을 한다. 다양한 리듬과 장르, 새로운 변형의 세계다. 남성 소리꾼들은 그동안 창극에서 접해 보지 못했던, 우리 소리에선 익숙지 않은 고음의 가성으로 ‘쌍화탕에 날계란 하나’ ‘미제 코오피 가루에 프리마 일대일’을 노래한다.
엄한 규율에 지친 정년이 스타가 돼 돈을 벌기 위해 찾아간 방송국 장면은 아예 대놓고 트로트다. “넌 여자 가수야, 여자 가수는 여리고 순수하고 요염하게!” 우리 전통 소리가 아닌 트로트의 가락과 분위기는 창극 무대 위에선 파격인 동시에 정년이 겪는 그 시대 ‘반쪽 인간’ 취급받던 여성들에게 씌워진 굴레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프레임이 된다.

극 중 정년이 아르바이트하는 파스텔 다방

뜨거운 얼음 혹은 불타는 물처럼

작창을 맡은 이자람 음악감독은 전통 소리와 창극뿐 아니라 연극과 인디밴드 음악까지 종횡무진 활약해 왔다. 그가 쌓아온 음악적 역량은 여성국극 장면에서 보여주는 우리 소리의 탄탄한 전통, 트로트로 특징지어지는 여성국극 바깥 세계의 파격을 지나, 현대적 편곡으로 인물 내면을 표현할 때 빛을 발한다. 창극의 표현력을 한 단계 끌어올린 혁신이라 할 만하다. 이것이 창극 <정년이>의 마지막 세 번째 ‘발’이다.
여성국극 <춘향전> 무대 뒤, 정년의 첫 번째이자 평생 팬이 된 권부용(김우정)이 정년과 하나 돼 소리할 때, 오지 않는 어머니를 찾다 가슴이 무너지는 영서의 소리는 이중창처럼 대구를 이룬다. 뜨거워지는 정년의 심장과 차갑게 식는 영서의 심장이, 따뜻해지고 떨리는 정년의 손끝과 떨리고 얼어붙는 영서의 손끝이, 영서의 저음과 정년의 고음에 실려 서양음악의 화음과 같은 효과를 내며 관객의 가슴을 향해 직진해 온다. 마치 ‘뜨거운 얼음’이나 ‘불타는 물’을 만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극 중 정년(이소연)과 영서(왕윤정)가 <춘향전> 공연 후 느낀 정반대의 감정을 노래하는 장면

인물 내면을 표현하는 현대적 편곡의 정점은 극의 후반부, 집안의 강권에 떠밀려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부용의 노래다. 젊은 소리꾼 김우정은 우리 소리의 정한情恨이 녹아 있으나 보통의 소리보다 훨씬 맑은 고음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심장이 말하는 대로 살아보자”라고 다짐하는 한 여성의 결단을 노래한다. 국악 현악기의 불협화음이 마치 신시사이저처럼 그 노래를 실어 나른다. 이 대목에서 “빗장을 풀고 날개를 펼쳐 저 문밖으로 저 문밖으로” 나서는 것은 김우정의 노래와 극 중 인물 권부용만이 아니다. 우리 창극이 성큼 한 걸음 더 표현의 영토를 넓히는 명장면이다. 혹여나 우리 소리를 훼방할까, 극 내내 절제하고 또 절제하던 악기는 다시 뭉친 매란국극단이 <자명고>를 공연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참아왔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쏟아붓는다. 남인우 연출과 이자람 감독을 비롯한 창작자는 관객에게 마지막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놀라운 페이스 조절 능력을 보여준다.

극 중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두고 성장을 향해 문밖으로 나가는 부용(김우정)의 모습

젊은 관객 견인한 여성 서사

국립창극단의 <정년이>는 원작 웹툰 ‘정년이’(글 서이레, 그림 나몬)가 긴 이야기에 담아냈던 여성 서사의 힘을 무대로 옮겨오면서도 잃지 않았다. 제작 발표 때부터 큰 기대를 받았으며, 여기에는 실제로 9회 공연 매진 뒤 3회 추가 공연을 결정할 때도 관객의 92%를 차지한 여성, 특히 68.1퍼센트에 달한 20~30대 여성 관객의 역할이 컸다. 창극 역시 왕자의 등장으로 시작해 ‘왕자 없는 시대의 왕자’를 노래하며 마침표를 찍었다. 긴 웹툰의 서사를 압축하며 덜어낸 부분은 있었으나 가부장적 질서에 고통받는 여성 예술가들의 굳건한 연대라는 주제의식은 충분히 담은 것으로 보인다. 젊은 여성 관객의 호응 역시 이 창극의 이야기가 가진 동시대적 울림의 결과일 것이다.

‘이단’에서 ‘전통’으로

어떤 전통은 첫발을 뗄 때 ‘일탈’이나 ‘이단’이라 불렸다. 이탈리아어 오페라만이 고매한 예술이던 시대, 독일어로 노래하고 대사를 주고받는 민속적 오페라 징슈필Singspiel은 서민들이나 보는 하급 장르로 여겨졌다. 고매한 이들은 끔찍한 혼종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결국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와 같은 새로운 클래식을 낳았다. 유랑극단 광대들이 마술과 곡예에 노래와 춤을 뒤섞었던 보드빌Vaudeville은 뮤지컬의 모태가 됐고, 스탠드업 코미디와 독자적 서커스로 분화했다.
지난 수년간 창극은 가장 뜨거운 연출가들이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는 신세계였다. 한태숙의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 이성열 연출·차범석 원작 <산불>, 김태형의 SF창극 <우주소리>가 있었다.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과 <아힘 프라이어의 수궁가>,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 <메디아>와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도 창극이 됐다.
창극 <정년이>는 한발 더 나아간 성취다. 우리 소리의 전통에 단단히 뿌리내릴 때,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담는 그릇으로 창극이라는 장르가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긴 이야기를 담느라 생겨난 잦은 무대 위 암전처럼 조금씩 불거진 매듭들은 공연을 거듭할수록 매끈해지리라 믿는다. 창극 <정년이>의 성취를 통해 창극은 더 적극적으로 표현의 영토를 확장해 나가게 될 것이다.

글. 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종교·미술·영화 등에 관해 썼고 공연을 담당하고 있다. 짧고 가벼운 것을 선호하는 시대여도 여전히 굵은 이야기의 힘을 믿고, 글이 관객과 극장을 이어주길 소망하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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