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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전인삼의 동편제 ‘춘향가’
송판 춘향가의 특별한 매력
전인삼이 나고 자란 남원은 명실공히 국악의 성지다.
그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인 1977년 11월 그의 집 근방에
운명적으로 남원국악원이 새롭게 단장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재주 많은 소년을 알아본 사람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노래깨나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노래든 세 번 정도 들으면 다 외울 정도로 타고난 음악적 재주를 지닌 전인삼은 늘 소리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아들을 광대로 만들 수 없다는 어머님의 뜻으로 꿈을 펼치기 어려웠다. 그러던 그에게 자신의 끼를 맘껏 발산할 기회가 생겼으니, 바로 <남원춘향제>의 가장행렬 때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그는 학교별 장기자랑 행사의 일환으로 월매 분장을 하고 가장행렬에 참여했다. 시중에 팔던 박초월의 LP 음반을 사서 ‘이별가’ 대목을 혼자 연습해 불렀는데, 이때 관객의 큰 환호를 받았다.
그때부터 운명이 달라졌다. 소년의 재주를 예사롭게 보지 않은 교장선생님이 발 벗고 나서 그가 소리를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도왔다. 소리 공부를 반대하시던 그의 어머니를 진심으로 설득해 재주 많은 소년이 근처 남원국악원의 강도근 명창1918~1996을 사사할 수 있도록 주선한 것이다. 그의 나이 17세 때였다.

남원 지키는 ‘송판 6대 명창’

처음 강도근 명창은 전인삼에게 소리를 딱 한 달 가르치더니 그만두라고 했다. 이걸 해서 목을 얻으려면 말할 수 없는 공력을 들여야 하는데 과연 네가 끝까지 그것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소리 공부하는 노력을 다른 데 쏟으면 판검사는 물론 장관도 할 수 있을 텐데 이 힘든 길을 갈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마냥 소리가 좋았던 전인삼은 하겠다는 다짐을 했고, 이후 20여 년간 일생의 스승 강도근 명창에게 동편제 소리를 전수받았다. 처음에는 부르기 쉽고 배우기 좋은 토막소리부터 시작해 ‘심청가’ ‘흥보가’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의 바탕소리를 하나씩 학습했다.
강도근 명창은 독공의 중요성을 상당히 강조했다. 그가 하동 쌍계사에서 10년 독공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는 전인삼에게도 이제 더 배울 것은 없으니 스스로 소리의 깊은 세계를 깨닫는 독공의 길을 어서 가라고 권했다. 독공만으로 성가成歌할 수 있으며, 동편제 소리는 목을 얻으면, 즉 성가하면 절로 잘할 수 있다고 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전인삼은 독공에 들어갔고 그렇게 소리를 수련해 1997년 마침내 제23회 전주대사습놀이 명창부 장원을 하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그토록 제자가 성가하길 바랐던 스승이 떠난 다음 해였다.
“네가 송판 6대다. 나 다음은 너다.”
강도근 명창은 막걸리를 한잔 먹고 나면 교복 입은 제자를 바라보며 이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송흥록-송우룡-송만갑-김정문-강도근’으로 이어지는 동편제 소리의 자부심, 그리고 이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어린 제자에게 강조하며 이 귀한 소리가 세상에 오래오래 남길 바랐다.
기실 강도근 명창은 고향 남원에 말뚝을 박고 부와 명예에 초연했던 사람이다. 판소리의 촌스러움을 완강하게 고집했고, 거칠거칠하면서도 투박한 소리를 가치 있게 이었다. 그의 소리에 대해 혹자는 땅을 파며 땀 흘린 농사꾼의 몸에서 저절로 일궈진 자연의 소리, 기교를 부리거나 재주를 더하지 않는 욕심 없는 소리라 말하기도 한다.
그가 추구한 판소리의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류와는 다른 방향에 있었다. 그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고, 남원을 지키며 이곳이 동편제의 발상지라는 사실에 상당한 긍지를 가졌다. 그래서 강도근은 전인삼이 남원을 지키길 바랐고, 동편제의 소리를 잘 이어주길 바랐다. 60대의 노명창이 어린 제자에게 전한 진심이 닿지 않을 리가 없다. 전인삼은 스승의 뜻에 따라 동편제의 명맥을 꿋꿋이 지키며 여전히 남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미 가득한 고제古制 소리의 매력

전인삼은 2005년 송순섭 명창에게 귀한 CD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1971년 이보형이 박봉술의 유고를 대비해 김명환의 자택에서 사비를 들여 녹음한 ‘춘향가’ 한바탕이었다. 그 무렵 전남대학교 자료실에서도 뜻밖의 자료가 발견됐다. 정병욱이 소장하고 있던 음원(1974년으로 녹음 시기 추정)을 백대웅이 복사해 기증한 박봉술제 ‘춘향가’였다.
스승의 타계 이후 일생 동편제 소리의 맥을 잇는 과업을 해오던 전인삼은 눈이 번쩍 뜨였다. 동편제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는 한바탕이 온전히 남아 있지만, ‘춘향가’와 ‘심청가’는 그러지 못해 마음 한편에 늘 아쉬움이 있었는데 스승 강도근이 생전에 그토록 치하하던 박봉술이 남긴 ‘춘향가’를 만난 것이다. 전인삼은 기쁜 마음으로 복원의 어려운 작업을 기꺼이 했다. 그리고 복원한 소리를 ‘사랑가’ ‘이별가’ ‘십장가’ 등 토막 형태로 발표하며 끊임없이 학계와 대중에게 알렸고, 2011년에는 마침내 완창했다.
동편제 ‘춘향가’는 오늘날 많이 불리고 있는 ‘춘향가’와는 다소 다르다. 특히 ‘춘향’의 캐릭터가 서민적이고 발랄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데, 광한루에서 춘향과 이도령이 직접 상봉하는 장면은 박봉술제에서만 볼 수 있다. 이별할 수밖에 없다는 이도령의 말에 자신의 머리를 뜯으며 포학하게 구는 춘향의 모습도 낯설긴 하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또한 이도령이 춘향의 어머니를 건넌방으로 가게 하려고 꾀배를 앓는 모습, 이도령 모친이 춘향 어미를 불러 돈 오백 냥을 주며 달래는 모습 등은 골계적이면서도 당대 계급사회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음악적 측면에서도 동편제 ‘춘향가’는 매력적이다. 전형적인 계면조와 달리 꺾은 음을 사용하는 추천목, 높은 소리로 질러내 호령을 하다가 차차 낮은 음으로 내려오는 가락의 호걸제, 밝고 경쾌한 음악적 분위기를 주는 경기민요의 어법을 판소리화한 경드름 등 고제 판소리의 면모를 잘 담아내고 있다. 동편제 ‘춘향가’는 그야말로 19세기의 날것 그대로의 옛 소리와 당대의 서민적 정서를 잘 보여주는 귀한 소리다.
전인삼은 “내가 대학 시절 박 선생님을 만났지만, 그때는 어려서 그 소리 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작업을 하면서 20년 만에 박 선생님을 다시 만난 듯하다. 한없이 깊은 박봉술 명창의 소리에서 새로운 눈과 귀가 열리는 경험을 했다.”라고 말한다. 2005년부터 동편제 ‘춘향가’를 널리 알리고자 노력한 것이 어느새 20년이 다 돼가고 있다. 이번 완창은 그간 꾸준히 갈고닦아 더욱 완숙하게 만든 동편제 ‘춘향가’ 전 바탕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무대가 아닐 수 없다.

※ 참고자료
이보형, 「박봉술 창본 춘향가 해제」, 『판소리연구』 4, 판소리학회, 1993.
「타계한 동편제 명창 강도근의 소리삶 땅 지키며 판소리 원형 일궈」, 『한겨레』, 1996.5.16.
송재익, 「박봉술 춘향가의 고제 특성에 관한 연구 – 주요 대목의 사설과 악조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

글. 송소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0세기 창극의 음반, 방송화 양상과 창극사적 의미」(2017)로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판소리와 창극 관련한 연구를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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