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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베니스의 상인들>
사랑의 공동체 도시
셰익스피어 작, <베니스의 상인>이 시대와 지리적 한계를 넘어
독점적 대자본에 대항하는 젊은 상인‘들’의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베니스 상인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요구하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살을 떼어가라는 포샤의 재판으로 널리 기억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국립창극단이 6월 8일부터 11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이 작품은 제목이 조금 다르다. <베니스의 상인들>. 베니스의 상인이 한 명이 아니라 복수형 접미사가 붙은 ‘상인들’이다. 제목이 바뀌었다는 것은 셰익스피어 원작 그대로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원작에 변형을 가하는 각색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각색했기에 <베니스의 상인>이 <베니스의 상인들>이 되었을까? 굳이 세계 연극사에서 가장 우뚝 선 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연하면서 이를 각색할 필요가 있을까?

이 작품을 각색한 희곡 작가 김은성과 연출가 이성열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창극화하기 위해, 단지 언어적이고 정서적인 변형만 고려하면 된다고 여기지 않았다. 16세기 말과 21세기 초를 가로지르는 400년이 넘는 시간이 요구하는 문화적 차이가 유독 이 작품 속에서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럽과 한국의 지리적 차이에서만 기인하지 않는다. 이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르는 단어, 차별을 인지하는 ‘감수성’ 역시 주요하게 작용한다. 감수성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창극이 동시대적인 장르로서 동시대 관객과 ‘함께’ 호흡하기 위한 바람이기도 하다. ‘복수형’으로서의 우리, 즉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그 시대에는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오늘의 기준에서는 합당하지 않은 인종차별적 요소를 적지 않게 품고 있다. 작중에서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멸시당하는 것이 그 예다. 아무리 시대를 뛰어넘는 작가 셰익스피어라 할지라도 그 역시 역사적으로 쌓인 서구 기독교 진영의 종교적·인종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이와 같은 문제 때문에 최근에는 잔인하고 교활한 악인 샤일록보다는 안토니오 등 베니스인의 차별 속에서 고통받는 이방인의 이야기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유대인에 대한 선입견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유대인이라는 설정 자체가 큰 의미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은 샤일록이 유대인이라는 설정 자체를 제거해 버렸다. 또한 샤일록을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라 베니스에서 거의 독점적 지위를 갖는 무역업자로 설정했다.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소상인들이 조합을 결성했는데 이들이 바로 ‘베니스의 상인들’이다. 이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악행이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처럼 독점적 대자본에 대항하는 젊은 상인들의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셰익스피어 원작은 여성에 대해 차별적인 인식과 감수성도 담고 있다. 비록 솔로몬 같은 지혜를 지닌 포샤가 재판을 통해 안토니오를 구하는 등 극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더라도 작품의 면면은 여전히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여인상이 지닌 한계 속에 갇혀 있다. 원작에서 포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구혼자들은 금·은·납으로 만들어진 상자 중에서 포샤의 초상화가 든 상자를 고르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에서는 그 시험이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라 어머니의 유언에 따른 것으로 설정됐다. 이는 극 진행에 변화를 주지 않는 지극히 사소한 변경이지만 남성 가부장의 권위에 따라 여성의 운명이 결정되도록 한 원작의 설정에 각색 작가가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3개의 상자 대신 7개의 상자가 주어지는 것 또한 창극 버전에서 달라진 점이다. 선택을 조금 더 다양하게 한 것은 이 시험의 난도를 높여 긴박감을 더 자아내기 위한 것이지만, 그중 납 상자가 아니라 진주 상자를 정답으로 설정한 것은 중요한 의도를 갖는 변형이다. 금과 은이 아닌 납 상자를 선택하게 하는 원작에서는 여인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면적 화려함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외면과 내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립시키면서 내면,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중요한 주제를 이룬다. 하지만 창극 각색본에서는 이와 같은 외관과 내면의 이원론적 대립을 강조하지 않는다. 남자는 그렇지 않은데 유독 여자는 왜 겉이 아니라 내면으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의 아름다움에 배어날 수는 없을까? 그렇기에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에서 바사니오는 진주 상자를 고르면서 이렇게 노래한다. “그대는 진주를 닮았네. 고상하면서 평범하고, 화려하면서 소박하지. 온화하면서 엣지 있어. 여리지만 강한 여자. 그대는 진주를 닮았어.”

청혼 시험을 보는 바사니오 무대스케치

바사니오가 옳은 상자를 고른 후, 이를 기뻐하는 포샤의 대사에서도 원작과 각색본은 의미 있는 차이를 보여준다. 원작에서 포샤는 자신의 정혼자 자격을 갖춘 바사니오를 주인으로 받아들인다. “바사니오님. 당신을 위해서라면 지금보다 백배나 훌륭한 여자가 되고 싶어요.… 당신은 제 주인, 제 지배자, 제 왕이십니다.” 하지만 창극 각색본에서 포샤는 사랑에 대해서 더욱 평등한 개념을 주장한다. 즉, 바사니오는 포샤의 주인이 아니라 ‘함께’ 사랑을 만들어가는 동반자이다. 각색자는 진주의 속성에도 ‘함께’라는 가치를 포함한다. 원작에서 납이 여인을 정의하는 것으로 한정된 데 반해 창극 버전에서의 진주는 포샤와 바사니오가 상처 속에서도 함께 키워나갈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의미한다. 바사니오의 선택을 기뻐하면서 창극 속의 포샤가 노래한다. “사랑한다면 들어라. 아픔을 함께 나눌 때 오래 함께 견딜 때 기쁨의 알곡을 맺지. 사랑의 진주를 얻지. 아픔을 함께 나누기 오래 함께 견디기. 그것이 사랑의 가치. 그것이 진주의 의미”.

안토니오를 변호하는 포샤 무대스케치

<베니스의 상인>은 마지막 재판 장면에서의 반전으로 잘 알려 있지만, 실상 코미디로서 이 작품의 진면목은 ‘사랑에 빠진 행복한 젊은이의 모습’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 <한여름 밤의 꿈>과 유사한 작품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독점자본과 상인 조합의 대립이라는 주제적 대립 구도가 이 작품을 지나치게 사회적 주제로서 읽히게 하는 것을 제작진은 경계한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젊은 두 커플이 환상의 시간을 겪는 ‘숲’처럼, 포샤가 사는 ‘벨몬트’는 사랑의 기쁨이 넘쳐나는 환상의 공간이며 결혼을 준비하는 축제의 공간이다. 환상의 공간에서 사랑의 행복으로 충만한 이들은, 다시 그 기쁨을 현실 세계인 베니스로 확장하고자 한다. 샤일록의 음모가 드러나고, 죽었다고 알려진 사람이 되돌아오자 베니스는 다시 기쁨으로 넘친다. 베니스는 우정을 위해 죽음의 고비를 넘긴 한 명의 상인 안토니오의 도시가 아니라, ‘함께’ 번영을 만들어가는 사랑의 공동체 도시이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김은성이 각색하고, 한승석이 작창했으며, 원일이 음악을 입히고, 김영진이 의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태섭이 무대를 맡고 이성열이 연출해 국립창극단원이 ‘함께’ 만든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은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의 벨몬트처럼 ‘아름다운 남산’ 속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환상의 공간으로 만들 준비가 돼 있다.

글. 조만수 충북대학교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연극평론가, 드라마투르기. <산불> <단테의 신곡> <오슬로> <갈매기> <서교동에서 죽다> 등 50여 편의 작품에서 드라마투르기를 담당했으며, 평론집 『무대 위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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