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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기획공연 연극 <틴에이지 딕>
그에게 장애는 전략이다
장애 전형성을 탈피하고 인간의 욕망과 이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의 환호와 박수가 작품의 진정성을 대변했고,
우리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확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실존적 세계로 돌진하는 거침없는 투쟁

6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인간 심리에 대한 탁월한 묘사를 통해 긴장감 있는 드라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질투·배신·야욕·불안·이기 등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쉽게 휩싸이는 다양한 형태의 욕망과 감정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셰익스피어의 극작술을 우리는 보편성이라 부르며 끊임없이 그의 작품을 소환한다. 특히 그의 작품 중 인간 내면과 심리에 가장 깊이 있게 천착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리처드 3세』다. 일명 ‘꼽추’라 불리는 척추측만에 절름발이기도 한 그의 기형적 신체는 인간과 사회를 향한 왜곡된 시선을 장착하게 하는 일종의 ‘악’의 표상으로,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번민하고 회의하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인물과는 달리 자신의 파멸마저 두려워 않고 거침없이 돌진해 나가는 비극성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리처드 3세』는 리처드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많은 부분 할애하고 있으면서도 그 연극적 리듬과 속도감은 결코 단조롭거나 더디지 않다.
극작가 마이크 루가 쓴 <틴에이지 딕>은 미국의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리처드 3세』의 현대적 번안으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욕망은 학생회장 당선의 욕망으로 치환되었고 무엇보다 리처드가 지닌 장애의 재현은 장애배우 캐스팅을 통해 장애를 가시화하는데, 공연은 장애를 전면에 내세운 캐릭터의 변용만으로도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방식으로 원작을 풀어낸다. 그것은 바로 리처드의 장애로 인한 결핍이 지독한 자기혐오와 왜곡된 내면의 상징이 아닌, 일상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투쟁해야 하는 삶의 실존적 조건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차별과 모욕과 조롱의 대상임과 동시에 특별한 관심과 배려의 대상이기도한 장애학생 리처드가 학생회장이 되고자 선택·결정·계획하는 일련의 상황은 그가 마주한 실존적 세계를 전경화하며 극을 강렬하게 추동해 나간다.

장애 전형성 극복과 장애 가시화 전략

<틴에이지 딕>은 장애를 전면화하지만 그간 매체가 장애를 전형화(stereotype)해 오던 일반적인 흐름에 당차게 저항한다. 선하지만 불쌍한 사회적 약자로서의 캐릭터,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하는 영웅적 캐릭터 대신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비속어를 남발하며 남을 속이거나 간교한 계략을 꾸미는 데 능통한 장애인 캐릭터를 구현함으로써 장애 전형성을 완벽하게 탈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리처드와 함께 그의 친구 벅을 반드시 장애인 배우로 캐스팅하라는 극작가의 당부는 그저 장애를 주제화하기 위한 조언이라기보다는, 리처드와 벅의 특수한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고 일상에 내재된 장애인을 향한 폭력적이고 불편한 말과 시선에 관객들을 감각적으로 노출시키기 위한 연극적 전략이기도 할 것이다.
학생회장이 되고자 하는 리처드의 모습은 장애 정체성에 기반한 특별한 의지가 아니라 권력을 얻으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다. 학교에서 제일 잘나가는 미식축구팀을 대표하는 쿼터백 에디는 그 인기를 토대로 학생회장까지 맡고 있는데, 사실 그는 학교 일에 전혀 관심도 없고 무능력한 인물임에도 우월한 외모로 얻은 인기를 앞세워 차기 회장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한다. 반면 누구보다 똑똑하고 영리하나 장애인을 향한 무시와 조롱에 늘 부딪히는 리처드는, 자신을 가장 폄하하던 에디에게 대항해 학생회장이 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의 계획이란 공연 초반 『군주론』을 다루는 수업 장면을 통해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군주가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권모술수나 악행도 마다하지 말아야 하고 결과가 모든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말한 마키아벨리 사상에 기반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장애는 더는 현실적 제약이 아닌 그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음모 전략이 된다.
리처드는 공공연히 에디를 지지한다고 밝힌 벅에게 장애인으로서의 동질감을 호소하고, 어리숙한 그를 이용해 또 다른 후보자 클라리사를 후보 등록에서 떨어뜨리는 데 성공한다. 교사로서 중립과 형평을 지켜야 하나 리처드에게 무한한 관용을 베푸는 엘리자베스도 리처드의 능수능란한 거짓말과 연기에 휘둘린다. 나아가 리처드가 앤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도 장애에 대한 편견과 연민의 감정을 심리적 지배의 기제로 영악하게 활용했기에 가능했다. 회장이 되기 위해 일말의 진심도 진정성도 완벽히 제거해 버린 리처드의 ‘진짜’ 모습은 오직 관객을 향한 대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원작에서 상당 부분 차용한 독백과 방백은 타인과의 소통을 차단해 버리고, 스스로 자기 (연극)세계에 고립되기를 자청한 리처드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데, 연극적이고 수사적인 대사는 리처드의 오만함과 영악함, 괴짜 같은 면모를 부각하는 일종의 유머처럼 작동하며 그의 연기와 음모를 강조하는 흥미로운 장치가 된다.
원작을 통해 알고 있듯, 리처드는 결국 권력을 쥐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파멸이 시작되는 지점일 뿐이다. 리처드는 자신의 장애를 유일하게 편견 없이 보아준 앤을 영악하게 이용해 희생시킨다. 그리고 오롯이 자신의 결정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분노와 광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에디를 향한 가장 악랄한 행위로 표출됨으로써 극에 달한다. 에디에게 “이젠 네가 다리병신이야.”라고 냉소적으로 대꾸하는 리처드. 증오하던 에디도 사랑하던 앤도 그리고 자신도 모두 파멸시키고야 마는 비극적 사건을 통해 장애에 대한 가장 지독한 편견과 혐오에 싸여 있던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음을 웅변하는 리처드의 강렬한 비극적 존재감이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 깊게 내려앉는다.

배리어프리 x 연극성

국립극장은 올해 ‘배리어프리’를 전면에 내세워 장르별 레퍼토리 공연을 기획했는데, 수어 통역·음성해설·자막·점자 프로그램 제작 등 민간 영역에서는 현실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배리어프리의 다양한 형태를 구축함으로써 그야말로 장애와 비장애 관객 모두를 아우르는 ‘무장애 공연’을 지향하고 있다.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든, 언제든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극장이 우리 공연예술계에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배리어프리’를 전면화한 공연 기획은 공공성의 가치를 우선하는 국립극장의 역할에 부합할 뿐 아니라, 동시대 한국 연극에서 국립극장의 위치와 정체성을 고민해 나갈 때 앞으로도 깊이 숙고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배리어프리의 다양한 접근만으로 <틴에이지 딕>의 의미를 축소할 수는 없다. 이 작품은 극작-연기-연출에서 ‘장애’를 다루고 재현하는 방식에서 깊은 연극적 사유와 타당성, 나아가 형식적 세련미를 보여준다. 하지성·조우리 두 배우의 연기는 단지 장애인 배우로서 받는 주목을 넘어 장애인 캐릭터로서 현존감을 강하게 드러냈고, 그렇기에 관객은 그들의 욕망이 가시화되는 연극적 상황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특히 앤이 리처드에게 춤을 가르쳐주는 장면에서 그의 장애 입은 신체가 더는 불편하고 저항적인 요소가 아닌, 오히려 춤에 이용될 수 있는 특별한 신체로 부각된다. 이러한 장애와 비장애의 신체적 차이를 지워내는 댄스파티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배우와 수어통역사가 짝패처럼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두 장애배우가 전동휠체어로 이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경사로 하나만을 설치한 빈 무대는 연극적 역동성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는데, 여기에 하이틴 스쿨 드라마에 어울리는 서사를 감각적으로 전달함과 동시에 자막으로 대사를 만화적이고 팝아트적인 영상 이미지로 처리한 연출 방식도 흥미로웠다. 판서하듯 손글씨체로 투사되는 대사들이 밑줄과 동그라미로 강조되는 장면은 경쾌한 이미지 생산을 넘어 창조적인 시각적 드라마투르기의 기능을 한다. 요컨대 이번 <틴에이지 딕>에서 무장애 공연을 위해 제공되는 서비스를 넘어 연극성으로 수렴되는 배리어프리의 지점은 공연 내용과 형식의 외연을 확장하는 흥미로운 연출적 콘셉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 남지수 연극평론가이자 드라마투르기. 연극을 통해 배운 것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 고민하며 쓰고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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