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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국립무용단 <홀춤Ⅲ: 홀춤과 겹춤>
전통춤 새롭게 써보기
상투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이상적인 무대를 목표에 둔 공연이 있다.
가치는 남기되 즐거움을 배가한 작품, 국립무용단의 ‘홀춤’ 시리즈다.

상투적 목표와 그 실현

2020년 초연된 ‘홀춤’이 세 번째 시즌을 맞았다. 다양한 우리 전통춤의 멋과 흥을 담아내 대중적 성공을 거둔 <향연> <새날>이 대형 군무 작품이라면, ‘홀춤’은 비슷한 기획이지만 소품 위주의 작품이라는 점, 동시대 시선으로 새롭게 안무·재구성되는 ‘신전통’ 레퍼토리 발굴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이 다르다. <홀춤>과 <홀춤Ⅱ>는 10분 내외의 솔로 작품을 소개하는 무대였다. 이번 <홀춤Ⅲ: 홀춤과 겹춤>에서는 솔로와 듀엣이 섞인 여섯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국립무용단원이 전통춤을 각자의 춤사위로 재해석해 안무하고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전통춤을 오래 수련했을 뿐 아니라 작품마다 ‘전통을 새롭게 쓰기’라는 모호한 주문에 춤으로 답해야 하는 당사자인 만큼, 춤사위 하나하나 깊이 있게 연구해 섬세하게 작품을 만들었다. 홀춤과 겹춤의 형식은 관객을 춤꾼의 몸과 움직임에 보다 더 집중하게 함으로써 전통 춤사위의 정수를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대형 군무의 스펙터클이나 주역 무용수의 스타성에 열광하는 것을 넘어 춤과 춤꾼의 매력을 제대로 톺아보고 싶은 관객이라면, 상당히 만족스러운 공연이었을 것이다.
전통예술 공연에서 “전통을 동시대의 시선으로 재해석하겠다”라는 말은 상투적이라 느껴질 만큼 자주 쓰이지만, 사실 그 목표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다. 전통의 틀과 모양을 그대로 지키면 고루하다는 말을 듣기 쉽고, 재해석이 과하면 근본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품격과 가치는 남기되 지금의 관객에게 감동과 재미를 줄 수 있도록 창의성의 적정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창작자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가능한 한 여러 창조 방식을 열어놓고 예술적 실험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전통의 규범을 조금 변형해 보는 것부터 토대가 되는 원리만 남겨놓고 모두 새로 만들어보는 차원까지, 시도의 범위는 매우 넓을 수 있다. <홀춤Ⅲ: 홀춤과 겹춤>은 그런 노력의 몇 가지 방향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전통춤은 이미 완성돼 견고하게 닫힌 세계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른 창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열린 세계로 시도됐다.

고민을 형상화한 여섯 작품

김회정의 ‘단심丹心_둘’은 구음검무를 바탕으로 삼은 겹춤 작품이다. 구음검무는 서울교방 김경란 선생이 교방무인 진주검무를 민속적으로 변형한 작품으로, 김수악 선생의 구음 장단에 맞춰 춘다. 구음검무가 진주검무를 재해석한 것이라면 ‘단심_둘’은 구음검무를 다시 재해석했으니, 하나의 전통춤이 어떻게 시간을 통과해 가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무대였다. 구음검무 역시 진주검무처럼 좌우 대칭적 플로어 패턴을 지키는 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2인무에서 보여줄 수 있는 비대칭적인 구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구음에 여러 악기를 곁들여 풍성한 음악적 색채를 만들어낸 것도 인상적이었다. 작품 제목인 ‘단심’이란, 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뜻한다. 흥취를 돋우면서도 단정하고 부드러운 호흡, 꼼꼼하고 야무지게 맺는 손끝과 디딤새가 그런 정성 어린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김회정 안무 ‘단심_둘’

김은이의 홀춤 ‘바라거리’는 불교 작법 중 하나인 바라춤에서 소재를 얻긴 했지만, 춤사위의 범위는 의식무와 민속무 전반을 아우른다. 안무자가 오랜 시간 전통춤, 그리고 이를 근간으로 한 창작춤을 경험하며 종합해 낸 핵심적 춤사위가 작품의 기승전결을 따라 설득력 있게 배치됐다. 엄청난 연구와 연습량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바라를 치고 돌리는 동작뿐 아니라 바라의 끈을 잡고 빙빙 돌거나, 바닥에 끌고 다니고, 바라 위에 위태롭게 올라서는 장면은 우리 삶을 비유한다. 하나의 삶 속에서 여러 에너지가 만나고 순환하는 과정은, 바라 소리가 만들어내는 진동, 바라를 머리 앞뒤에서 돌리는 형태, 바라를 돌리거나 끌 때 공감각되는 무게로 그려졌다. 바라의 둥근 모양과 함께 계속 둥글게 이어지는 안무 구도는 음과 양, 삶과 죽음 같은 개념이 순환적으로 연결돼 우리 전통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듯했다.

김은이 안무 ‘바라거리’

황태인의 겹춤 ‘산수놀음’은 한량무에서 풍류를 즐기는 선비 콘셉트를 가져왔다. 기존의 여러 한량무 레퍼토리를 변형하기보다는 안무가의 창작에 더 비중을 둔 작품이다. 황태인은 ‘홀춤’ 시리즈의 최연소 안무가인 만큼 요즘의 젊은 춤꾼이 추구하는 춤 스타일과 테크닉을 작품에 담아냈다. 현대무용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역동적이고 유연하게 이어지는 동작이 특징적이다. 여유롭게 자연 속을 노니는 한량의 태평한 걸음걸이와 혈기 왕성한 청년의 크고 활달한 춤사위가 번갈아 나오면서 청춘의 싱그러움을 그려냈다.

황태인 안무 ‘산수놀음’

정소연의 ‘다시살춤’은 살풀이에 소고를 결합한 홀춤이다. 모방을 바탕에 둔 전통춤의 재해석보다는 안무가 개인의 스타일과 창조성이 크게 발휘됐다. 이 작품은 인간의 고통을 다룬다. 소고를 몸에 댄 채 거칠게 내려치는 장면은, 주어진 고통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고단하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와 맞물려 살풀이천을 느리고 무겁게 움직이는 모습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와 살아가고자 하는 묵묵한 의지가 삶을 지속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삶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긍정, 다소 심오하고 어려운 주제이지만, 관객은 춤꾼의 감정 표현을 따라가면서 그 내용에 몰입하고 공감했을 것이다.

정소연 안무 ‘다시살춤’

박기환과 박지은이 공동 안무하고 출연한 ‘월하정인’은 신윤복의 동명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태평무’와 ‘사랑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차분하고 우아한 춤사위로 원숙한 남녀의 애틋한 정을 그려냈다. 춤 동작보다는 달밤의 아름다운 분위기를 시적으로 그려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산수놀음’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드라마가 있는 작품인데, 두 작품에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짧은 장면이 조금 더 들어갔어도 좋았을 것 같다. 춤꾼이 연기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박기환 박지은 공동안무 ‘월하정인’

정관영이 안무하고 엄은진과 함께 추는 ‘너설풀이’는 웃다리농악의 칠채와 짝쇠 부분을 다양한 동작과 구도로 재해석한 혼성 2인무다. 짝쇠는 휘모리장단에서 두 사람이 연주를 주고받는 형태다. 남성과 여성이 짝쇠를 치는 것이 다소 낯선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는, 두 춤꾼의 힘이 동등한 데 있는 것 같다. 매력과 기량이 탁월한 두 춤꾼이 함께 만들어내는 밝은 에너지가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따뜻하게 만들었다. 이들의 신명 나는 춤으로 무대가 꽉 찼고, 관객 모두 장단에 맞춰 박수를 치며 공연의 마지막을 즐겼다.

정광영 안무 ‘너설풀이’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었다. 안무가마다 재해석의 방향과 정도는 달랐지만, 전통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일까 고민하고 형상화하려 애쓴 것이 모든 작품에서 느껴졌다. 무엇보다 다들 춤을 맛깔나게 잘 춰서 좋았다. 색깔과 호흡이 모두 다른 작품을 적절히 배치해 공연의 완급을 조절한 점도 좋았다. 다만 조명과 영상의 연출은 아쉬웠다. 몇몇 작품에서 아찔한 색감으로 직사각형 구획을 비추는 조명은 춤과 어울리지 않았다. 분할된 화면을 채운 미니멀한 영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전통춤이 삶의 모호성이나 신비로움, 혹은 경계가 불분명한 세계, 음과 양이 서로를 감싸 안고 휘감아 도는 순환의 세계를 은유한다고 보기에 정확하고 차갑게 똑떨어지는 시각적 이미지는 이런 모호성의 춤을 감싸 안지 못한다고 느껴졌다.

글. 허유미 안무가이자 춤 전문 기고가.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에는 『춤추는 세계』, 『춤의 재미, 춤의 어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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