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

국립극장 남산 이전 50주년 기념①
한국 공연예술의 산증인
국립극장은 한 국가의 문화예술 표상이자 국민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50년 4월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국립극장을 개관했지만
전쟁과 독재 등 현대사의 숱한 굴곡 속에 쉽지 않은 길을 걸어야 했다.

혼란한 시대 속 국립극장의 태동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의 혼란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등을 생각할 때 국립극장 개관은 기적에 가까웠다. 당시 연극계를 중심으로 펼쳐진 국립극장 설립 운동이 신정부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극장을 새로 지을 여유는 없었던 만큼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립극장인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본관)을 사용했다. 그리고 산하에 국립극단의 전신인 ‘신극’과 ‘극협’의 두 극단을 뒀다. 개막작으로 초대 극장장 유치진이 쓴 <원술랑>1이 무대에 올라 큰 반향을 일으킨 이후 국극사의 <만리장성>, 현제명이 작곡한 한국 최초 창작 오페라 <춘향>, 한국 최초 민간 발레단인 서울발레단의 <인어공주> 등이 뒤를 이었다.

1. 1950년 4월 30일부터 5월 6일까지 국립극장 개관 기념으로 <원술랑>(유치진 작, 허석 연출)이 공연됐다.

하지만 개관 58일 만에 6·25전쟁이 터지면서 국립극장은 대구문화회관(옛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1957년 서울로 돌아온 후 명동 시공관(옛 명치좌)을 사용하게 됐지만 이마저 서울시와 함께 써야 했다.2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영화관으로 지은 시공관은 당시 가장 좋은 공연 환경이라곤 했지만 변변한 연습실조차 없었다. 공공극장에 대한 정부의 이해 부족, 적은 예산, 공무원으로 된 조직 구성 속에서 명동 국립극장이 제 역할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개관 초기엔 서울 귀환 이후 새롭게 전속단체가 된 신협과 민극을 동원해 간간이 공연을 올리는 것 외에 나머지 기간은 민간의 상업 공연에 주로 대관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국립극장을 매도하며 무용론까지 제기하기도 했다.
다행히 5·16 군사정부 시절 첫 민간인 출신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예술에 대한 애착이 컸던 오재경 장관(1961~1962 재임)이 산하기관인 국립극장의 운영 개선에 큰 역할을 했다. 국립극장은 내부 시설의 대폭 개수와 함께 전속단체 창단, 부대사업 활성화, 연극의 5개년 발전계획 등 쇄신 방안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1962년 전속극단 운영 규정이 공포되면서 신극과 민극을 통합해 국립극단이 재발족하는 한편 국립오페라단·국립무용단·국립국극단(창극단)이 새롭게 창단했다. 당시 극장장은 여전히 공무원이 맡았지만 예술가들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국립극장의 변화를 이끌도록 했다. 1962년 4월 현대적인 드라마센터가 개관한 것이 국립극장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자극제가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문화공보부 장관이 국립극장 육성에 박차를 가했지만 막상 국고 지원이 여전히 적었다는 것이다. 1962년 국립극장 재개관 예술제를 열자마자 연간 예산이 거의 바닥났을 정도다. 또 예산의 뒷받침 없이 전속단체를 먼저 만들다 보니 단원들에게 월급을 주기도 어려웠다. 또다른 문제로는 야심 찬 국립극장 재개관 페스티벌에도 불구하고 관객 동원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립극장이 대중의 마음에 다가서는 작품을 기획하지 못한 탓이다.이런 상황에서 국립극장 재개관 이후 2년간 극장장이 5차례나 교체되고 예산이 대폭 삭감되고 말았다. 이에 예술계는 국립극장 운영 정상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지만 변화는 없었다.

2. 1957년 6월 1일. 국립극장이 환도하면서 명동 시공간을 서울시와 함께 사용했다.

남산 시대의 개막

국립극장을 애물단지 취급하던 정부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덕분이다. 남북한 이념대립이 치열하던 당시 평양에 만수대예술극장 같은 대형 문화시설의 존재가 알려지며 한국에도 그에 상응하는 극장의 필요성이 대두한 것이다. 이즈음 국립극장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던 정부는 1967년 대형 복합문화시설을 짓는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 계획’을 추진하게 됐다.3
종합민족문화센터는 국립극장만이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 국립도서관 등 10개 안팎의 문화시설을 모두 포함한 것이지만 입지와 예산 등의 문제로 남산에 국립극장과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만 짓게 됐다. 정부는 남산 국립극장 건설을 앞두고 KBS로부터 교향악단을 인수해 국립교향악단을 창단하는 등 조직 개편과 함께 전속단원을 보강했다. 국립극장 설립 20주년이던 1970년 기준으로 전속단원은 극단 15명, 국극단 13명, 오페라단 13명, 무용단 51명, 교향악단 90명 등 5개 단체 총 182명이나 됐다. 당시 예산이 부족한 상황에서 인건비로 대부분 지출되다 보니 공연 사업비는 전속 예술단의 연평균 공연 횟수가 5회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적었다.
예상보다 공사 기간이 길어졌지만 국립극장은 1973년 8월 역사적 이전을 했다.4 앞서 부민관, 대구 키네마극장, 시공관을 거쳐 광복 28년 만에, 그리고 설립 23년 만에 우리 손으로 지은 국립극장을 갖게 된 것이다. 건축가 이희태(1925~1981)가 설계한 국립극장은 대극장(1500석)과 소극장(400석) 외에 행정시설, 작업실, 연습실을 갖췄다. 외관은 미국 뉴욕링컨센터의 에이버리 피셔홀과 한국 경회루를 참고했으며, 대극장 내부는 가부키 극장인 일본 국립극장을 모델로 만들었다. 한국에서 무대 제작소까지 갖춘 유일한 제작극장인 국립극장은 명동 시절과 비교할 때 규모와 시설 면에서도 좋아졌다. 특히 다양한 장르의 공연과 연출을 가능하도록 만든 오케스트라 피트와 대형 회전무대, 승강무대는 대표적이다. 하지만 권위적으로 보이는 외관은 둘째치고 폐쇄적인 접근성과 함께 왜색의 영향을 받은 무대 등 불편한 내부 구조가 비판을 받았다.

3. 1967년 4월 25일. 장충공원에서 종합민족문화센터 기공식이 열렸고, 국립극장 신축은 1966년에 발효된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 계획의 일부였다.
4. 1973년 8월. 착공 6년만에 국립극장이 남산으로 이전해 완공됐다.

그럼에도 1973년 10월 허규가 연출한 연극 <성웅 이순신>5을 시작으로 전속단체의 개관 기념 공연이 연말까지 이어졌다. 제3대(1962~1963), 제10대(1967)에 이어 제14대(1970~1976) 국립극장 극장장이 된 김창구 극장장은 대규모 극장 공간에 맞춰 조직을 개편, 전속단체로 국립합창단을 창단하는 한편 예그린예술단을 국립가무단으로 개칭하고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을 분리했다. 이에 따라 국립극장은 8개 전속단체, 478명 단원, 120명 직원(임시직 포함하면 181명)으로 규모가 확대됐다.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국립극장의 규모는 너무 컸다. 하지만 김창구 극장장은 제대로 된 공연장이 없는 한국 공연계에서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공연예술 전반을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전통예술을 적극적으로 전승하고 활성화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실제로 국립극장은 개관 이후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주목받았으며 전속 예술단의 지방 및 해외 공연을 추진해 좋은 평가를 얻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립극장은 공연의 주요 관객층인 젊은이들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교통이 불편한 데다 유신시대였던 터라 목적극 성향의 공연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이후 국립가무단이 서울시립가무단으로 가는 등 국립극장은 위축됐다. 또 10·26사태와 신군부의 등장 등 정치적으로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또 다른 전속단체 국립교향악단은 한국방송공사(KBS)로 이관됐다.

5. 1973년 국립극장 남산 이전 개관 기념 공연, <성웅 이순신>.

침체된 국립극장에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킨 것은 연출가 출신으로 1981~1989년 활약한 허규 극장장이다.6 국립극장 초기의 유치진, 서항석에 이어 세 번째로 민간 전문가 출신 극장장이 된 그는 레퍼토리 선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전속단체장의 임기제를 도입하는 등 개혁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단원들의 무사안일주의를 일소하고 기량을 높이기 위해 도입한 오디션제는 극심한 진통을 겪기도 했다.
허규 극장장은 적은 예산 내에서 극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제작비가 많이 드는 대극장 공연을 축소하는 대신 실험무대와 야외 놀이마당 개설, 전통예술 강화, 전속 예술단의 지방 공연, 청소년 대상 공연 감상회와 연수 프로그램 활성화 등에 나섰다. 마침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7이 다가오며 국가적 문화행사를 맡은 국립극장은 좀 더 다양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1990년대는 한국 공연계에서 예술경영이 도입되는 시기로 국립극장도 서구 공연장처럼 장기 계획을 세우고 창작 레퍼토리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화부 출신 공무원이 잇따라 극장장으로 왔지만, 이들도 나름대로 발전책을 강구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적은 예산과 관 주도 운영 방식으로는 성과를 내기 어려웠다. 그래도 6개 전속단체 가운데 국립발레단이 김혜식-최태지 단장 아래 철저한 오디션을 통한 단원 등급제, 후원회 발족, ‘해설이 있는 발레’를 통한 관객 개발 등으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다만 국립극장은 이즈음 예술의전당에 한국 공연계를 대표하는 극장 타이틀을 내줘야 했다. 1988년 음악당에 이어 1993년 오페라하우스를 완공한 예술의전당은 해외 유명 단체의 초청공연과 다양한 기획공연으로 한국 공연계의 트렌드를 선도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에 이어 1998년 2월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문화산업을 문화정책의 근간으로 삼은 뒤 국립 문화예술기관 개혁에 나섰다. 1999년 서울시 직영 세종문화회관이 시범적으로 재단법인으로 독립했다. 이어 정부는 국립극장도 세종문화회관처럼 재단법인으로 독립시킬 계획이었지만 예술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극장장에게 행정의 자율성을 부여하되 성과에 책임을 부과하는 책임운영기관으로 만든다는 방침을 굳힌다. 책임운영기관화는 국립극장의 역사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게 된다.

6. 1981년부터 1989년까지 국립극장장 직을 맡은 허규
7. 국립극장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축하하는 문화예술축전이 열렸다. 총 80여 개 국에서 3만여 명의 예술인이 참가했다.
글. 장지영 국민일보 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월간 국립극장> 구독신청 <월간 국립극장> 과월호 보기
닫기

월간지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 구독 신청

뉴스레터 구독은 홈페이지 회원 가입 시 신청 가능하며, 다양한 국립극장 소식을 함께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또는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편리하게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회원가입 시 이메일 수신 동의 필요 (기존회원인 경우 회원정보수정 > 고객서비스 > 메일링 수신 동의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