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하나

국립극장의 변천: 미학적 관점을 중심으로 ①

국립극장은 1950년 4월 29일 옛 경성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자리)에서 처음으로 개관했다. 광복 이후 줄기차게 이루어져 오던 국립극장 설립 운동이 결실을 본 것이다. 이와 함께 국립극단이 창설됐고, 여기서 첫 무대에 오른 작품은 초대 극장장인 유치진의 ‘원술랑’이었다. 그러나 개관한 지 두 달도 안 돼 6·25전쟁이 발발하고, 부민관은 폭격으로 파괴됐다. 그래서 전쟁 중에 대구문화회관으로 장소를 옮겨 피난살이를 하다가, 1957년 서울 명동의 시공관(市公館)으로 장소를 옮기게 된다. 광복 전까지 메이지좌(明治座)로 사용된 극장 건물이었다.

1960년대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문화계는 새로운 전용 극장의 건립을 계속 요구했고, 이것이 군사정권의 문화정책에 반영됐다. 국립극장의 신축이 처음 언급된 때는 1965년 1월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공보부(公報部)를 초도순시(初度巡視)하면서였다. 이때 공보부가 민족문화센터 건립을 건의했고 이것을 대통령이 받아들여 1966년 1월에 연두교서를 통해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을 천명했다. 그리고 대통령령으로 건립추진위원회 설립을 규정, 공포되었다. 당시 계획은 전용 시설을 갖지 못하고 이전을 거듭하던 국립극장을 민족문화센터 내에 수용하는 것이었다. 특히 국악을 상설 공연해 이곳을 전통음악의 중심지로 키우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새로운 국립극장의 설계는 이희태가 담당했다. 그는 개발 시대 국립경주박물관, 부산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등 주요 문화시설을 설계한 건축가이고, 국립극장 건립추진위원회의 하부조직인 실무소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건축가에게 제시된 프로그램은 1,500석 규모의 대극장, 500석 규모의 소극장, 행정시설, 그리고 무대장치에 필요한 작업실이었다. 이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계획되어 극장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도록 요구받았다. 부지가 정해진 이후 일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1966년부터 1년 동안 이희태가 설계했고, 1967년에 착공해 1973년에 완공했다. 개관 기념 연극은 ‘성웅 이순신’으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관했다. 건립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건물은 당시 군사정권의 문화정책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건립 의도는 설계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민족, 근대화, 발전, 전통과 같은 거대 담론이 어떤 방식으로든 건축 설계에 반영돼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희태는 그 나름대로 발전시켜 오던 전통적인 조형언어를 이 건물에 적용했고, 이는 건축의 질을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후 여러 차례의 리모델링이 이루어졌지만 이런 특징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건물 배치와 기념성

국립극장은 장충단공원을 끼고 남산 쪽으로 올라오면 산 중턱 못 미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김수근의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이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어서 개발이 한창이던 시대상을 매우 장중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곳이 국립극장 부지로 결정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서울 도심에는 그만한 규모의 건물을 지을 공간이 없었다. 또 남산은 도심과 비교적 가까웠고, 환경도 매우 쾌적해 정책결정자들에게는 지금의 위치가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화를 생산해 내는 주체들은 이런 결정이 상당히 불만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란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서 슬픔과 즐거움을 공유할 때 자연스럽게 생산되는 것이고, 이 때문에 새로운 국립극장이 도심에 건립되기를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국립극장의 위치는 처음부터 문화에 대한 권위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결정됐으며 지금까지도 그런 문제들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실정이다. 이렇게 조성된 상당히 넓은 대지에 건축가는 여러 건물을 배치해야만 했고, 이때 여러 기능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희태가 쓴 간단한 글 외에는 추론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자료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나타난 배치를 두고 판단해 볼 때, 건축가에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미학적 기준은 기념성(monumentality)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기념성의 문제는 건축의 본질 가운데 하나로 오래전부터 다루어져 온 주제였다. 태초에 인간들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를 구분하고자 했고, 이 때문에 자신들의 정서와 가치관, 문화적 전통, 그리고 기념할 만한 사건을 상징하는 기념비를 세워 그 장소의 특이성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도시 속에 건축물을 통해 기념성을 부여하는 방식이 나라마다 달랐고 광복 이후 서구적인 기념성의 개념이 한국에 이식되면서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일찍부터 시민사회와 도시국가가 발전한 서구 사회는 기념비적인 건물이 시민들의 집단적 삶을 표상하고 각 도시의 정체성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세워졌다. 현재도 남아 있는 수많은 도시 광장과 그것에 부속되어 있는 대규모 공공건물에서 그런 사실은 잘 나타난다. 이 경우 건물의 기념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수법이 존재했다. 먼저 배치 수법에서 기존의 도시 조직 속에 파묻혀 있는 수많은 보통의 건물들과는 차별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건물의 규모를 월등히 키우거나 축을 바꾸어서 기존의 도시 체계와는 다른 위계를 갖도록 하고, 주요 가로의 초점에 위치해 그 존재가 뚜렷이 부각되도록 했다. 또한 사람들이 그 건물을 배경으로 모일 수 있도록 전면에 커다란 광장을 마련했다.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도시의 공통 관심사를 나누거나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기념비적 건물은 일반 시민들을 위해서 지어졌다기보다는 대부분 지배계급의 권위를 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궁궐, 성곽 등의 건립을 위해 많은 인력과 시간이 동원됐으나 이 건물들이 대중을 위해 일상적으로 이용된 적은 없었다. 근대 이전까지 서울에서 공개 광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이 점은 잘 입증된다. 일반 사람들은 주로 장터 등과 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이용해 의사소통을 하고 이벤트를 조직했지만 그것이 기념적 건물의 건립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이희태는 서구적 관점에서 기념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건물 배치에 반영했다. 그렇지만 건물이 들어설 대지가 매우 넓었고 건물의 기능이 복잡했기 때문에 건물을 처음 배치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사람들의 진입 방향과 전면 파사드의 관계, 대극장(해오름극장)과 소극장(달오름극장)의 관계가 우선적으로 결정되어야 했다. 건물의 주요 파사드 위치는 남산의 경사와는 상관없이 순전히 진입 축과 광장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장충단공원을 거쳐 남산순환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국립극장으로 분기되는 진입로가 나오는데, 이때까지 사람들은 국립극장의 존재를 전혀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진입로를 들어서는 순간 대극장의 전면 광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광장에서 바라보면, 매우 단순한 형태로 된 대극장의 전면 파사드는 건물로 접근하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시선을 압도하는 것이다. 건물의 기념성을 확보하기 위해 건축가는 소극장과 기타 부속시설들을 대극장 후면으로 후퇴시켜서 대극장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지각되지 않도록 했다. 특히 대극장의 우측에 있는 소극장의 존재는 대극장 전면에서 보았을 때 시야에서 완전히 가려진다.

이런 배치는 건축가가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희태는 세종문화회관처럼 대극장과 소극장을 전면에 나란히 두는 것이 건물의 기념성을 감소시킨다고 판단했다. 또한 멀리서 볼 경우 건물 전면에서 높이 솟아 있는 무대 부분도 마찬가지로 전면에서는 지각되지 않도록 했다. 이처럼 건축가는 접근 과정에서 기념비적인 열주들로 구성된 대극장의 전면만을 부각하는 것이 기념성을 확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현재와 같은 배치와 전면 파사드를 구상한 것이다.

국립극장 전면 국립극장 전면(2000)ⓒ정인하
대극장의 형태 구성

국립극장은 기념성의 요구로 인해 처음부터 전통적인 건축 형태와 결합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건축가도 이런 상황을 잘 인식하고 국립극장을 위해 전통적인 모티프를 계속해서 빌려 오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희태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도 근대화됨에 따라 많은 현대건축들이 지어지고 있으나, 본인은 건축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 국립극장의 준공과 함께 한국의 현대건축을 우리의 것으로 토착화해야겠다는 강한 집념으로 이 국립극장의 설계에 임해 왔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는가? 먼저 국립극장의 외부 형태는 건물을 감싸고 있는 열주들과 로지아(loggia)*로 특징 지어진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뉴욕의 애버리 피셔 홀(Avery Fisher Hall)을 연상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인 목조건물 특히 그 가운데 이희태가 가장 좋아한 경복궁 경회루의 목구조 체계를 연상시킨다. *로지아(loggia): 이탈리아 건축에서 한쪽 벽이 없이 트인 방이나 홀을 이르는 말.

이희태에게는 국립극장이 최초의 대규모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국립극장과 문화시설을 두루 돌아보면서 생각을 가다듬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뉴욕의 링컨센터를 눈여겨본 것으로 보이고, 실제 설계 과정에서 이것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맨해튼 중심부에 위치한 링컨센터는 1960년대 도시계획가이자 행정가인 로버트 모제스(Robert Moses)의 계획 아래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총 6개의 건물을 6명의 건축가가 설계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들 건물 가운데 국립극장과 가장 유사한 건물은 맥스 에이브러모비츠(Max Abramovitz)가 설계한 애버리 피셔 홀이다. 이 건물과 맞은편에 있는 필립 존슨(Philip Johnson)이 설계한 링컨센터 극장(Lincoln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도 국립극장과 유사해 보이지만 기둥과 벽체를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 애버리 피셔 홀은 광장을 중심으로 북동쪽 모서리에 위치한 것으로, 주로 음악을 연주하는 곳이다. 이 건물은 국립극장처럼 트레버틴으로 된 높은 열주들로 4면이 구성되어 있다. 전체 규모는 국립극장보다 커서 2,700석을 수용한다. 외부 열주들은 평면상 ‘+’자형 단면으로 분절되어 있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끝이 가늘어진다. 그리고 이런 열주들로 된 아케이드의 2층 부분에는 로지아가 걸쳐 있어서 단조로운 입면을 분할하고 있다. 이런 외관 때문에 이 건물은 유럽의 고전건축처럼 매우 장중한 느낌을 주며, 따라서 이희태로서는 국립극장의 이미지와 잘 부합된다고 본 것이다.

뉴욕 링컨센터의 애버리 피셔 홀ⓒAjay Suresh 뉴욕 링컨센터의 애버리 피셔 홀ⓒAjay Suresh

이들 각각의 건물들을 비교하면서 이희태의 조형 의지를 탐구해 보자. 먼저 국립극장의 전면 대극장 부분은 여러 가지 점에서 애버리 피셔 홀과 유사하다. 건물 전면과 측면이 모두 열주로 구성되어 있고, 똑같이 2층 부분에 로지아가 가로질러 가고 있다. 건물의 벽체는 열주 뒤로 후퇴되어 있으며 전체 입면이 유리로 투명하게 처리된 점도 유사해 보인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기단부와 지붕의 처리에 있다. 국립극장에서는 기단부에 진입 계단을 설치해 이곳을 통해 광장에서 로비로 직접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비해 애버리 피셔 홀은 일단 1층으로 들어가서 그곳의 내부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접근하도록 했다. 이희태가 국립극장에 이 같은 계단을 설치한 것은 건물의 기념성을 좀 더 부각하기 위한 의도라고 여겨진다. 또한 이 두 건물 사이의 차이점은 지붕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애버리 피셔 홀은 얇은 수평 테두리와 매우 완만한 곡선으로 된 보가 기둥과 결합되어 건물의 상부 틀을 형성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 요소로 인식될 만큼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약화된 형태로 나타나서 열주들이 갖는 수직적 상승감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국립극장의 경우 지붕의 수평면이 기둥의 수직성을 압도한다. 그것은 지붕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전통건축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국립극장의 지붕 두께는 2.5m로 다소 두껍고 모서리 부분은 날카롭게 각이 져 있다. 그리고 매끈한 수평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둥 간격에 맞춰 일정한 요철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지붕 형태를 직설적으로 모방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갖는 형태적 이미지를 간접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애버리 피셔 홀과 국립극장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차이점은 구조 체계에 있다. 국립극장의 경우 외부에 나타나는 기둥들은 내부의 구조 체계와는 별개로 설치되었다. 그 기둥들은 건물 본체로부터 돌출한 캔틸레버(cantilever)*의 지붕을 지지하는 역할만을 담당해 구조적으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절두산 순교성지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기둥은 장식적 의미가 강하다. 지붕의 조형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둥 사이에 보도 설치하지 않은 무량판 구조가 사용됐고, 기둥 상부에 나 있는 원형판이 보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에 비해 애버리 피셔 홀의 외부 기둥들은 내부 구조 체계를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구조적으로 일관된 것이다. 기둥의 형태에서도 차이가 존재한다. 국립극장을 설계하면서 건축가는 원래 직경 40cm로 된 원형 기둥을 5m마다 배치했다. 이런 기둥의 크기와 간격은 이희태가 가장 즐겨 쓰는 방식이다. 그러나 실제 그런 크기로 시공되었을 때 건물의 높이가 너무 높아 기둥이 너무 세장하게 보였고, 그래서 건물 형태가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느낌을 주었다. 형식미를 중시하는 건축가에게 기둥의 비례가 맞지 않는 점은 참을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이희태는 대극장의 원형 기둥에 장식적 요소를 덧붙인다. 아랫부분에서 윗부분으로 올라가면서 그 폭이 넓어지는 장식들이 기둥 주위로 네 방향에 매달리고, 그것은 평면적으로 십자 형태를 가진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인 부분들이 매우 어색해 보이고, 이로 인해 건물의 명료성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노출 콘크리트를 정으로 깬 원형 기둥과는 달리 장식 부분은 모르타르로 마감돼 있어서 재료의 물성이 완전히 달라 보인다. 이렇게 새로 추가된 부분들은 구조적이기보다는 장식적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이희태가 이런 장식적 모티프를 창안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경복궁 경회루의 비슷한 장식이 큰 영향을 미쳤다. 거기서도 2층의 사각기둥 주위에 장식들이 덧붙여져 있다. *캔틸레버(cantilever): 한쪽 끝은 고정되고 다른 끝은 받쳐지지 아니한 상태로 있는 보

이희태가 국립극장을 설계하면서 애버리 피셔 홀 외에도 경복궁에 소재한 경회루도 주요 모델로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경회루는 오래전부터 이희태에 의해 전통건축을 대변하는 건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 건물은 경복궁의 후원에 위치하면서 주로 연회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상시적으로 사람이 머무는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건물 내부 공간이 벽체에 의해 닫혀 있지 않고 주위를 향해 열려 있다. 이 건물에서 이희태가 눈여겨본 것은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있는 목구조 체계와 바닥을 지지하는 필로티들이었다. 특히 건물 바닥이 필로티 위에 올라 있는데 그것이 이희태에게는 기념성을 부여할 수 있는 모티프로 인식됐다. 전체적으로 건물은 매우 높은 지붕에도 불구하고 매우 안정된 비례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각 기둥은 그런 비례 체계 속에서 각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희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나는 우리의 전통을 국립극장 건축양식에 표현하는데, 외형적인 모방이나 확대가 아닌 어디까지나 내재적인 전통의 표현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지금의 극장 형태를 제안하였고, 이것으로써 우리 고유의 전통미를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즉 전통적인 기주(基柱), 주랑(柱廊)의 아름다움의 현대화가 바로 그런 것의 하나이다.”

경회루의 모습ⓒYoonj 경회루의 모습ⓒYoonj
글. 정인하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출처.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학술대회 자료집

*해당 원고는 2021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재개관 기념 학술대회 ‘국립극장 그 여정과 미래’ 자료집에 실린 글을 재게재한 것으로, 필자의 의도는 ‘월간 국립극장’의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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