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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흥보展(전)’ 리뷰
미디어아트에 실려 친근하게 다가온 창극
리뷰 쓰기를 전제로 공연을 관람할 때에는 으레 펜을 잡고 임한다. 깜깜한 객석에서 팸플릿의 여백 많은 페이지를 펼쳐놓고 연신 무언가를 메모하기 위해서다. 가끔 잘 적고 있는지 희미한 빛에 기대어 확인하곤 하지만 이번 ‘흥보展(전)’을 관람하면서는 그럴 틈이 거의 없었다. 눈을 떼면 무언가를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창극을 넘어 전시를 표방한 이번 작품 관람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지점이었다. 음악을 음미하는 것만도 간단한 일이 아닌데 그 이상을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개막을 기다렸다
새로운 틀에 넣어 달라진 창극
‘흥보傳(전)’ 공연 사진

허규의 원작을 계승한바 이야기의 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박 속에서 나오는 것이 민중의 염원이라는 핵심 가치는 유지하되, 그 가운데에서 ‘누구나의 욕망’이라는 표현과 함께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요소들을 드러내려 했다. 선악의 대립 구도나 권선징악의 엄숙함을 넘어 가볍고 솔직하게 ‘흥보傳(전)’을 다시 풀어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주안점이 설정됐다. 하나는 현대 관객에게 감각적으로 어필할 만한 무대장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고전의 파격을 추구하는 것으로, 전시와도 같은 창극이라는 기조가 여기에서 비롯됐다. 다른 하나는 제비여왕이 주도하는 서사의 흐름을 통해 환상적 세계관의 경계를 확장한 것이다. 그간 무던하게 받아들인 고전 속의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이 욕망의 보상 체계로 선명하게 구체화됐다.

원전의 골격을 지키되 직관적이고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내기 때문에,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판소리와 창극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도 가볍게 즐길 수 있을 정도랄까. 오히려 기존의 통상적인 창극 양식에 적응된 애호가일수록 다소 어렵거나 낯설게 느꼈을 수 있겠다. 그만큼 눈과 귀를 새로이 기울여야 할 무대장치들이 작품 안에 가득하다. 그러나 창극이란 모름지기 어떠해야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털어내고 볼 때, 이 작품은 다양한 부류의 관객들이 저마다의 감성으로 수용하고 해석할 수 있을 만한 역동성을 시종 잃지 않았다. 제비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공간이 설정되고 그 안에서 또한 새로운 음악과 무용이 펼쳐졌으니, 그 새로움 자체가 주는 만족감이 컸다. 그것은 어쩌면 창극이 계속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으면 하는 애호가들의 바람이 일정하게 충족됐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 창극이 이렇게 무겁지 않은 현대적 화사함을 보여줄 수 있구나 하는 반가움이기도 한 것이다.

눈이 즐거운 음악극
‘흥보傳(전)’ 공연 사진

작품의 기획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면 순전히 필자의 안목이 부족한 탓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많은 전문가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거대한 전시이기 때문에 각 요소에 관한 설명을 충분히 듣지 않으면 작품 전반의 지향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해석과 판단을 관객에게 맡긴다는 시노그래퍼 최정화의 제안을 참고하면, 애초에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관람하는 것이 이 작품을 만나는 가장 적절한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시작부터 스펙터클하게 밀려오는 새로운 요소들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제비나라라는 환상적 공간, 그 안에 흐르는 이국적 느낌의 청량한 음악, 그 위에 펼쳐지는 가볍고 경쾌한 춤, 그 뒤에 큼직한 두 개의 LED 패널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시원한 영상, 무대 곳곳에 배치된 세련된 소품들까지 더해져 시대 배경을 가늠할 수 없는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언뜻 산만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복잡한 조합이 낯설거나 어색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미디어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현대인에게 미디어아트 중심의 공간 연출은 가장 익숙한 접근 방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요소를 하나만 꼽으라면, 장면마다 다양한 영상을 그려내는 두 장의 거대한 LED 패널이다. 일반적인 무대 세트가 일정한 시간 동안 고정될 수밖에 없는 점을 극복할 뿐 아니라 쉼 없이 변화하면서 그 자체로도 하나의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다. 배우들이 소리와 연기로 친절하게 서사를 풀어주었다면, 이 영상은 그것을 상징적 형상으로 표현해 해석과 상상의 폭을 한층 넓혀주었다. 그런데 눈이 한껏 재미를 느끼는 동안 판소리가 잘 들리지 않은 것은 창극 본연의 속성을 감안할 때 일정한 한계로 남는다. LED 패널을 활용한 배경 처리 중 가장 황홀한 느낌을 준 ‘제비노정기’ 대목조차 이제 와 떠올리면 그 소리가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국립창극단 소리꾼들의 공력을 따질 문제는 아니며, 새롭고 역동적인 무대가 판소리를 삼켜버린 듯도 했다는 것이다. 판소리까지도 이 거대한 전시에서 하나의 오브제로 작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다른 관객들의 느낌이 궁금하다.

젊은 감성의 코드
‘흥보傳(전)’ 공연 사진

이 작품에는 극 중 인물이 휴대폰으로 영상을 촬영하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이른바 흥보제비인 흰고깔제비와 놀보제비인 검은고깔제비가 각기 부러진 다리를 치료받은 후에 촬영한다. 그러나 상황이 비슷할 뿐 두 행위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흰고깔제비는 흥보의 선행을 인증(認證)하기 위해 촬영했고, 검은고깔제비의 놀보의 악행을 채증(採證)하기 위해 촬영했다. 언제 어디서나 영상 찍기를 즐기고 또한 그것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현대인의 일상을 자연스럽고 유쾌하게 반영한 연출이다. 그런데 이처럼 어떤 것은 즐거운 인증샷이 되고 어떤 것은 심각한 증거 영상이 되는, 복잡하고 묘한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형제의 박이 영글어가는 과정을 표현한 영상도 매우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려졌다. 많은 낱말이 모여 워드 클라우드(word cloud)를 이루고, 그것이 마침내 속이 꽉 찬 박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흥보의 박에는 사랑·화목·행복·합격 등의 키워드가 들어갔고, 놀보의 박에는 증오·부동산·비트코인·명품 등이 들어갔다. 형제가 각기 지닌 욕망이 극명하게 다름을 보여주는 이 연출은 ‘누구나 가진 욕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겠다는 작품의 주제 지향을 가장 직관적으로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키워드 자체도 고전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인이 공감하기 쉬운 것들이다.

욕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예는 더 있다. 박에서 온갖 비단이 나오자 흥보와 흥보처는 각각 흑공단과 송화색 비단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싶다고 말하며, 이것은 원전 그대로다. 그런데 자식들에게 갖고 싶은 것을 묻자 아이들은 하나씩 명품 브랜드의 이름을 외친다. 뜬금없는 말장난으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 그저 욕망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것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아이들도 듣고 보는 것이 있다는 당연한 이치에 충실한 설정일 뿐이다. 돈이 끝없이 나오는 궤 대신 등장한 머니건(money gun)을 쏘며 흥보가 한껏 젠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놀보가 제비마녀들에게 둘러싸여 돈을 마구 쓸 때, 그리고 놀보 조상의 상전이 나타나 놀보의 돈을 갈취해 상여에 주렁주렁 매달 때, 매우 반짝이는 황금빛 돈 꾸러미가 눈 어지러울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남녀노소는 물론 선악의 판단 기준과도 무관하게 모두가 마치 힙합 뮤지션처럼 ‘머니 스웩(money swag)’을 자연스럽게 즐긴다.

치밀함에 소홀했던 캐릭터 설정
‘흥보傳(전)’ 공연 사진

새롭고 현대적인 요소들을 통해 재탄생한 창극의 스타일이 대중성 측면에서 마음에 들었던 반면, 그렇지 않은 점들은 주로 대본을 고친 데에서 발견됐다. 특히 치밀하지 않은 캐릭터 설정 문제와 제비여왕의 지나친 개입을 되짚어볼 만하다.

놀보는 흥보를 집에서 쫓아낼 때 “서른일곱이나 처먹은 놈이 늙어가는 형한테 빌붙어서 하루 종일 빈둥대며 그러고 살 거냐? 부모님 살았을 제 너와 나를 차별하여 기르던 일을 너도 잘 알 것이다. 네 놈은 영리하고 착하다고 힘든 일은 안 시키고 주야로 글만 읽혀 과거 급제 바라시며 온갖 뒷바라지 다 하셨는데 네 놈이 아홉 번 낙방 끝에 집안 살림 거덜 내니 낙담하고 한탄하다 병들어 돌아가시지 않았느냐. 자식들은 돼지 새끼마냥 줄줄이 낳아놓고 언제까지 형 덕만 보고 살 것이냐”라고 말한다.

그러자 흥보는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해 그저 놀보에게 매달릴 뿐인데, 흥보처가 끼어들어 “정 우리를 내보내시겠다면 집도 반으로 나누고, 전답도 반씩 가르고, 살림도 반씩 나누어주십시오”라 응수한다. 그러나 놀보처가 “이봐, 동서. 어디서 그런 뻔뻔스러운 말을 하나? 둘째 아들 과거에 목맨 시부모 집안 살림 거덜 나자 병들어 돌아가시고 친정서 해준 패물 팔아 겨우 살림 장만해, 친정서 꾸어온 돈으로 논, 전답 사들였다 값 오르면 다시 팔고 겨우 불린 재산인데 그걸 나눠 달라고? 그런 말 또 하게 되면 살인사건 날 것이니 잔말 말고 썩 나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흥보처의 그 당당함이 참으로 무색해진다.

놀보 부부의 언술에 매정하고 거친 면이 있기는 하나 대체로 합당한 이야기인 반면, 흥보 부부의 태도는 안일하고 염치없다. 네 사람의 이 같은 캐릭터 설정은 아마도 모든 인물이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 것으로 그리려 한 데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놀보 부부에게 자수성가형의 현대적 이미지를 입히려다 보니 상대적으로 흥보 부부는 천덕꾸러기가 됐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나머지 서사는 기존의 것과 다르지 않으니, 달라진 캐릭터 설정이 어떤 새로운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결국 권선징악이라는 대전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할 것이었다면 굳이 캐릭터 설정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을까?

마당쇠의 행동도 뜬금없는 면이 작지 않다. 인기 있는 소리꾼이자 창극 배우인 유태평양은 무대 위에서 한껏 재능을 뽐냈지만, 그가 연기한 마당쇠란 캐릭터는 서사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했다. 많은 관객에게 이미 익숙한 이야기일지라도 인물의 대사와 연기는 적절한 맥락이나 근거 위에서 펼쳐져야 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놀보에게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드러내며, 극 초반의 중요한 대목인 형제의 대화로 가야 할 관객의 시선을 자꾸 빼앗는다. 작품 안에서 전후 사정이 미처 설명되지도 않았는데 마당쇠는 처음부터 놀보를 악당으로 몰아가는 액션을 취한다. 이른바 ‘방자형 인물’에 해당하는 마당쇠 캐릭터의 자유분방한 풍자성을 처음부터 부각하려고 한 듯한데, 오히려 산만한 장면이 많았다.

끝으로, 마치 재판처럼 진행되는 마지막 대목에서 제비여왕은 “내가 박씨를 만들어 그대들에게 베푼 재산은 알고 보면 환상의 세계에서 꿈처럼 이루어진 불로소득이라. 그대들이 가진 재산을 못 가진 자, 약한 자들에게 베풀어줄 생각은 없는가?”라며 훈계조로 마무리하려 한다. 그러자 흥보는 이미 절반을 내놓기로 가족이 합의했다고 한다. 이에 놀보는 육할, 다시 흥보가 칠할, 또다시 놀보가 팔할을 외치며 서로 많이 환원하겠다고 경쟁하자 마침내 제비여왕이 육할로 확정한다. 제비여왕의 말이 부당하지는 않다. 또한 이 작품의 서사를 주도한 존재로서 응당 그렇게 기대할 법하다. 그러나 굳이 본인이 직접 결론짓듯 말해야 했을까?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인지하도록 유도하는 다른 방식, 혹은 형제를 통해 자발적으로 구현되게끔 할 방식은 없었을까? 남녀노소 관객을 향한 교훈적 메시지일 수 있겠구나 하며 이해하고도 싶지만, 예술 작품이 던지려는 메시지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제시된 점은 못내 아쉽다.

글. 이태화 일제강점기의 판소리 문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요즘은 전통예술의 재발견과 변질 사이를 조심스럽게 걱정하며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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