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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예술단 ‘이른 봄 늦은 겨울’ 프리뷰
은은한 향과 여백으로 기억되는 무대

매화·난초·국화·대나무. 이 네 가지 꽃과 나무는 예로부터 문인과 선비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이자 시조와 그림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골 주제였다. 고결한 인품과 덕을 지닌 군자에 비유해 ‘사군자’라 불리는 이들 매난국죽 중에서도 가장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바로 ‘매화’인데, 이는 매화가 가장 먼저 피는 꽃인 데다 매화의 기상을 으뜸으로 생각한 옛사람들의 사랑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벚꽃처럼 흐드러진 화사함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모란처럼 탐스러운 꽃송이를 뽐내는 것도 아니고, 개나리나 진달래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친근함을 내세우지도 않지만, 찬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운 꽃과 맑은 향을 피워내는 매화의 자태는 그 자체로 드높은 기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칭송받았으며 특히 문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서울예술단과 국립극장이 함께 준비한 무대 ‘이른 봄 늦은 겨울’ 또한 바로 이러한 매화를 주제로 엮어낸 가무극이다. 제목부터 매화가 피는 시기를 은유하는 이 작품은 매화를 모티프로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매화라는 꽃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매화에 얽힌 이야기와 설화, 매화와 연결된 사람들의 풍경을 그리면서 매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삶의 순간들을 담아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일관된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매화라는 모티프가 다양하게 변주되는 옴니버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속에서 과거와 현대를 넘나들고 현실과 이야기를 가로지르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지워진 아득한 세상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이름과 설화, 인물로 보는 매화
‘이른 봄 늦은 겨울’ 공연 사진

‘이른 봄 늦은 겨울’에는 매화를 일컫는 이름이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추위가 가시기 전 눈과 얼음 속에 핀다 하여 부른 설중매, 다채로운 색깔로 봄을 알리는 백매·녹매·묵매·홍매, 곧게 뻗은 직지매, 옆으로 뻗은 와룡매, 버들처럼 늘어진 와룡매, 일찍 피는 조매에 이르기까지, 매화를 이르는 갖가지 이름이 등장하는 덕분에, 공연을 보다 보면 매화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색과 면모를 지닌 꽃임을 새삼 느낄 수 있다. 극 중 ‘매화타령’ 장면에서는 매월당 김시습과 매죽헌 성삼문, 퇴계 이황이 아끼던 도산매, 부안 기생 매창과 의적 일지매, 춘향전의 월매에 이르기까지 이름과 호에 매화꽃을 피워낸 수많은 인물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매화와 인간 사이에 이어진 유구한 인연을 흥겨운 장단 속에 펼쳐낸다.

또한 공연 중에는 매화에 얽힌 고사(古事)와 에피소드도 여럿 소개된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한 무대 위에서 구분 없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수나라 조사웅이 나부산 매화나무 아래서 꾼 꿈과 눈보라 속에 길 잃은 등산대원의 이야기가 중첩되고, 연인을 잃은 뒤 휘파람새가 되어 매화나무에 앉아 우는 고려 도공의 설화와 세상을 떠난 영감이 아끼던 매화나무를 들고 다니는 늙은 여인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고사와 설화, 그리고 과거와 동시대의 이야기가 포개지면서 이 작품은 시대와 공간은 다를지라도 매화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가 다르지 않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시각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달과 항아리, 그리고 매화의 이미지다. 예로부터 둥그스름하게 꽉 차오른 항아리와 달은 자주 동일시되는 소재였으며, 여기에 운치를 더하는 매화가 종종 곁들여지곤 했다. 수화 김환기 화백의 그림에서도 달과 항아리, 매화는 늘 쌍을 이루며 함께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이른 봄 늦은 겨울’의 무대를 비추는 달빛 조명 아래 항아리를 든 무용수들의 우아한 움직임은 그 자체로 한밤중에 환하게 피어난 매화처럼 고혹적인 이미지를 선사한다.

여백과 격조가 느껴지는 무대
‘이른 봄 늦은 겨울’ 공연 사진

‘이른 봄 늦은 겨울’의 대본을 쓴 배삼식 작가는 무대 위에 여백의 미, 여백의 순간을 빚어내는 작가다. ‘주공행장’ ‘열하일기만보’ ‘하얀앵두’ 등의 전작들과 최근작 ‘화전가’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꽉 짜인 구조가 만들어내는 극적인 긴장감보다는 느긋하면서도 아득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여백과 사유의 순간을 선사하곤 한다. ‘이른 봄 늦은 겨울’ 또한 그러한 작가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드라마틱한 스토리나 갈등이 사라진 무대에서 작가는 매화를 통해 바라보는 삶과 인간의 다채로운 모습을 통해 슬픔과 기쁨, 그리움의 정서를 은은하고 품격 있게 담아낸다.

한편 ‘가무극’인 ‘이른 봄 늦은 겨울’의 주된 언어는 춤과 동작, 그리고 움직임으로 이것들은 대사만큼이나, 때로는 대사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하는 중요한 표현 수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무대를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임도완 연출이 맡은 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대표작인 ‘보이첵’ ‘벚나무동산’ ‘휴먼코메디’ 등 초기작부터 ‘카프카의 소송’과 ‘한 여름 밤의 꿈’, 최근작인 ‘스카팽’에 이르기까지 비극과 희극, 신체극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면서 임도완 연출은 몸짓과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움직임의 정수를 보여준 바 있다. 이러한 두 예술가가 만나 빚어내는 이번 무대는 그 자체로 한 폭의 문인화 같은 여백과 격조를 느끼게 해준다. 여기에 안무·조명·영상·의상이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풍성하면서도 감각적인 이미지가 무대 위에 펼쳐진다.

매화는 본래 그 형태나 꽃잎보다도 은은한 향으로 더 오래 기억되는 꽃이다. 나무 아래를 무심히 걸어가다가 문득 깨닫는 매화의 맑고 그윽한 향기는 그 자체로 담백하고 고고한 정신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예찬돼 왔다. ‘이른 봄 늦은 겨울’은 바로 그런 매화의 은은한 향과 마주하는 순간을 무대 위에 구현하고자 한다. 공연 내내 펼쳐지는 다채로운 이야기와 이미지는 두 눈과 귀를 사로잡기에 충분하지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난 뒤 텅 빈 무대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여운과 잔상 또한 오래 기억되는 무대다.

글. 김주연 월간 ‘객석’ 기자로 출발해 공연 현장과 이론을 잇는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여러 매체에 공연 및 예술에 관한 칼럼을 쓰면서 대학 강의와 드라마투르기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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