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하나

극장을 새로이 상상하기
재난의 시대에 극장의 기능을 새로이 상상하기는 ‘공공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총체적인 재고와 맞물릴 때 더욱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지구적인 재난을 뚫고 더욱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모습으로 복귀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속에서 현명해질 수 있는 경로는 그것이 규정하고 유형화하는 행위와 장소성을 지양하고 그동안 구체화되지 않았던 잠재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벌거벗은 상상
마텐 스팽베르크, 공연 ‘휨닝엔’(2021) 홍보 사진. 터져 있는 울타리의 끝은 ‘날것의 잠재성’을 상징한다. 마텐 스팽베르크, 공연 ‘휨닝엔’(2021) 홍보 사진. 터져 있는 울타리의 끝은 ‘날것의 잠재성’을 상징한다.

스웨덴 안무가 마텐 스팽베르크(Marten Spanberg)의 작품에서는 종말의 냄새가 난다. 낙산공원, 한강변, 덕수궁 뒷길 등 매일 달라지는 서울의 공공장소에서 진행된 ‘그들은, 배경에 있는, 자연을 생각했다’(2020)에서 베를린과 런던의 또 다른 두 명의 무용수와 원격으로 접속해 같은 음악에 맞추어 각자의 호흡으로 춤을 춘 무용수 두 명의 홀연한 모습 때문일까. 화려한 조명이나 무대장치 없이 세상에 던져진 몸의 위태로운 현현 때문일까. 아니면 그 비릿한 현전이 황혼이라는 시간적 경계에서 희미하게 떨리기 때문일까.

2021년에 ‘휨닝엔(황혼)’의 제작 및 공연을 위해 직접 한국을 방문한 스팽베르크가 작품의 홍보 이미지로 내놓은 자작 스케치에는 벌판에 쳐진 울타리가 그려져 있다. 구획화된 공간에서 울타리를 따라가는 시선은 곧 끝선을 만난다. 울타리 끝은 터져 있다. 스팽베르크는 구획과 배제의 장치가 작동을 멈추는 그곳이 ‘벌거벗음’이 발생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권력에 더는 장악되지 않는 날것의 잠재성이 꿈틀대는 곳. 그 잠재성을 발현하는 것이 안무가로서 그가 취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스팽베르크가 안무한 ‘그들은, 배경에 있는, 자연을 생각했다’와 ‘휨닝엔’은 그리하여 극장으로부터 벗어난 공공장소에서 발생한다. 단지 무대를 극장 바깥으로 옮겨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과 예술의 관계를 초기화하려는 의지를 세상에 던진다. 그것은 온난화와 코로나가 가져온 다중 재난의 시기에 필연적 질문으로 다가온다. 진보와 새로움을 꾸준히 추구해 온 인간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어떤 전환적 발상이 필요한 것일까?

마텐 스팽베르크, 렉처 시리즈 ‘강둑대화’(2021). 마텐 스팽베르크는 작품을 선보이는 축제 기간 중 관객과의 대화 자리를 마련했다.(왼쪽) 마텐 스팽베르크, 공공의 춤추기 ‘춤추는 공동체’(2021). 시민들이 참여하는 춤과 이를 통해 ‘함께’가 가능해지는 공공의 장이 발생한다.(오른쪽) 마텐 스팽베르크, 렉처 시리즈 ‘강둑대화’(2021). 마텐 스팽베르크는 작품을 선보이는 축제 기간 중 관객과의 대화 자리를 마련했다.(왼쪽)
마텐 스팽베르크, 공공의 춤추기 ‘춤추는 공동체’(2021). 시민들이 참여하는 춤과 이를 통해 ‘함께’가 가능해지는 공공의 장이 발생한다.(오른쪽)

스팽베르크에게 절대적 영향을 준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저서 ‘벌거벗음’에서 개인의 모든 창작 행위를 유형화하고 포획하는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예술의 잠재력을 조심스레 타진한다. 모든 아방가르드 전략이 재원화되고 변화를 위한 예술가의 열망이 상징자본으로 작동하는 시장에 잠식되는 이 시대에 예술이 취할 수 있는 변혁의 단초는, 권력의 장악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의 잠재성을 일깨우는 것에 있다. 얼핏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아감벤의 예술론은 자본과 권력의 장악력이 어느 때보다도 넓고 깊게 이뤄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가 말하는 ‘벌거벗음’이란, 존엄을 떨구어낸 비릿한 신체성으로, (‘부끄러움’을 감각하지 않게 하는) 신의 은총이 벗겨진 상태라는 창세기 최초의 상실을 자국으로 껴안는 신학적인 함의를 내포한다. 벌거벗음은 단지 문명과 질서의 허울을 벗어던지는 순진한 자유의 표출이 아니라, 회복할 수 없는, 부재하는 은총의 그림자로서 현현하는 양면적 사건이다. 벌거벗고도 벌거벗음을 알지 못했던 (은총의) 상태를 소급해서만이 정의될 수 있는 불가능한 사건이다. 벌거벗음으로써 자본과 권력에 대항한다는 것은 정치적 목적의식으로 무장한 힘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와 야성의 대립을 인정하고 불가능을 포용하는 것으로부터 조심스레 출발한다. 이미 어떤 형태로든 구현된 (그리하여 자본의 질서에 편입된) ‘가능한 것’ 혹은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련의 구체화된 형상으로부터 배제된, 상상되지 않은 ‘잠재된’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감벤이 말하는 ‘잠재성’이란 이미 자본화된 통례적인 지식의 영역에서 가능한 형태로 구현되지 않은 수동적 몸짓을 포함하며, “하지 않을 능력”을 아우른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의 신화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정치적 태도마저 재원화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불화와 전복을 먹고 더 강해진다. 자본의 촘촘한 망의 틈에서 울타리 너머의 상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직 지배 질서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잠재성이다. 목적과 과정이 구분되지 않고 기존 질서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열린 사건. 정치적 목적의식이나 주체성마저 비워낸 몸짓.

조르조 아감벤의 저서 ‘벌거벗음’ 원서. 이 저작에서 조르조 아감벤은 개인의 모든 창작 행위를 유형화하고 포획하는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예술의 잠재력을 이야기한다. 조르조 아감벤의 저서 ‘벌거벗음’ 원서.
이 저작에서 조르조 아감벤은 개인의 모든 창작 행위를 유형화하고 포획하는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예술의 잠재력을 이야기한다.
벌거벗은 (극)장

물론 잠재성을 구체화하기 위한 몸짓이 극장 밖이라는 물리적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은 절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배 권력에 의해 규정된 장소성으로부터의 이탈이 어떤 문제의식을 동반하는지이다. 우리는 ‘개념적으로’ 극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극장으로부터 벗어나는 발상을 극장에 적용해야 한다. (극)장을 새로이 상상해야 한다.
‘세속화 예찬’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모음집의 글에서 아감벤은 지배 권력에 의해 공공성으로부터 고립된 공간과 행위에서 정치적 맥락을 제거하고 인류 보편적인 공유를 지향하는 경로를 논한다. 그가 주창하는 ‘불경화(profanation)’란, 지배 질서와 법에 의해 규정되고 통제되는 공유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공유의 기능과 의미 자체에 변화를 가하는 행위다. 즉 법과 사용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함이다. (아감벤은 발터 베냐민을 경유하며 영어로 ‘profane’으로 번역되는 개념을 ‘secular’라는 개념과 구분하고 있어서 ‘세속화’보다는?‘금기’의 압박을 개념적으로 내포하는?‘불경화’가 좀 더 충실한 번역어겠다.) ‘불경화’라는 아감벤의 개념은 공공장소에 대한 공유권의 회복을 상상하고 구현하는 데도 유효한 척도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17세기부터 시선과 쾌락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해 온 장치로서의 극장이라는 공공장소를 어떻게 새로이 창출할 수 있을까? 자본과 권력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극장의 순수한 기능을 재발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기존의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상상이 필요한 것은 특히나 코로나라는 총체적 재난과 기후변화가 존재와 문명에 대한 총체적인 재고를 부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가적 안건이나 ‘진보’라는 자본주의의 허울로부터 자유로운 공공장소를 새로이 발현한다는 것은 감각과 사유의 조건을 재설정함이다.
물론 우리가 아감벤으로부터 취할 바는 그가 이탈리아의 역사적 맥락에서 내놓은 방향을 정해진 정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질문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우리 나름대로 상황에 거리를 두고 총체적인 사유를 하는 것이다. 공유를 위해 극장의 울타리를 허물고 창작과 관람의 경계를 무화하는 것은 정답이 될 수 없다. 공공성과 예술의 관계를 가장 근원적인 기반으로부터 다시 생각하고, 모더니즘이 영입되면서 더불어 수입된 유럽 부르주아 극장의 신성화가 자본의 신성화로 이어졌던 역사적 맥락을 새삼 반추하는 것에서 새로운 상상의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자본화된 극장의 불경화란 극장 생태계의 작동 방식과 그를 구성하는 감각을 재발명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이러한 방향성의 첫 단계는 상징 자본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극장을 포함하는 ‘공공성’의 사유를 초기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공성을 총체적으로 질문하는 맥락에서 극장이라는 구체성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자본과 결탁한 목표지향적 행위를 배제함과 동시에 변증법적인 경로로서 벌거벗은 극장을 상상하기.

벌거벗은 기술 (혹은 기술로 벌거벗겨진 존재)

기술이 예술과 접목하는 경로를 새로이 모색하는 것은 바로 공공성과 예술의 관계, 제의와 불경화의 역학을 재고하는 총체적 맥락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기술의 신화를 만들고 스펙터클과 결탁하는 상징 자본을 재창출하는 대신, 인간의 조건에 대한 초기화된 사유와 상상을 촉진하기. 말하자면 자본과의 결탁을 통해 근대를 거치며 발전해 온 ‘테크놀로지’가 아닌, 그 원형적 의미로서의 ‘tekhn?’, 즉 수공예적인 만듦의 감각을 다시 일궈야 하지 않을까. 이는 단지 자본이 선사하는 최첨단 장치들을 무조건 배제함이 아니라, 그것에 내재된 몸짓의 잠재성을 새로이 사유하는 것이다. 단지 근대 이전 모델로 퇴행하는 것이 아닌, 근대를 재고하고 자본의 생태계를 재조직하기 위한 작은 몸짓으로의 기술. 재난의 시대에 극장의 기능을 새로이 상상하기는 결국 ‘공공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총체적인 재고와 맞물릴 때 더욱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울타리를 없애고 대중 친화적인 정책을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보다는 감각을 갱신하고 예술을 재정의하는 몸짓을 고안하는 것이 더욱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행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 지구적인 재난을 뚫고 더욱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모습으로 복귀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속에서 현명해질 수 있는 경로는 그것이 규정하고 유형화하는 행위와 장소성을 지양하고 그동안 구체화되지 않았던 잠재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장르화되지 않고 재원화되지 않는 불가능한 상상의 기술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황혼의 시간을 위해.

서현석, ( )*(2021). 옵/신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서현석의 VR 작품.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중력장으로 조직된 시공간은 결코 텅 빈 공간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설파한다.(왼쪽) 서현석, 코오피와 최면약(2021). 코오피는 각성, 최면약은 무기력을 상징한다. 1인을 위한 연극인 이 작품을 통해 서현석은 병 주고 약 주는 사회의 폭력에 노출된 인간을 상징화했다.(오른쪽) 서현석, ( )*(2021). 옵/신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서현석의 VR 작품.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중력장으로 조직된 시공간은 결코 텅 빈 공간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설파한다.(왼쪽)
서현석, 코오피와 최면약(2021). 코오피는 각성, 최면약은 무기력을 상징한다. 1인을 위한 연극인 이 작품을 통해
서현석은 병 주고 약 주는 사회의 폭력에 노출된 인간을 상징화했다.(오른쪽)
글. 서현석 최근 ‘이탈’(서울시립미술관), ‘X(무심한 연극)’(국립현대미술관), ‘코오피와 최면약’(국립극단), ‘( )’(문화역서울284) 등 가상현실을 활용하는 작품을 발표했고, 책으로는 ‘Horror to the Extreme’(공저, 2009), ‘미래 예술’(2016, 공저), ‘불가능한 춤’(공저, 2020) 등이 있으며, 장(scene)으로부터 벗어나는(ob-) 예술을 다루는 잡지 ‘옵.신’을 비정기적으로 내고 있다.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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