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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2021 리컴포즈’ 리뷰
실험 이면에 놓인 새로운 가능성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리컴포즈’ 시리즈에서 작곡가들은 전통음악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들 중엔 전통음악의 고유한 특성을 더욱 강화하려는 이도 있었고, 이를 재구성해 만들어낸 결과물의 새로움을 더 부각하는 이도 있었다. 그간 소재·음향·구성 등 많은 것이 각자의 시선으로 탐구되었다. 작곡가들의 실험을 역추적하고, 전통과 창작곡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는 일이 ‘리컴포즈’ 공연에서 자연스레 수반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이는 지난 ‘2021 리컴포즈’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날 공연에서는 작곡가들이 주목한 요소와 함께 고려해볼 만한 또 다른 물음들이 함께 떠오르는 듯했다. 그 실험의 이면에는 많은 질문을 품은 채, 새로운 탐구를 기다리고 있는 요인들이 존재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 ‘2021 리컴포즈’
음악에 잠재된 서사

김백찬의 ‘Knock’는 음계와 장단을 작품의 중심축에 놓아둔다. 송주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서양의 현대음악적 어법이 지배적으로 사용되는 창작 국악관현악에,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확장시키는 새로운 어법의 제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조심스럽게 가져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5음 음계를 적극적으로 조옮김하며 다채로운 색채감을 만들어내고, 기존 장단으로부터 다양한 리듬 조합을 끌어낸다.

노크를 하듯이, 한 음을 조용히 두드리며 시작한 ‘Knock’는 다른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나가는 것처럼 관현악단의 합주로 퍼져나간다. 단단한 구심점이 돼주는 장단 위에서 5음 음계에 기반한 선율은 하나둘 뒤섞이고, 악기들은 계속해서 다르게 조합되며 매끈한 흐름을 이어간다. 이렇게 하나둘 층층이 쌓여가는 음들과 장단의 구성은 무척이나 다채로웠고, 악기 고유의 음색과도 잘 맞물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려하게 영원히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았던 김백찬의 ‘Knock’에서는 어떤 어법도 제한적이지 않은 듯했다.

한편 이 곡을 들으며 더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흐름’이었다. ‘Knock’는 확장하며 가속하던 부분과 묵직하고 느린 부분, 그리고 다시 한번 몰아치는 부분으로 구성된 듯했다. 각 부분은 꽤 선명한 정서를 상상케 했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서의 변화 폭도 상당히 컸다. 음악을 들을수록 김백찬이 초점을 맞춘 어법뿐 아니라, 그 어법으로 엮어낸 음악의 흐름에 더 주목하게 됐다. 때론 알 수 없는 이야기 속 장면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물론 이 음악은 말이 없고, 이 곡은 ‘한국 전통음악의 새로운 어법을 두드리는 곡’이다. 하지만 만약 여기에 음악으로 들려주고자 했던 말 없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 이야기의 구조는 또 어떤 전통과 맞닿아 있을지 알고 싶었다. 그가 ‘어법’에 적용했던 실험의 태도를 다른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을지, 소위 보편적이라 이해되는 음악의 흐름을 다시 한번 리컴포즈한다면 또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그다음의 실험을 상상해 보게 됐다.

국립국악관현악단 ‘2021 리컴포즈’

보두앵 드 제르의 ‘The Lion Dance’는 달밤 아래 숲속의 사자를 담은 ‘소리 사진’들에 기반한 곡이었다. 소리와 사진은 일견 만날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일련의 전환 과정이 내재한다. 최초의 출발점은 북청사자놀음의 가락이었고, 그 이후 보두앵은 직접 ‘사자의 이야기’를 만들었으며, 그 이야기를 장면화한 가상의 ‘소리 사진’들을 설정했고, 그것을 국악관현악 편성으로 음향화한 결과가 지금의 ‘The Lion Dance’인 것이다. 이야기도 사진도 없이 이제는 소리만 남아 있지만, 많은 이야기가 응축된 듯한 이 곡에서는 사자의 존재를, 밤의 고즈넉한 정경을, 때론 불현듯 다가오는 위험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내게 더 돋보였던 것은 그가 음향을 구성하는 방식이었다. 국악관현악이라는 거대한 편성을 마주하지만 그는 여기서 압도적인 흐름이나 폭발적인 음향을 만들지 않는다. ‘The Lion Dance’는 고유한 음색을 지닌 악기들을 비교적 작은 편성들로 묶어 다양한 어울림을 만들어냈다. 때론 의외의 조합이 등장해 이제껏 잘 듣지 못했던 색채감을 경험할 수도 있었다. 만약 누군가 이 음악을 듣고 ‘사자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거기선 그 서사보다도 그 표면을 구성하는 총천연색의 색채가 더 중요히 다뤄져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에 잠재된 그 어떤 서사도 없이, 그가 집요한 음향 탐구로부터 출발한 국악관현악곡을 써내려 간다면 그것은 역으로 또 흐름을 만들어낼지, 그런 작은 물음이 남았다.

‘현주소’를 찾는 과정

김택수의 ‘입타령’과 ‘무궁동’에서는 목소리와 텍스트, 악기와 리듬 등 다양한 요소를 만날 수 있었다. 먼저 마지막 곡이었던 ‘무궁동’은 거침없는 음들의 연쇄가 매력적인 곡이었다. 짧은 모티프들이 반복되지만 그것이 아주 기계적인 반복은 아니었고, 모티프의 길이와 음역, 형태, 악기들의 조화 등은 계속해서 변화했다. 음악의 흐름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어딘가로 빠르게 나아갔으며, 그 흐름은 쾌청하기 그지없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야경을 닮은 반짝이는 음향이 등장했다. 사전 인터뷰에서 김택수는 리컴포즈를 하는 이유가 결국 “한국의 현주소”를 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고, 그가 떠올린 현주소에는 ‘바쁘게 돌아가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있었다. 그런 시대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도권의 도시생활자로서, 그간 여러 관현악곡에서 거의 느끼기 어려웠던 정서적 친밀감을 체감할 수 있었다.

많은 고민이 수반된 만큼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킨 것은 박민희와 함께한 ‘입타령’이었다. 목소리의 떨림, 각종 길이로 압축된 목소리, ‘권주가’라는 무장단 곡, ‘Thㅓ’라는 미묘한 발음, ‘스겅’ 같은 효과음을 실험해 보는 일, 그리고 흐르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곡까지. 이 곡은 김택수가 목소리에 어떻게 다가가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실험 보고서 같았다. 곡을 들으면서 소재를 재구성하는 방식, 음향화하는 방식, 그리고 이를 프레이밍하는 제목 등 작품 안팎에서 작곡가가 고심한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곡에는 참신한 음향이 가득했고, 그가 언급했던 베리오나 진은숙의 지난 실험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도 있었다.

의미 없는 말을 소재로 하거나, 말 자체가 없거나, 순간적인 유희로서 노래되는 무언가들. ‘입타령’의 조건을 떠올리며, 한편으론 다른 흥미로운 접근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화 혹은 발성의 무목적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면 그건 의도나 계획 없이 편안히 내뱉을 수 있는 무언가여야 했을 것이다. 김택수의 신작 ‘입타령’에서는 반드시 작곡가가 미리 결정해 놓아야만 했던 어떤 섬세한 음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노래하는 이에게 깊게 체화된 습관에서 비롯된 부분, 이것이 작곡된 것인지 혹은 순간적인 반응으로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본래 목소리와 가까운 무언가를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 ‘2021 리컴포즈’

박민희와 나눈 대화로 시작된 이번 작업을 바라보며, 조금 다른 방식의 작곡 과정도 상상해 보게 됐다. 이를테면 보편의 방식대로 작곡가가 상상한 음향을 미리 기보해 두는 것이 아니라 음악가를 관찰하고, 그의 습관을 함께 기록하고, 그것을 함께 꼬아보고 구성함으로써 ‘입타령’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모습일까. 이런 과정은 “전통음악을 오늘날의 음악으로 재해석하는” 리컴포즈 시리즈에서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전통에 기반한 창작’에서 그 탐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악곡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전통음악만이 아니라, 그 수많은 전통음악을 체화하고 지금의 음악을 향유하는 음악가의 경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21 리컴포즈’ 관객아카데미 ‘2021 리컴포즈’ 관객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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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작곡가는 서로 다른 요인에 주목하며 ‘리컴포즈’라는 물음에 각자의 답을 내놓았다. 이들의 실험 설계는 분명했고, 현장에서 음악을 들으면서도 그들이 어떤 쟁점을 다루었는지를 차근히 뒤따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이면에서 그들이 실험한 것만큼 흥미로운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었다. 예컨대 음계에 관한 실험을 뒷받침하는 음악의 흐름, 희미한 서사를 넘어서는 총천연색의 음향, 그리고 협업 관계에서만 발생 가능한 또 다른 창작 과정 같은 것들. 지난 ‘2021 리컴포즈’에서 내게 가장 선연히 다가온 것들은 그런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단번에 끝나버릴 음악적 실험은 여기에 없고, 이 음악들은 우리의 질문을 해결해 주기보다는 여전히 수많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작곡가들이 내놓은 신작이 새로운 질문이 되어 다른 무언가로 이어진다면, ‘리컴포즈’는 그저 새로운 국악관현악곡을 만드는 일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끝없이 이어질 음악적 실험의 연쇄 아래, ‘리컴포즈’ 속 신곡들은 우리가 전통을 인식하고 재구성하는 방법, 그리고 그 이면에 녹아 있는 태도를 서서히 조율해 갈 수 있는 작은 분기점들이 돼주는 것은 아닐까. 점검하며, 되돌아보며,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그런 지난한 과정 속에서 결국 우리는 전통을, 그리고 지금의 음악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 신예슬 음악 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동시대 음악에 관한 의문으로 비평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음악학을 공부했고, ‘음악의 사물들’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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