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하나

국립무용단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 리뷰
직업인으로서의 무당, 직업인에 그치지 않는 무당

에세이 ‘신령님이 보고 계셔’(2021)에서 저자 홍칼리는 무당으로서의 일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내림을 받은 무당에 대한 온갖 오해와 호기심이 난무하지만 “한복 대신 청바지 입고 신당 대신 카페에서 점을 보는” 그녀의 일상을 엿보다 보면 무당이 여느 프리랜서처럼 직업인이고 현대인임을 깨닫게 된다.

자고로 춤은 무속과 가깝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춤의 기원이 신과 인간을 잇는 종교적 의식이었던 것처럼 우리 문화에서도 춤은 벽사진경(闢邪進慶) 및 나례(儺禮)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예술춤이 성립된 후에는 굿판의 무당춤이 무대화되거나 무속적 주제가 예술춤에서 다루어지곤 했다. 지역과 계통이 다양한 살풀이춤뿐 아니라 한국춤에 곧잘 등장하는 지전·칼·부채 등의 소품이나 장단이 무속적 기원을 지녔음을 생각하면 한국춤과 무속은 떼어놓기 어려울 정도로 가깝다.

그런 점에서 국립무용단의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2021년 11월 11~1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은 무속을 다루되 무속의 전형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무속이 연상시키는 토속성이나 신비스러움을 걷어내고 직업인으로서의 무당을 다룬다. 신의 부름을 받은 무당이 직업인이라니. 하지만 무당이 내림굿을 받는 과정도, 초심자에서 숙련자로 나아가며 타인과 협력하는 과정도, 멀리서 보면 한 사람이 특정한 직업에 입문해 좌충우돌하며 소명으로 삼게 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당에 대한 대상화를 걷어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선이 작품 전반에 흐른다.

막이 열리면 무대 위에 무용수 수십 명이 모두 제각각의 방향을 보고 서 있다. 불특정 다수가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이며 서로 교차하는 모습이 명동 한복판과 같다. 길을 걷는 모두가 누군가이다. 우리가 스쳐간 사람들 중에도 무당이 있다는, 이들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이라는 주제 의식이 선명히 드러난다. 모두 무표정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장면 위로 “가다 보면 깊은 산도 있고 물도 있고 또 넘어진다…. 멀고 험한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신령에게 의지해라”라며 반복되는 구음은 현대인의 삶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무속의 존재감처럼 다가온다.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는 무당의 입문을 소명의 발견으로 그린다. 그러나 특정 주인공을 내세워 성장담으로 삼기보다 46명의 무용단 단원 전부를 입무자·조무자·주무자로 무대에 올렸다. 프로그램 노트의 말마따나 “무대 위 무용수 모두 샤먼이다.” 입무자(入巫者)는 ‘예기치 않은 소명을 맞닥뜨려 선택의 갈림길에 선 사람’이고, 조무자(助巫者)는 ‘무당이 되는 길을 먼저 걸어왔고 입무자가 소명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며, 주무자(主巫者)는 ‘오래전 무당의 삶을 받아들여 내림굿 의식을 주관하는 사람’이다. 일반적인 회사의 논리로 환원해 본다면 신입사원, 대리급, 과장급이랄까. 무당이 단독자처럼 외로워 보여도 그 역시 사회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예측과는 달리 입무자·조무자·주무자는 나이대로 구분되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입무자와 젊은 주무자가 공존하는 광경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데 나이가 상관없음을 암시한다. 대신 이들은 의상 색깔을 통해 구별되었다. 입무자가 초심자의 색깔인 아이보리 계열을 입고, 주무자는 감색 의상에 파란 부채를 들고 다니며, 조무자는 푸른 계열의 옷에 방울 달린 털모자를 써서 구분된다. 털모자는 무당의 방울처럼 입무자와 주무자를 연결하는 고리 정도로 해석된다. 작품은 3장으로 구성되며 크게 순환적인 구조를 띤다. 1장에서 조무자들이 주무자들에게 삼삼오오 지도받으며 균형을 이루던 세계에 입문자들이 엉거주춤 들어오고, 2장에선 내림굿을 받는 장면이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3장에선 내림굿을 받아들인 입문자들이 일상으로 복귀하고 그중 일부는 조무자가 되어 다음 세대의 입문자들을 기다리게 된다. 이들이 익명의 군중이 되어 서로 스쳐간다는 에필로그는 프롤로그를 반복하며 순환적 구조를 드러낸다.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차가움이다. 무속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가 붉음과 과함, 뜨거움이라면 이 작품은 오방색과 화려하고 기괴한 장식을 모두 걷어냈다. 색 팔레트에서 의도적으로 붉은색을 제거하니 남은 것은 무채색과 푸른색이다. 무대엔 거대한 벽이 사선으로 마주 보고 서 있고 무용수들은 흰색 및 푸른색 계열의 품이 넉넉한 재킷과 셔츠, 바지를 입고 있다. 장식성이 완전히 제거된 무대에서 세련된 일상복의 무용수들이 끊임없이 걸어 다니는 모습이 마치 패션 브랜드의 F/W시즌 런웨이를 연상시킨다.

차가움은 시각뿐 아니라 청각도 지배한다. 이날치 밴드의 수장인 장영규가 맡은 음악은 계속 끊어지고 멈추며 몰입을 방해한다. 굿 음악의 타악적 리듬이 간결하게 깔리는 위로 전자음 효과가 덧대진다. 춤이 지속돼도 음악이 좀처럼 달구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춤으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한다.

움직임 역시 차갑다. 작품 내내 무용수들은 서 있거나 앉아 있다. 손인영 안무자 외에 4명의 주역 무용수인 김미애·박기환·조용진·이재화가 조안무로 참여했다. 다섯 안무자의 움직임에서 충돌을 기대했건만 서로에게 양보를 거듭한 탓인지 오히려 움직임의 밀도가 낮아 보인다. 여러 장면에서 무용수들은 조각이나 풍경의 일부가 되어 무대미술에 주도권을 양보한다.

입무자·조무자·주무자는 움직임 차원에서 구별된다. 입무자는 격렬하고 정제되지 않은 움직임을 보여준다. 황량한 도시의 삶을 떠나온 입문자들은 삶의 잣대가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몸의 축이 흔들거리거나 한 발로 애써 지탱하는 등의 움직임으로 보여준다. 조무자들의 움직임은 이질적이다. 그들은 보깅(voguing)을 하듯 몸통과 하체는 정면으로 꼿꼿이 고정한 채 팔을 빠르게 움직인다. 두 팔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감고 팔꿈치를 모았다가 한 손을 뻗어내는 동작을 보디랭귀지처럼 반복하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양 떼를 돌보는 보더콜리처럼, 혹은 거대한 기계장치의 나사처럼 일렬로 늘어서서 회전하며 입문자들을 탈곡하듯 통제한다. 한편 주무자는 경지에 이른 자유로운 이들로 주로 푸른 부채를 들고 나와 호흡을 강조하는 즉흥적인 춤사위를 행한다. 입무자-조무자-주무자의 위계가 선명하다 보니 춤사위에도 위계가 매겨진다.

이처럼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차가움은 불편함을 야기한다. 관객들은 특정 인물에게 감정이입해 빠져들거나 춤의 장엄함에 압도되길 바라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무속을 소재로 했으니 한순간엔 에너지를 터뜨려주길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는 그러한 몰입을 허용하기보단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움직임으로 계속 거리를 두고 관찰하게 한다. 누구 하나에게 집중하지 않으니 전체를 보게 되며, 자연스럽게 전문 영역으로서의 무속, 그리고 그 영역의 지속성을 위해 세대가 교차하며 순환하는 과정을 인식하게 된다.

문제는 차가움이 입무자-조무자-주무자의 관계성마저 경직시켰다는 것이다. 작품은 “소명의 발견을 둘러싼 입무자·조무자·주무자의 역동적인 감정 변화와 관계”에 초점을 둔다지만 구조에 함몰된 개인에게서 좀처럼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또한 입무자가 불안과 혼란을 떨치고 새로운 무당으로서 소명을 발견하는 과정, 주무자들이 입무자를 보호하려다 충돌하는 과정, 조무자가 입무자와 주무자 사이에서 유연하게 조율하는 과정 등의 관계성 역시 발견하기 어려웠다. 입무자·조무자·주무자들이 등퇴장을 반복하지만 여기엔 논리적인 흐름이나 인과성이 흐릿하게 느껴진다.

직업인으로서의 무당으로 돌아가 보자. 주무자가 조무자에게, 혹은 조무자가 입무자에게 가르침을 전수하는 과정, 그리고 춤추지 않는 이들이 주변에 머물며 춤추는 이들을 바라보는 장면은 마치 무용 연습실을 보는 듯하다. 삼삼오오 모여 선배의 움직임을 따라 하고 후배의 동작을 수정해 주는 구심 전수의 과정은 전통춤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무당은 무용 연습생도 회사원도 아니다. 무당이 여느 직업인과 다른 점은 신과의 만남에 있다. 따라서 무당의 입문기 역시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신과의 첫 조우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아쉬운 점은, 이번 작품이 황해도 강신무를 토대로 했다고 하지만 입문자들이 춤추는 몸을 통해 신과 만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장면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의 영험함은 스스로 돌며 빛을 발광하는 거대한 벽체나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영상으로 표현될 뿐 춤추는 몸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무대 위 신들의 형상을 깨부수느라 무속의 힘마저 지워버린 것은 아닌지 아쉽다.

글. 정옥희 무용연구자이자 비평가로서 춤과 춤이 아닌 것의 경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저서로 ‘이 춤의 운명은’(열화당, 2020)과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엘도라도, 202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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