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을
주는 곳

뮤지엄 산
산에서는 누구나 느리게 걸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의 풍경으로 스며든다.
빛 한 줄기, 바람 한 줌, 풀 한 포기처럼, 그저 자연의 일부로.

예술과 자연, 철학적 사유로 이끄는 공간

적막과 고요가 흐르고, 시간은 멈춘 듯하다. 빛을 머금은 잔물결과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바람만이 조금씩 감각을 흔들 뿐. 그리고 마침내 풍경의 일부로 소실되는 듯한 기묘한 경험. 일본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Ando Tadao, 安藤忠雄가 설계한 공간 속으로 발을 디뎌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안도와 한국의 인연은 제법 깊다. 덕분에 국내에서도 그가 지은 건축물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는데, 유민 미술관(제주, 2008)부터 본태 뮤지엄(제주, 2012), 마음의 교회(여주, 2011~2015) 그리고 지난해 문을 연 LG아트센터(서울, 2022) 등 국내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만 아홉 곳에 달한다.
그중 해발 275미터 정상에 자리해 ‘산 위의 별천지’로 불리는 뮤지엄 산Museum SAN은 자연과 인간, 공간을 연결하는 안도의 건축 철학과 미학이 극치에 다다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뮤지엄 산의 시작은 10년 전인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부지를 보고 "길게 이어진 보기 드문 형태의 땅이었기에, 이곳이라면 주위와는 동떨어진 별천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라는 안도의 예상은 정확히 8년 뒤 현실이 되었다. 그는 산꼭대기의 뛰어난 조망과 고유의 지형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환경 일체형 뮤지엄을 만들어 냈고, 그 결과 뮤지엄 산은 ‘어디에도 없는 꿈의 뮤지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아시아의 뮤지엄’이라는 외신의 극찬을 받으며 전 세계인이 찾는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뮤지엄의 시작점인 웰컴 센터에서부터 반환점 구실을 하는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관까지 약 700미터에 이르는 선형 길을 걷다 보면 세 종류의 정원과 건축물을 만나볼 수 있다. 붉은 패랭이꽃과 푸른 잔디, 그리고 약 180그루의 하얀 자작나무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플라워가든, 뮤지엄 산의 랜드마크인 아치형 입구Archway와 고고한 수경 공간이 한눈에 펼쳐지는 워터가든, 경주 신라 시대 고분을 모티프로 한 스톤가든은 꽃·물·돌이라는 저마다의 고유한 물성과 태도를 지닌 채 주변과 어우러진다. 안도 타다오의 노출 콘크리트 DNA가 담긴 건축물에서는 자연을 공간 속으로 들여오려는 설계자의 의도를 더욱 세심하게 느낄 수 있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각·삼각·원형의 ‘無의 공간’은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그림자를 통해 콘크리트 공간에 생동감 넘치는 표정을 불어넣는다.
뮤지엄을 산책하듯 걷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가 치밀하게 설계한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누군가의 의도일까. 뮤지엄 산에서는 안과 밖, 인간과 조형, 자연과 작품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모든 시간이 인간과 자연, 공간의 합일점을 찾아가는 여정처럼 느껴진다. 여기에 시야를 제한하는 조경과 가벽은 마치 외부와 단절된 산속의 외딴섬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자연스럽게 ‘소통을 위한 단절Disconnect to connect’이라는 뮤지엄의 슬로건을 곱씹게 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한 기간이 아닌 마음가짐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본관 청조갤러리에서는 안도 타다오의 50년 건축 인생을 집대성한 <안도 타다오–청춘> 전이 진행 중이다. 7월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안도 자신이 설계한 공간에서 열리는 최초의 전시회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전시 타이틀인 ‘청춘’은 안도 타다오의 건축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자 매일매일 더 나은 설계를 한다는 스스로의 신념, 그리고 인생을 대하는 그의 도전 의식을 함축한 단어다. 안도의 전시가 열리는 본관 입구에는 그가 직접 제작한 청사과 오브제가 자리하고 있다.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의 시 「청춘」에 대한 오마주라고 밝힌 해당 작품은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란 안도의 철학과도 닿아 있다.
크게 4부로 구성된 전시에서는 1969년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안도의 전반기 건축 작품부터 지역 공동체의 기억을 담은 공공건축, 30년에 걸쳐 완성한 나오시마 프로젝트,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 공공장소에 지어진 건축 작품들과 2020년 준공한 〈Bourse de Commerce〉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안도 타다오의 건축 세계를 망라하는 대표작 25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늘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도전을 이야기하는 안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삶은 절망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매사 처음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고, 뭔가를 시작한다 해도 대개는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가능성에 기대를 품고 애오라지 그늘 속을 걷고, 하나를 거머쥐면 이내 다음 목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은 희망의 빛을 이어나가며 필사적으로 살아온 인생이었다."라는 그의 말처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안도는 복서, 트럭 운전, 공사장 막일 등으로 생계를 잇던 중 우연히 중고 서점에서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건축 카탈로그를 접하고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르 코르뷔지에의 설계 도면을 베껴 그리며 모두 외우다시피 했고, 세계 각지를 무일푼으로 여행하면서 독학으로 건축을 배웠다. 고졸 복서에서 세계적인 건축가로 우뚝 선 안도 타다오. 이제 그의 이름 앞에는 노출 콘크리트의 대가, 일본의 가우디, 거장 혹은 천재라는 타이틀이 숱하게 따라붙는다. 하지만 팔순을 넘긴 나이, 암으로 대부분의 장기를 잃은 현재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안도에게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청춘’이라는 수식어가 더욱 어울리지 않는가.

10년 전 뮤지엄 산을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되찾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던 안도 타다오의 바람은 유효했을까? 글쎄, 다만 뮤지엄 산에서는 모두가 느릿하게 걸었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일렁이는 윤슬을 두 눈에 담았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 내려앉은 잔잔한 평화를 오래도록 훔쳐보고 싶었다.

뮤지엄 산 바로가기 http://www.museumsan.org
취재. 편집부 사진. 김성재 SSSAUN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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