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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국립창극단 <베니스의 상인들>
매력적인 셰익스피어의 변주
안토니오와 상인 조합의 위풍당당한 배가 돛대를 펼치고 관객을 맞이한다.
해상 중계무역으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던 베니스의
활기차고 희망찬 분위기가 해오름극장 가득 넘실거린다.

막이 오르면, 베니스 항구를 출발해 저 멀리 아드리아해 푸른 바다로 출항하는 상선이 가득하다. 인도로 향할 무역선의 출항을 앞두고 안토니오와 소상인들은 배의 무사 귀환과 두둑한 금화를 기원하는 신명나는 한판으로 관객의 흥을 돋운다. 그 모습이 만선을 기원하며 춤추고 노래하던 어느 바닷가 마을의 우리네 서민 같으니 절로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지난 6월 8일부터 11일까지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 국립창극단 <베니스의 상인들>은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의미 있는 시도를 했다. ‘최초의 희극, 역대 창극단 작품 중 가장 많은 62곡의 완전한 작창, 여기에 셰익스피어 원작 <베니스의 상인>의 제목을 <베니스의 상인들>로 바꿀 정도의 과감한 각색 등’ 공연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이러한 변화는 그 조화의 화음을 기대하게 하는, 그러면서도 엇박자의 예측하지 못한 새로움을 보여줄, 네 명의 창작자인 이성열(연출)·김은성(작가)·한승석(작창가)·원일(작곡가)의 만남으로 완성됐다.
작품 평가야 여러 기준을 이유로 엇갈릴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국립창극단은 이제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믿고 보는 신뢰할 만한 브랜드가 됐고,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창극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개막 20일 전부터 해오름극장 1,200석 4일 공연이 매진됐고, 김준수와 유태평양 등 국립창극단원의 사인을 받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길게 줄을 설 정도로 팬심이 뜨거웠다. 국립창극단의 전작 <정년이>에서 보여준 1950년대 국극의 인기가 이랬나 싶다. 무엇보다 개량 한복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성부터 교복 차림의 청소년까지 북적이는 로비 풍경 속에서 엿보이는, 창극 관객층이 한층 넓어졌다는 사실에 흐뭇해진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 온 국립창극단에 대한 애정과 응원의 마음이 크지만 <베니스의 상인들>에 대해 몇 가지 함께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하는 지점도 있다.

새로움과 확장을 향한 변주

먼저 작품의 선택이다. ‘창극’이라는 형식미에 어우러지는 작품을 고르는 일이 우선이다. 그런 면에서 희극의 창극화는 기대와 우려가 함께했다. “창극단 최초의 희극 작품”이라는 홍보 문구는 새로움을 원하는 관객에게는 좋은 자극일 수 있지만, 창작진에게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부담이기도 하다. 동시에 국립창극단의 레퍼토리를 더욱 확장하는 좋은 기회임은 물론이다. 그동안 선보인 국립창극단의 작품은 ‘전통의 변주’라는 가치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관객에게 전했다. 바로 이 지점이 창극의 전성기를 이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판소리 열두 바탕 작품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각색의 묘미를 보여 준 <적벽가><변강쇠 점 찍고 옹녀><흥보展><귀토>부터 전래동화 <장화, 홍련>, 그리고 웹툰 <정년이> 등 고금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 것이 놀랍다. 거기다 그 시선을 바다 너머로 돌려 그리스비극 <트로이의 여인들><메디아><오르페오전>까지 한국적 정서로 녹여내는 데 성공했다. 셰익스피어 작품 역시 처음이 아니다. 연출에 정영두, 극본에 배삼식, 작창에 한승석, 작곡에 정재일이 참여한 <리어>(2022)로 호평받은 전적도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5대 희극 중 하나인 <베니스의 상인>을 창극으로 만들겠다는 시도는 이와는 다른 변주다. 우리의 판소리는 기본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비극의 정서가 흐르는 계면조가 대부분이다. “바닥을 딛고 일어선 우리의 역사와 삶을 반영하다 보니 비장하고 결연한 곡이 많다”는 작창가 한승석의 말처럼 말이다. 비극과 한의 정서가 흐르는 음악으로 셰익스피어 희극을 어떻게 변주할까. 하지만 <베니스의 상인들>은 이런 우려를 가뿐히 넘어섰다. 단연 한승석 작창가의 역할이 돋보였다. 세상 어느 이야기를 가져와도 창극이 창극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작창이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 다섯 바탕을 기본으로 우리 소리가 대본과 인물에 맞는 전통 장단과 음계를 찾아 새롭게 ‘작창’ 될 때, 전통의 변주가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귀토><리어> 등에 이어 작창을 맡은 작창가 한승석은 두 명의 작창보 장서윤, 박정수와 함께 극 중에 나오는 62곡 전부를 새롭게 작창했다. 여기에 전통과 컨템퍼러리 실험의 최전선에서 거침없는 상상으로 전통 창작곡을 선보이는 원일의 곡이 더해졌다. 작곡가 원일은 <베니스의 상인들>에서 전통 창극에는 쓰이지 않는 록·팝·헤비메탈 등 빠른 박자의 현대음악을 국악기와 일렉기타·드럼·마림바·신시사이저 등의 악기로 편성해 새로움을 더했다.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고 ‘살 1파운드’를 대신 내놓으라는 악인 ‘샤일록’이 등장할 때 외치는 구호, ‘샤일-록, 샤일-록, 샤일-록’은 그동안 창극에서는 듣지 못했던 위압적인 사운드로 악인 캐릭터와 어우러지며 제대로 후크한다. 하지만 간혹 국악기와 어우러지지 못하는 전자음이 날카롭게 넘쳐나 아쉽기도 했다.

리듬감 넘치는 말맛과 민초의 정서

관객의 박수와 폭소 세례는 김은성 작가의 리듬감 넘치고, 코믹한 말맛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작사에서 터져 나왔다. 궁지에 처한 안토니오를 구하기 위해 “살 1파운드를 베는 대신 피 한 방울 흘려서는 안 된다”라는 지혜를 내놓는 여성 포샤는 더욱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변신했다. 포샤는 7개의 보석 상자 중 어머니의 유언이 담긴 상자를 고르는 사람과 결혼하려 하고, 전 세계에서 구혼자가 찾아온다. 저 멀리 아이슬란드에서 빙하를 부수고 도착한 구혼자인 바이킹은 가장 화려해 보이는 다이아몬드 상자를 고르지만 꽝. 바이킹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부르는 “다이아, 바이야, 당신은 빠이빠이야”라거나, 당시 베니스의 화폐단위였던 ‘더컷’을 활용한 “금화들을 더컷더컷 걱정일랑 그만 컷”, 그리고 “힘껏 맘껏 실어” “퍼얼Pearl 퍼얼 진주 고른 당신” 등의 가사는 랩의 라임 같기도 했으며, 덕분에 현대적 작창의 맛이 더욱 살아났다.
셰익스피어는 1598년경 <베니스의 상인> 집필을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셰익스피어에 관한 연구 중 기록에 남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20대, 사라진 8년은 가장 흥미로운 주제다. 혹자는 셰익스피어가 이때 이탈리아 여행을 한 경험으로 <베니스의 상인>을 썼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사람은 당시 악명이 자자하던 영국의 해적 드레이크와 함께 바다를 누볐기 때문에 훗날 작품 속에서 그토록 생생하게 바다를 묘사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이 작품의 매력은 베니스라는 이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니스에서 태동된 초기 자본주의에 있다. 놀랍게도 당시 안토니오는 ‘신용’으로 샤일록에게 빚을 얻는다. 김은성 작가의 각색이 날카롭게 현재를 관통하는 지점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기나긴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의 갈등 구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지주와 대상인에게 희생되는 서민이었다. 이는 유대인 차별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기도 하는 <베니스의 상인>을 <베니스의 상인들>로 각색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며, 셰익스피어도 생각하지 못한 김은성 작가만의 동시대적 통찰이다. 샤일록을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대신 대규모 무역상사의 회장으로, 그리고 사업가 안토니오를 소상인 조합을 이끄는 인물로 바꾼 것은 극적 갈등 구조를 명확하게 했다. 샤일록에게 대항하는 소상인의 애환은 과거 대지주에 대항하던 민초의 삶으로 이어지며 우리도 쉽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재한 앙상블의 힘

다만 원작 <베니스의 상인>에서 돋보이는 안토니오와 바사니오의 ‘살 1파운드’도 선뜻 내줄 정도의 ‘우정’의 가치가 희미해진 것이 아쉽다. 점차 가족 공동체가 무너지는 지금, 가까이에 있는 친구나 이웃의 돌봄과 관심, 애정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가 아닌가 하기 때문이다. 또 원작에는 없는 인물을 만들어 냈지만 이렇다 할 감초 역할을 하지 못했다. 국립창극단원의 앙상블과 코러스야말로 작품의 완성도를 더하는 화룡점정이었는데, 캐릭터의 분산으로 단원들이 이루는 앙상블의 힘이 약해졌고, 대극장 무대의 스펙터클이 살지 못하는 정적인 장면이 반복됐다. 안토니오와 바사니오 각자, 혹은 두 사람의 이중창이 길어지는 동안 배경으로 서 있기만 하다가 퇴장하는 단원이 미장센에 더욱 적극적으로 합류하고, 또 극의 마지막 부분에 안토니오가 홀로 감옥에 갇혀 소상인과 함께 배를 만들던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상인의 노동요가 즐겁게 울려 퍼지는 장면 등으로 무대에 활기를 더했으면 어땠을까. 창극의 시작은 조선 말, 소리꾼 여럿이 함께 서서 노래하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명의 소리꾼이 장악하는 판소리와 가장 다른 점이다. 다 함께 어우러지는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흥과 해학, 감동과 눈물이야말로 창극의 묘미이고, 그것이 국립창극단이 가장 잘하는 일이고, 지금 창극의 전성시대를 이끄는 이유일 것이다.

글. 최여정 문화평론가.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다음엔 아무것도 못 쓰겠다』 『이럴 때, 연극』 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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