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기행

국립극장 송년판소리 안숙선의 ‘흥보가’
참으로 사모하고 그만큼 사랑받아 온 60여 년 소리 인생
국립극장 송년판소리 안숙선 명창

국립극장 완창판소리, 2021년 마지막 무대는 ‘송년판소리’로 꾸며진다. 지난 2010년부터 해마다 이 무대에 서고 있는 안숙선 명창이 올해는 만정제 ‘흥보가’로 지나온 한 해의 희로애락과 새해의 희망을 노래한다. 공연에 앞서 서울 강남구 헌릉로 자택에서 안숙선 명창을 만나보았다.

60여 년 한길, 어느덧 일상인 소리
안숙선 명창

아담한 체구에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 자칫 부딪히면 부서질까, 쫑긋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야기를 놓칠까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무대 위의 안숙선 명창은 누구보다 단단하고 옹골차다. 덕분에 그녀의 일정은 아이돌 스케줄을 방불케 한다. 연이은 공연에 각종 시상식 등으로 인터뷰도 간신히 진행할 수 있었다.

“나이 든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시간이 날 때면 이렇게 얘기도 나누고 뭔가 남겨 두려고 하니까 바쁘게 보이네요. 병원에서 건강에 유의하라고 하고, 주변에서도 걱정을 많이 하는데, 제가 거절을 잘 못해요. 또 어떤 잡지에 우리 국악이 빠져 있으면 ‘왜 이 책에는 국악에 대한 소식이 없어!’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참여하는 편이에요.”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인 안숙선 명창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2021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8세에 이모 강순영 명인에게 가야금을 배우며 국악의 길에 들어섰고, 19세에 고(故) 만정 김소희 문하에서 판소리를 공부하며 60여 년 한길을 걸어왔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상을 받았을까. 집에 들어서니 문득 상패나 메달 등을 진열해 놓은 공간이 따로 있는지, 또 경중을 떠나 어떤 상을 받았을 때 가장 기뻤는지 궁금했다.

“그동안 열심히 하라고 상도 주시고 격려도 해주셨어요. 너무 많아서 저희 식구들이 2층에 따로 공간을 마련해 주기도 했고요. 우리 문화예술 분야에서 ‘저 사람은 잘한다’고 상을 주시면 가장 값지죠. 저도 공연을 하지만, 선뜻 ‘네가 제일 잘해’라고 마음먹기가 쉽지 않잖아요(웃음). 그러니 같은 분야의 선후배들이 ‘너는 상 받아 마땅하다’고 얘기해 주면 뛸 듯이 기쁘죠.”

화려한 상패와 메달은 없지만, 한켠에는 병풍이 들어선 아담한 무대, 또 다른 한켠에는 줄지은 가야금이 빼곡한 이곳이야말로 안숙선 명창의 색이 가장 짙은 공간이 아닐까 싶다. 20여 년 전 집을 지으며 사랑방처럼 음악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꾸몄다.

“50세쯤 겁 없이 마련했어요. 와서 소리도 하고 춤도 추고, 국악의 참모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해서. 작품을 몇 번 만들어봤는데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어요. 보통 공연할 때 저는 노래만 부르고 다른 건 스태프들이 알아서 해주는데, 그걸 다 챙기려니 어렵더라고요. 40~50명 고즈넉하게 앉아서 소리 듣고 국수 먹고, 그렇게라도 해보고 싶은데… 잘되겠죠(웃음).”

국립극장과의 깊은 인연, 2021년 마지막은 ‘흥보가’로

“29살에 시험 봐서 국립극장에 들어갔는데, 그 언저리를 지금도 못 떠나고 있잖습니까(웃음)!”

안숙선 명창과 국립극장의 인연은 각별하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그녀는 1986년 처음으로 국립극장 완창판소리 무대에 선 뒤 30여 회나 출연한 최다 출연자이며, 국립극장에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완창한 유일한 소리꾼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1998년부터 1999년, 그리고 2001년부터 2005년까지 국립창극단장·예술감독을 역임했고, 2010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송년판소리’ 무대에 서 왔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코로나19 감염증’으로 그 각별하고 친숙한 무대가 사라졌다.

안숙선 명창

“상당히 허망했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무대에서 보여주고,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 게 공연인데, 이런 것도 없고 저런 것도 없고, 허허벌판에 서 있는 듯했어요. ‘내일이면 괜찮겠지….’ 그렇게 2년이란 세월이 지났더라고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인해 우리 하는 일이 이렇게도 바뀔 수 있구나’ 하고 깜짝 놀랐죠.”

지난해 설 수 없었던 무대인 만큼 올해 ‘송년판소리’에 더욱 마음을 기울였다. 만정제 ‘흥보가’와 함께 정미정·김미나·박애리·김준수 등 제자들의 남도민요도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공연이다.

“원래 우리 판소리가 소리꾼이 한바탕 끝내고 나면 판의 흥을 돋우기 위해 나와서 민요도 하고 흥타령도 하고, 또 소리 듣고 나와서 남원산성도 하고. 그렇게 부르는 노래 가짓수가 참 많아요. 소리가 어떻게 흘러가고, 누가 어떤 소리를 더 잘하는지 볼 수 있는 긴장감이 있죠. 소리 한 자락, 가사 한 소절, 음 하나하나가 다 만정 선생님의 혼이고 발자취니까. 선생님이 하시고자 하는 소리와 몸짓을 저희가 대신해 드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죠.”

올해 ‘흥보가’를 선택한 이유는 우리와 친숙한 이 이야기에 삶의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맛을 느끼기에 ‘흥보가’만큼 딱 들어맞는 작품도 없어요. 박을 탔는데 어떻게 그 속에서 돈이 나오겠어요. 사람들을 깜빡 속이는 건데 재밌기도 하고, 문장도 어렵지 않고, 인물들도 친근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본분을 잊지 않는 흥보와 흥보 마누라, 본분을 잊어버린 놀보와 놀보 마누라, 또 다른 사람들. 어쨌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마음 좋게 쓰고 잘 살라는 얘기잖아요(웃음).”

우리 국악이 더 관심받고 사랑받기를

60여 년의 소리 인생을 걸어오며 숱하게 접한 ‘흥보가’이지만, 2021년은 유난히 다채롭게 만나기도 했다. 지난 9월 국립창극단이 선보인 ‘흥보展’ 작창에도 참여했기 때문이다. ‘송년판소리’에서 선보이는 만정제 ‘흥보가’가 전통 소리의 결정체라면 허규의 ‘흥보가’(1998)를 원작으로 현대적인 변주를 더한 ‘흥보展’은 대형 LED 스크린을 채우는 영상과 색다른 세트 등으로 제목 그대로 마치 한 편의 전시회 같은 무대를 선보였다.

“판소리의 원형을 다채롭게 무대화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무대에 다양한 영상이 펼쳐지는 무대를 꾸며봤는데,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작창하면서는 틀리면 어쩌나 조바심도 나고, 이제 그만해야겠다 싶다가도, 또 한편으로 ‘콩쥐팥쥐’나 ‘백설공주’ 등을 창극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클래식과 만나면 어떨까, 끊임없이 생각하게 돼요. 물론 무형문화재라는 제도를 통해 우리 전통의 소리는 잘 지켜야 하고요.”

소리꾼 중에서는 인지도 높은, 이른바 스타 명창인 그녀에게 소리의 뿌리를 지키되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리는 것은 오랜 소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이나 시도에 거부감을 보이기보다는 국악을 모든 사람이 즐겼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다가섰다.

“너무 어렵게 ‘나는 안 해’라는 것도 맞는 대답일까 생각될 때가 있죠. 색다른 무대를 보면 재미도 있잖아요. 재밌다고 몇 년 빠져 있다 돌아올 수도 있고. ‘범 내려온다’(이날치) 부른 학생이 ‘선생님, 우리가 이렇게 붐을 일으켜놓고 나중에 제대로 할게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저도 재즈 밴드나 외국인들과도 공연을 해봤잖아요. ‘아, 서양에서는 저렇게 맛을 내고, 우리는 이런 맛이 있구나!’ 하고 오히려 서로를 알게 되더라고요.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러니 지금 한번 놀게 내버려 둬라, 제 발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속 우리의 모습을 잃지 않고 발전시켜 나가는 방법을 고민해야죠.”

안숙선 명창

안숙선 명창은 인터뷰 내내 국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내비쳤다. 우리 음악을 훼손하지 않고 진지하게 이어갈 후배들이 많다며 기대와 많은 관심을 당부하기도 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음악이 살면서 겪는 희로애락을 다른 장르보다 진하게 담고 있어요. 우리 선조들 멋쟁이들이다, 어떻게 이런 가사를 만들어내고, 또 어떻게 그 가사를 곡에다 얹었는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저야 이렇게 나이를 먹고, 그래서 또 다른 판을 벌이기는 참으로 어려울 테지만, 우리 후진들, 국악이 더 관심을 받고, 많은 분이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시면 좋죠.”

‘송년판소리’ 객석을 찾지 못하는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짧은 송년 메시지도 전한다.

“우리가 힘든 코로나 상황을 겪으며 이렇게 가고 있잖습니까. 뒷산에 갔다 내려오는데 여기저기서 뚝닥뚝닥 소리도 나고, 비행기 소리도 나고, 다시 사람 사는 세상 같더라고요. 아주 어려운 고비는 넘겼으니까, 지금 상황을 어떻게든 잘 헤쳐 나가서 더 좋은 살길을 만들까, 굉장히 많이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잘못된 것은 반성도 하고. 새해에는 그랬으면 좋겠어요(웃음).”

안숙선 명창
안숙선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병창 및 산조 보유자
약력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제82회 춘향제전위원회 공동위원장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 위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성악전공 교수
국립창극단장 및 예술감독
사사
강도근·김소희·박귀희·정광수·박봉술·정권진·성우향
수상 내역
1986 제13회 남원 춘향제 판소리명창경연대회(현 대한민국춘향국악대전) 대통령상
1987 KBS국악대상 대상
1993 제25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8 프랑스 문화부 예술문화훈장
1999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
2008 동리대상
2013 만해 문예 대상
2013 방일영국악대상
2015 삼성행복대상
2019 성옥대상
2021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글. 윤하정 사직서 내고 유럽 공연 기행 떠난 전 방송기자, 공연 전문 인터뷰어. 투어 이후에도 ‘유럽여행’ ‘문화예술’을 키워드로 말하고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의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을 펴냈다
사진. 박정훈 사진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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