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장애와 무장애, 경계를 넘어선 예술의 확장:
왜 지금 장애예술인가?
원고 청탁을 받고 잠시 망설였다. 장애예술의 국내외 현황이라는 주제가 너무 폭넓고 복잡하기도 하고, 나의 시선에 대한 확신이 없기도 해서였다. 되돌아 보면 최근 몇 년간 이 주제에 관심을 갖고 보아온 것은 사실이라 소회 수준에서 써보기로 하겠다. 모든 정의가 그렇듯 ‘장애’예술이란 단어도 한 가지로 수렴되기 어렵고, 비장애 예술이라는 대립 항과 구분되어 존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논의의 편의성을 위해 장애예술이라는 단어를 포괄적으로 사용하겠다. 또한 장애예술이 지금 동시대 예술에서 갖는 위치와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마주친 (장애)예술

2011년 서울. 2008년 호주공연예술마켓(APAM)에서 핫한 공연 중 하나는 늦잠을 자느라 놓쳐버린 백투백시어터(Back to Back Theatre)의 ‘작은 금속 물체: Small Metal Object’였다. 이른 출근 시간 분주한 기차역을 무대로 펼쳐지는 장소 특정적 공연이었는데, 새로운 미장센과 접근으로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3년 뒤 한국 관객은 그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서울역 계단에 앉아 있는 100여 명의 관객을 지나가던 시민들이 멀뚱히 쳐다보고, 헤드폰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배우를 찾느라 관객은 역 안을 이리저리 훑어본다.

2013년 대전. 제롬 벨(Jerome Bel)이 동시대 무용 신(scene)을 악당처럼 치고 나갈 즈음 ‘모두를 위한 춤: Disabled Theatre’으로 한국 관객의 마음을 스윽 훔친다. 그가 스위스 장애인 극단 호라(Hora)와 협업한 작품이었는데, 제롬 벨 특유의 기술로 신나는 팝송과 그들이 펼치는 무정형의 움직임을 뒤섞어 놓았다. 춤에 대한 개념이 여지없이 깨져버린 순간이었다.

2014년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 기간 분주히 공연을 보던 중 우연히 만난 클레어 커닝햄(Claire Cunningham)의 ‘그림자 연인: Menage A Trois’은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워 준 작품이었다. 무뎌진 감정을 다시 불 지피며 아름답고 절절하게 건네는 손길을 따라 무대 뒤로 찾아갔다. 조그마한 키의 클레어는 목발을 짚은 채 담담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한국 공연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무산되었지만 한동안 그녀의 이름은 비수처럼 마음에 남았다.

그간 내가 마주친 (장애)예술에 대한 기억을 대략 되짚어 본 것이다. 당시에는 장애예술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 예술 현장에서 주목받는 작품들이었다. 몇 년이 지나 다시 장애예술을 마주한 곳은 대학로에 새로 들어선 장애인문화예술원(이하 장문원)이었다. ‘이음 해외공연 쇼케이스’라는 제목으로 영국 작품 3편이 올라갔다. 별 기대 없이 조 베넌(Jo Bannen)의 ‘시선:Exposure’이라는 공연을 보고 복도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이윽고 작은 방으로 안내되어 그녀와 일대일로 마주 앉아 10여 분 동안 대화를 나눈다. 나중에야 깨닫는다. 그녀는 백색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고, 그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편견에 대해 마주할 기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다음 날 기대를 품은 채 댄 도우(Dan Daw)의 작품을 보려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100여 석의 객석에 빼곡히 앉은 관객들 사이로 긴장감이 흘렀다. 심상찮은 눈빛과 포스로 무대에 등장한 그는, 느릿하고 분절된 그만의 페이스로 천천히 움직인다. 옷을 벗고 다시 입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무용에 대한 생각을 깨기에 충분할 만큼 ‘쎈’ 공연이었다.

장애예술의 무늬

이후 장애예술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게 되었다. 이리저리 사이트도 뒤져보고 장문원 심사도 하면서 작품들을 보기 시작했다. 영국 출장에 동행해서 스톱갭(Stopgap) 컴퍼니, 에턴버러 극장(Attenborough Centre for the Creative Arts) 등을 방문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영국은 2012년 런던 올림픽을 계기로 장애예술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인 지원을 시작했다. 언리미티드(Unlimited) 축제 등을 통해 장애예술의 장을 확장해 가면서, 동시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지원하는 주요 기관에 대해서 장애예술에 대한 감수성을 평가 항목으로 포함하는 등 구조적인 변화를 유도하는 정책이 공존했다.

나의 호기심은 거기서 멈추기는커녕 더 커졌고 결국 유럽으로 향하게 이끌었다. 최근 동시대 예술에 대한 갈급함, 특히 장애예술의 위치와 맥락이 궁금했다. 다행히 베를린의 노리미츠 축제(No Limits in Berlin)가 열리는 기간이어서 가까이서 그들을 만나고 작품을 볼 기회를 가졌다. 2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축제의 명성에 걸맞게 장애예술의 다양한 협업과 담론을 생산하고 있었다. ‘장애’라는 단어는 ‘할 수 있는(abled)’, ‘장벽을 넘어선(unlimited)’을 지나 ‘크립(crip)’이라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었으며, 클레어 커닝햄의 렉처 퍼포먼스, 신진 예술가들의 쇼케이스, 장애 당사자가 연출하고 출연하는 호라(Hora)의 신작 등이 연일 펼쳐졌다.

김원영의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김원영의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왼쪽 사진부터 ⓒ이지양,ⓒ박동명

두 달여간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한국의 ‘장애’예술을 찾아보기로 했다. 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예술가가 활동하고 있을 터지만, 장문원 지원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본 바로는 큰 변주가 있지는 않았다. 지난 20여 년간 장애운동과 더불어 성장해 온 단체들을 중심으로 사업들이 지속되고 있었고, 신진 예술가들은 최근에야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아 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김원영의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은 서울변방예술제에 초연되어 백상예술대상 후보에 올랐다. 옐로우닷컴의 문승현은 ‘흐르는 벽으로 대화하기’ 등을 통해서 새로운 문법을 천천히 그러나 끈질기게 시도하고 있다. 아트엘의 노경애는 아마추어·어린이·노인 등과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듣다’ 시리즈는 리서치를 기반으로 장애인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과정 중심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더 다양한 시도와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안정민이 연출한 낭독 공연, ‘물속에서 나는 무게가 없어:In Water I’m Weightless’는 그녀만의 섬세한 존재감과 여운을 남겼다.

노경애의 ‘듣다’ 노경애의 ‘듣다’
왜 지금 장애예술인가?

그렇다면 질문이 남는다. 왜 지금 장애예술인가? 동시대 예술계에서 장애예술은 어디쯤 있고 어떤 면에서 유효한가? 누군가가 나에게 “그래서 왜 장애예술에 주목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난해한 질문이라 살짝 비틀어 예를 들어 살펴보겠다. 백투백 시어터의 ‘가네샤 대 제3제국: Ganesh Versus the Third Reich’ ‘데이비드 툴(David Toole)’ ‘키아라 베르사니(Chiara Bersani)’의 같은 듯 다른 포지션을 비교하면서 질문에 답해 보려 한다.

백투백 시어터는 멜버른 시외의 작은 커뮤니티 센터에서 1980년대 탈(脫)시설 운동과 함께 탄생해서 지난 30여 년간 활발히 작품을 이어오고 있는 단체다. 성, 권력, 자본주의 등 그들이 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묵직하면서도 특유의 위트가 공존한다. 이런 이중성과 모호함이 그들을 동시대 예술 현장에서 독보적 위치를 갖게 하는 것 같다. ‘가네샤 대 제3제국’ 역시 홀로코스트라는 주제를 놓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질문한다. 여러 개의 서사가 겹을 이루어 볼수록 또 다른 시선이 느껴지는 수작이다. 작품의 말미에서는 당신도 가해자일 수 있다는 일침을 가하며 관객을 몹시도 불편하게 만든다.

백투백의 ‘가네샤 대 제3제국’ 백투백의 ‘가네샤 대 제3제국’

데이비드 툴은 캔두코(Candoco), 디브이에이트(DV8) 등을 거쳐 스톱갭에서 활동 중인 영국의 대표적 무용가이다. 최근작 ‘커다란 방:The Enormous Room’을 초청하려고 접촉 중이었는데, 그가 몸이 좋지 않다는 답신을 받았다. 얼마 후 그는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댄스필름 ‘인위적인 것들:Artificial Things’에서 전해 오는 그의 눈빛에서는 세상의 편견 따위에 지지 않겠다는 결기와 힘이 동시에 느껴졌다. 26세에 우연히 참가한 워크숍을 통해 우체국을 그만두고 무용을 시작한 그의 커리어는 가히 전방위적이다. 몸을 아껴 오래도록 썼으면 하는 바람을 뒤로한 채, 그는 온몸을 던져 ‘불꽃처럼’ 살다 갔다는 표현으로 남을 예술가이다.

그에 비해 키아라 베르사니의 포지션과 전략은 조금 다르다.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으로 전해 오는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과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그녀가 작품 속에서 보이는 당찬 눈빛과 정제된 몸짓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그녀는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 자체를 무효화시키며, 몸이 가지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무대 위에서 날것으로 드러내 보인다. 팬데믹 이후에 꼭 한국 관객과 직접 눈을 마주치는 기회가 생기길 바라본다. 유니콘 시리즈부터 최근 코로나 시대를 함께 헤쳐가는 연대의 희망을 보여주는 오디오 퍼포먼스 ‘연결된 우리: Cordata Longa’까지 그 폭과 깊이가 넓고 깊다. 그녀는 최근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공연하는 등 이미 ‘주요한’ 동시대 예술가이다.

키아라 베르사니의 ‘Gentle Unicorn’ 키아라 베르사니의 ‘Gentle Unicorn’

하기야 뭐가 더 의미를 갖는지는 이제 이슈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모든 시각이 다 의미를 갖는 것이니까, 어쩌면 어떤 시각인지에 더 관심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혼란과 팬데믹 시대에 예술이 갖는 의미는 더 각별히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는 뮌헨 카머쉬필레(Kammerspiele) 단원에 장애인 배우가 있다는 둥, 장애인의 성이 비장애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둥, 트랜스젠더 여성 장애인 예술가의 시각이 주류 남성 장애인과 비견할 만하다는 등의 의미는 이슈를 넘어서 다르게 읽혀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지구인 중에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할까? 유럽에서, 미국에서, 호주에서, 아시아에서, 한국에서 동시대 예술에 관심을 갖는다면 장애예술과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이 사선에 서서 바라보는 지점에서 주는 영감은 지금처럼 혼돈의 시대에 더 밝게 빛날 테니까.

글. 성무량 공연 기획자. 서울국제공연예술제와 대전예술의전당에서 일했고, 지금은 다양성과 포용적 측면의 공연예술에 관심을 기울이며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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