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하나

해학과 풍자의 한국 전통예술
웃음으로 과거와 미래를 잇다

웃음은 우리의 의식과 몸,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적으로 어떤 것에 감응되어 나오는 현상이다. 우리는 무언가가 마음에 들거나 흥미롭거나 재미있다고 느낄 때, 그러한 감정을 채 지각하기도 전에 이미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웃음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기에 일단 한 번 터져 나오면 추스르기도 힘들다. 참아보려 할수록 그것은 오히려 더욱더 우리 몸을 휘감는다. 또 전염성도 매우 강하다. 누군가 옆에서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같이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웃음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듯, 누군가를 웃게 하는 일도 결코 쉽지 않다. 일단 웃기는 자와 웃는 자 모두 같은 코드를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를 웃게 하려는 노력은 미소가 아니라 냉소를 불러오기 십상이며, 때로는 아무 감흥도 줄 수 없거니와 오히려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다. 또 한바탕 크게 웃다 보면 부정적인 기분이 떨쳐지는 치유 효과를 경험하기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웃게 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숭고한 일로 생각되기도 한다.

나와 너, 우리를 품어주는 따뜻한 시선
일러스트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에 등장하는 말뚝이 탈 ⓒ국립민속박물관

우리 전통예술 속에서 웃음은 지배층의 위선이나 허위의식을 공격하고 까발리는 장치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풍자적 웃음의 선봉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봉산탈춤이나 산대놀이·오광대·동래야류 등 대부분의 가면극에 등장하는 말뚝이다. 그 대단한 양반도 말뚝이 앞에서는 한낱 “개잘량이라는 양자에 개다리소반이라는 반자 쓰는” 인물로 전락한다. 말뚝이가 양반을 마음껏 희롱하며 웃음거리로 삼는 동안 민중은 지배층에 대한 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공동체 차원의 긴장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세계’라는 책에서 농담, 즉 유머가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서도 쓰일 수 있다고 지적했지만 우리 전통예술 속에서 웃음은 결코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아프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상을 위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산을 지키는 영물이기도 했지만 민가에 자주 출몰해 사람을 해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우리 설화 속에서 호랑이는 엉뚱하게 곶감을 무서워하거나 민화 속에서는 다소 바보스러운 몰골로 등장해 웃음을 유발한다. 이를 보고 있자면 어느새 두려움이 가시고 호랑이가 조금은 친숙하게 느껴진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은 그것을 해치거나 없애버리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긍정하고 삶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있다.

국립창극단 대표 레퍼토리인 창극 ‘배비장전’의 주인공 배선달은 제주 신임 목사 김경의 비장직을 맡아 제주에 내려온 인물이다. 그는 전임자인 정비장이 기생 애랑에게 홀딱 빠져 각종 귀한 선물을 모두 바치는 것도 모자라 입고 있는 옷까지 탈탈 벗어주고 떠나는 모습을 목격한다. 자신은 결코 저런 한심한 짓을 하지 않겠노라 큰소리를 쳤지만 이러한 꼿꼿함은 애랑의 유혹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애랑과 방자, 김 목사가 배비장을 골리기 위해 합작해 짜놓은 덫에 걸려든 그는 급히 몸을 숨겨야 하는 긴박한 순간에도 선비로서 체신을 지키려 문자를 줄줄 읊어댄다. 그가 위기를 모면하러 숨어든 궤짝이 사또 전으로 옮겨지자, 궤짝에서 벌거벗은 채 밖으로 나와 공개적인 망신을 당하고 만다.

‘배비장전’의 내용은 판본에 따라 배비장이 웃음거리가 되는 장면에서 끝나기도 하고, 또는 그 후에 배비장이 제주를 떠나려 하자 애랑이 그를 붙잡거나, 배비장이 벼슬을 보상받기도 한다. 어찌 됐든 모두 망신당한 배비장을 ‘위로’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는 배비장을 냉대해 공동체 집단 밖으로 내치고자 하는 공격적 의도보다는 오히려 다시 공동체 안으로 품어주고자 하는 애정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배비장전’의 웃음은 결코 완벽할 수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긍정이다.

일상으로부터 일탈하는 자유

사실 ‘배비장전’은 19세기 말까지 판소리 ‘배비장타령’ 또는 ‘배비장가’로 연행되었지만, 소리는 전승되지 않은 채 사설만 전해지는 ‘실창판소리’이다. “웃음으로 눈물 닦기”라는 표현처럼 주요 판소리 작품들의 스토리가 정서적 부침을 균형 있게 갖추고 있는 데 비해, ‘배비장전’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실창하게 된 것이라 여겨진다. ‘흥보가’는 흥보 내외가 가난을 이겨내기 위한 사투를 벌인 끝에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로 경사를 맞이하고, ‘심청가’는 심청과 심봉사의 피눈물 나는 생이별이 기쁜 재회로 보상받는다. ‘배비장전’에서는 이러한 감정적 파도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리를 잃은 ‘배비장가’는 오히려 창극으로 변모해 어떤 작품보다 더 자주 무대화되어 사랑받고 있다. 1962년 창립한 국립국극단(현 국립창극단)은 창립공연인 ‘춘향전’과 2회 공연 ‘수궁가’ 이후 3회 정기공연으로 ‘배비장전’을 택했다. 이후 ‘배비장전’은 새로운 인물이나 극적 설정을 더해 꾸준히 무대에 올랐고, 높은 객석점유율을 기록해 오며 국립창극단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배비장전’의 재미는 배비장의 훼절을 걸고 하는 애랑과 방자, 김 목사의 내기나 배비장을 속이기 위해 모두가(심지어 관객까지!) 공모하는 구도 속에서 빚어진다. 내기나 공모를 통해 누군가를 속이는 이야기는 소화(笑話)라고 일컫는 우스갯소리에 가까운 설화에서 자주 발견된다. 예부터 우리는 방학중, 박문수, 김선달, 꾀보 하인 등 평범한 인물이 남을 속이거나 반대로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이야기를 아주 흔하게 즐겨왔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사회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한 전복적 웃음보다는 그저 경직된 일상에서 벗어난 휴식, 즉 우스운 이야기 자체를 한바탕 즐기고자 하는 일탈적 웃음을 만들어준다.

국립극장 마당놀이,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공연 사진 국립극장 마당놀이,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공연 사진

배비장이나 애랑도 우리 고소설(古小說)에서 볼 수 있는 재자가인형(才子佳人形)의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충실한 현대인과 더 가깝다. 이들은 사색적이지 않고 즉각적이며, 자신의 정감이나 욕망이 어떤 것을 향해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이며 그래서 결코 완벽하지 않다. 이들이 고상하고 엄숙한 일상적 규범에서 벗어나 겪는 특별한 사건은 그 자체로 흥밋거리가 되며 일탈적 쾌감을 준다.

물론 그 외에도 창극 ‘배비장전’에서 찾을 수 있는 웃음 포인트로는 무대 위 화려한 볼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화려한 복색을 한 기녀들, 작품의 배경인 제주도의 색채를 살린 민속 춤사위와 민요는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흥을 더한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공연이 선사하는 재미는 그 자체로 충분한 만족감을 준다.

얼마 전 ‘개그콘서트’가 막을 내리면서 우리 사회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이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코미디는 유튜브 등 새로운 매체에 적응해 오히려 더욱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아이디어로 신선한 웃음을 빚어내고 있다. ‘너무 웃기기만 해서’ 소리를 잃었다는 ‘배비장전’은 창극으로 새 생명을 얻어 오히려 그 웃음 때문에 승승장구하고 있다. 전통의 맥을 잇는 동시에 미래로 나아가는 웃음의 역사는 이미 ‘배비장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최근 방탄소년단은 신곡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를 통해 경직된 팬데믹 시대에 춤만큼은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 없이 자유롭게 출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허락이 필요 없는 것은 비단 춤뿐만이 아닌 것 같다. 마스크를 쓰고 있다 해도 터져 나오는 흥과 웃음은 참을 수 없다. 창극 ‘배비장전’을 통해 잠깐이라도 마음껏 그리고 함께 웃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국립극장 마당놀이 공연 사진 국립극장 마당놀이 공연 사진
글. 이채은 판소리 연행의 의미화를 몸의 관점에서 살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전을 통해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글을 읽고 쓰고 있다
<월간 국립극장> 구독신청 <월간 국립극장> 과월호 보기
닫기

월간지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 구독 신청

뉴스레터 구독은 홈페이지 회원 가입 시 신청 가능하며, 다양한 국립극장 소식을 함께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또는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편리하게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회원가입 시 이메일 수신 동의 필요 (기존회원인 경우 회원정보수정 > 고객서비스 > 메일링 수신 동의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