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하나

국립극장 공연예술 평론 공모
평론은 ‘기록’이고 ‘기획’이고,
창작을 위한 ‘기운’이다
신설된 국립극장 공연예술 평론가상 소식이 반갑기만 하다. 이 글은 공모를 통해 2022년 당선작과 함께 세상에 나올, 아직은 알 수 없는 미래의 공연예술 평론가에게 보내는 글이다

나는 처음에 공연예술을 글로 배웠다. 그 글이란 대부분 비평가나 평론가가 쓴 것이었다. 사실 그때는 ‘평론’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내가 보고 싶은 공연이 있었지만,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주머니 사정상 보지 못했던 아쉬움을 KBS 1FM의 생중계나 EBS ‘예술의광장’, KBS ‘국악무대’, 그리고 여러 평론가가 쓴 글들로 달래곤 했다.

평론은 개안(開眼)이다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매월 발행한 ‘문화예술(文化藝術)’에는 양악·국악·연극·무용 등의 전문평이 실렸고, 얇은 판형에 가격도 적당했다. 글들은 내가 보지 못한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설령 공연을 보았더라도 어린 나이에 간과한 요소들을 되새겨주고 알려주는 평론가들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지금 필자가 재직 중인 ‘월간객석’의 평론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윤중강 평론가가 2000년 6월호에 기고한 ‘소리의 이면과 각진 ‘계단’의 불협화음’이라는 글이다. 국립창극단이 선보인 완판 창극 ‘수궁가’에 관한 글이었는데, 고등학생이던 나는 이 글로 인해 음악이 주가 되는 창극에서 ‘계단’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번 무대는 ‘수궁’과 ‘산중’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같은 계단을 사용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막이 올라가고 보여진 이 계단에서 실망은 시작되었다. ‘계단’, 그것은 도저히 판소리나 창극과는 어울리지 않는 발상이다. 창극이란 것이 ‘소리’에서 출발한 ‘극’이라면, 그 모든 부수적인 극적 장치들도 소리를 효과적으로 잘 표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단언컨대 한국적인 소리는 ‘계단’과는 거리가 멀다. (…) 판소리와 창극에서는 ‘이면’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그 대사, 연기, 무대, 소품, 의상, 분장 등도 모두 ‘소리의 이면’에 맞아야 사실성과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 이런 계단이 창극 배우들의 소리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배우들이 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소리를 하고 있으나, 소리를 하는 그들도 객석에 앉은 청중들도 모두 편치 않다. 창극이 극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창극이나 오페라를 같은 음악극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오페라의 주역들을 연기로도 감동을 받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노래’에서 감동받는다. 내 눈에 비친 몇몇 창극배우들의 시선은 자주 오르내리는 계단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혹시 계단을 오르내리다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으로.”

당시 나는 이 글의 ‘독자’ 이전에 이 공연을 직접 본 ‘관람객’이었다. 관람객으로서의 나는 이 계단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 글로 인해 무대에서 ‘들려오는 것’ 외에 ‘설치된 것’을 두루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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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은 씨, 창작은 꽃이다

평론은 공연에 관한 ‘이야기’이자 ‘해설’이며, 동시에 공연을 전문적으로 보는 자만의 ‘시선’이 담긴 글이다. 개인적으로 공연에 관한 진한 취미와 진화된 시선은 ‘초보자를 위한 ○○○○’ 부류의 친절한 해설서보다는 명확한 시선이 담긴 평론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이러한 시선은 주관의 산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그 시선은 작품의 묘미를 빨아들이는 ‘나만의 빨대’가 된다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공연 뒤에 작품을 둘러싼 평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나의 작품을 둘러싼 평론가들의 수군거림과 떠듦. 나는 이것이 담론(談論)이라 생각한다. 공연장의 관람객이 평론의 독자가 되어 자신을 이러한 담론의 수풀로 즐겁게 밀어 넣는 것. 이것이 공연을 둘러싼 좋은 생태계이자, 작품 생산과 비평을 공존하게 하는 좋은 방식일지도 모른다.

작품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과 시선은 관객뿐만 아니라 예술가에게도 필요하다. 예술가나 평론가는 각자의 생산물을 낳는 방식은 다르지만, ‘시선’과 ‘안목’으로 먹고사는 부류라는 점에선 같다. 그 안목이 독특하면 독특할수록, 동시에 보편적인 타당성과 설득력을 지닐수록 작품과 평론은 진가를 발휘한다. 새 작품을 앞두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선별·선택한 소재를 갖고 예술가는 기를 쓰며 가건물을 세우고, 평론가는 그 집(작품)에 들어가 이를 악물고 점검과 진단을 한다. 그리고 예술가의 깐깐한 생산과 평론가의 꼼꼼한 검토의 교차로에서 작품과 평론은 생명력과 영구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작품의 탄생 뒤에 행해지는 평론 행위는 후속 작업에 속하지만, 그 기록과 진단이 작업 구상을 앞둔 예술가의 참고 노트가 될 때, 평론은 작품을 낳는 여러 씨앗 중 하나가 된다고 생각한다. 평론은 씨, 창작은 꽃인 셈이다.

‘월간 문화예술’ 2001년 7월호, ‘월간 객석’ 2000년 6월호, ‘공간’ 창간호

‘월간 문화예술’ 2001년 7월호, ‘월간 객석’ 2000년 6월호, ‘공간’ 창간호

평론은 미래를 위한 기록이다

평론은 기획이자, 동시에 기록이기도 하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잡지 ‘공간(空間)’과 만났다. 은사의 연구실에 들락날락하며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이 잡지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건축가 김수근이 1966년에 창간한 잡지에는 소극장(공간사랑)에 오른 공연에 대한 꼼꼼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공간사랑은 1978년 사물놀이가 첫선을 보인 곳이다. 이를 비롯해 음악·연극·무용 등 실험의 옷을 입은 소극장 공연물에 대해 음악평론가 박용구, 작곡가 이건용, 무용평론가 김태원 등이 현장을 기록했고, 의미의 문장을 새겨 넣었다. 한마디로 이 잡지에는 음악·전통예술·무용·연극·미술 등 한국 예술을 설계하는 데 참조해야 할 사례와 경험, 공연이 몽땅 담겨 있던 것이다. 실제로 실험 보고서와도 같았던 그 기록들은 1980년대에 확장하기 시작한 ‘한국적 예술’을 낳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평론가로서 기록을 남기고, 기록을 들추는 일은 중요하다. 좋은 평론은 과거를 담은 훌륭한 기록이자, 오늘과 내일을 읽는 사유의 프레임이 되기 때문이다. 평론가를 꿈꾸던 나도 음악·무용을 망라한 박용구 선생이 남긴 ‘기록으로서의 평론’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으며, 오늘을 읽는 시선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 객석예술평론상에 투고할 원고를 준비하던 내가 고민한 것은 인터넷 문화가 둘러싼 음악의 현실과 생태계의 변화, 그리고 이러한 세속의 변화를 읽어낼 새로운 평론적 시선의 필요성이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그 현상이 가시화됐지만, 그 원고를 준비하던 당시에 인터넷 문화와 미디어 기술이 빚어내는 새로운 음악적 공간·장소의 출현과 그로 인해 태어나는 새로운 청중의 존재가 신기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음악평론이란 공연장에서만 가동되는 글쓰기가 아니라, 일상에 음악을 퍼뜨리는 모든 미디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여러 평론가의 글과 평론집을 찾아 읽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온도의 글은 아니었다. 모두가 인터넷 문화가 없던 시절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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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의 영원한 속성, 변화하는 속세 속의 평론

그러던 중 접한 것이 박용구 선생이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남긴 글이었다. 선생의 시선은 남달랐다. 인터넷 문화 이전에 전파(라디오)와 미디어(오디오)를 통해 등장하는 음악 풍경에 대해 남긴 선생의 글은 마치 오늘을 예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시대에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하는 생각 반, 놀람 반으로 선생의 글 조각들을 맞춰보았다. 평론을 업으로 삼은 전사(戰士)의 탄생은 노장이 일군 전사(前史)에 빚질 수밖에 없다는 믿음으로 투고작을 쓰고 또 썼다.

정리해 본다. 평론은 기록과 기획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평론의 ‘속성’은 변치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이 믿음으로 보고 읽고 쓴다. 하지만 평론을 둘러싼 공연예술계의 ‘속세’는 꾸준히 변화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속성’과 변하는 ‘속세’ 사이에서 새로운 평론가는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변하고 있는 오늘날의 속세는 어떠하며, 그 안에서 평론가는 어떠해야 하는가. 예술과 예술이 각자의 장르적 속박에서 벗어나 진하고 빠르게 만나고 있다. 그러니 자신의 전공 외에 다른 예술도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공연예술은 비대면 온라인 공간으로 옮겨가며, 제3의 공연 공간을 만들고 있다. 영상기술은 단순한 기록 차원을 벗어나 공연을 새롭게 읽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진화 중이다. 예술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소셜미디어 속 정보와 또 다른 차별성과 시선, 재미를 갖추는 것도 평론의 운명이 되었다. 한마디로 평론의 대상과 문법, 시선이 변해야 하는 시점이다. 신설된 국립극장 공연예술 평론가상을 통해 이러한 것을 갖춘 새로운 평론가가 나오길 바란다.

글. 송현민 음악평론가, 월간객석 편집장. ‘한반도의 르네상스’를 주장했던 음악평론가 박용구론으로 제13회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고,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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