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변화를 주도하는 뉴그레이
봄을 움틔우는 은빛 물결
변화와 혁신을 이끄는 주인공이 늘 젊은 세대일 거라는 생각에 물음표를 던져도 좋다. 나이 듦을 멋으로, 연륜을 가치로, 관용을 다채로움으로 승화시키는 은빛 청춘의 활약이 눈부시다. 시니어 세대로부터 태동하는 문화현상 및 액티브 시니어의 문화예술 경험의 가치를 짚어본다.
그레이 이즈 더 뉴 핑크(Grey is The New Pink) ©Weltkulturen Museum 2018

그레이 이즈 더 뉴 핑크(Grey is The New Pink) ©Weltkulturen Museum 2018

팔과 어깨에 필리핀 전통 칼링가 문양을 새긴 여인이 잎담배를 물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제이크 베르조사Jake Verzosa) 강렬한 흑백사진 작품은 2018년부터 2019년 1월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세계문화 박물관Weltkulturen Museum에서 1년간 전시한 ‘그레이 이즈 더 뉴 핑크Grey is The New Pink’의 포스터다.
<칼링가의 마지막 문신을 한 여인The Last Tattooed Women of Kalinga>이라는 이름의 작품은 주술의 힘이 깃든 듯한 문신을 한 채 자신감 있게 정면을 응시하는 노년의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프랑크푸르트의 디자이너이자 사진작가인 카스텐 토르멜렌Karsten Thormaehlen은 이처럼 시니어들의 인생이 묻어나는 초상을 우아한 시선으로 프레임에 담아낸다.
또 다른 참여 작가인 케냐 예술가 오스본 마카리아Osborne Macharia는 래퍼로 변신한 노신사 네 명의 사진을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사진 속 노인들은 붉은 배경 앞에서 스케이트보드, 자전거와 함께 캐주얼하고 과감한 포즈를 취한다. 이 전시는 사진·텍스트·콜라주·스케치·설치미술로 지구 곳곳 시니어들의 라이프스타일, 사랑과 성, 지식의 전승, 장수, 질병, 건강, 죽음을 보여준다. 전시의 부제인 ‘나이 드는 순간Moment of Ageing’을 만나며, 우리는 시니어가 완결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개성에 감탄한다.
이 전시가 남긴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greyisthenewpink를 따라가면 더욱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안에서 엿볼 수 있는, 이른바 뉴그레이의 모습은 낯설 정도로 다채롭고 생생하다.

쓰타야 서점 전경

뉴그레이를 위한 취향 설계가 가져온 변화

뉴그레이를 타깃으로 규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기 뉴그레이의 니즈를 해결하는 것에서 시작해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낸 사례가 있다. 바로 일본 최대 서점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평가받는 쓰타야 이야기다. 쓰타야는 2011년 도쿄 다이칸야마代官山에 중장년층을 위한 공간인 복합문화공간 T사이트를 오픈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쓰타야의 기획자 마스다 무네아키는 어느 날 일본의 인구 변화 양상에 주목했다. 그는 젊은이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60세 이상의 노인은 증가하는 양극화 현상이 극심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신규 매장을 60세 이상 고객이 이용하지 않으면 비즈니스에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말이었다. 결국 T사이트는 다이칸야마에 거주하는 50~60세에 주목했다. 이들은 단카이 세대로서 일본 성장기에 청년기를 보내며 경제적 여유를 누린 세대다. 그리고 취향에 맞는 라이프스타일을 지키며 낯선 문화를 먼저 받아들이고 새로운 경험에 앞서 도전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들을 ‘프리미엄 에이지Premium age’로 규정한 쓰타야는 이들의 풍부한 문화적 소양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서점은 부족하다고 결론 내리고, T사이트를 다른 문화 공간으로 설계했다.
T사이트의 기획자들은 서적 판매 코너를 장르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별로 구분했다. 그리고 책과 물품을 큐레이션 해 보여주었다. 서양 서적과 중고 서적도 갖추어 상품 구색에 깊이감을 더했다. 생활 제안력이 제일 뛰어난 매체인 잡지 코너를 강화하고, 건강 코너와 요리 관련 제품을 추가해 프리미엄 에이지들이 나이가 들어도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멋지게 살 방법을 제안했다. 또한 여가를 즐기는 방식을 연구해 여행, 주택, 애완동물, 자동차 등의 테마도 마련했다. 좀 더 일찍 일어나는 프리미엄 에이지에 맞춰 매장 오픈 시간도 오전 7시로 조정했다. 더 나아가 독립한 자식들보다 반려동물과 손자·손녀가 소중한 고객들을 위해 매장 내에 반려동물 병원과 반려동물 식수대를 준비했다. 친환경 장난감 전문점도 같은 맥락으로 갖췄다.
공간 또한 최적의 맞춤 설계로 디자인했다. ‘너무 넓은 구조에 노출되면 사람이 불안해한다’는 데에 착안한 설계였다. 상업 요소를 최대한 줄여 편안한 느낌이 드는 서점 2층에는 책과 함께 커피, 술 그리고 식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라운지도 마련했다. 고객이 풍경을 느낄 수 있도록 빛과 시선의 위치를 신경 써서 계획했다. 이렇게 완성된 T사이트는 지역의 시니어 아지트로 금세 자리매김했다. 의외의 성과도 있었다. 일본에 체류 중이거나 방문 중인 외국인과 젊은 크리에이터들이 개성 넘치는 이 공간에 자연스럽게 모인 것이다. 덕분에 프리미엄 에이지를 타깃으로 한 공간은 젊은이들도 좋아하는 명소가 됐다.
T사이트의 사례는 시니어들을 위한 문화예술 기획에 힌트를 준다. 뉴그레이를 향해 섬세하게 설계된 기획이라면 젊은 세대에게도 무리 없이 스며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의 총합으로 일군 지속 가능한 행보

그렇다면 뉴그레이들이 주체가 되는 기획은 어떤 모습일까?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티수니(Tissuni) 이야기다. 티수니 그룹은 샤넬, 디오르, 생로랑 등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시니어 재단사들이 모인 그룹이다. 전 세계에서 재단을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샤넬의 시니어 재봉사를 중심으로 모여 코로나19로 고생하는 프랑스 의료진에게 마스크를 공급했다. 무려 3천 개가 넘는 무료 마스크를 재단했는데, 이 의미 있는 행보는 마스크 외 분야로 이어졌다.
베테랑 재단사 20여 명은 패션이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환경오염과 자원 낭비 문제에 주목하고 지속가능성을 몸소 실현하는 차원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들이 한 일은 디자인 패턴을 오픈소스Open Source로 공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미니멀한 드레스를 설계했는데 1m의 패턴을 자르면 서로 연결돼 버려지는 천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오픈소스는 주로 IT기업이 소스코드나 소프트웨어 등을 무상으로 공개해 누구나 그 소프트웨어를 사용, 재배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을 의미한다. 티수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웹사이트에서는 누구나 드레스 패턴을 무료로 내려받아 프린트하고 자신이 원하는 패브릭을 선택해 1m의 천만 사용하면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드레스 한 벌을 완성할 수 있다. SNS에는 그들의 패턴으로 직접 만든 다양한 패브릭의 리틀 그린 드레스Little Green Dress가 공유되었다.
패션업계 시니어들인 티수니 그룹은 의료용 마스크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패션업계의 과제이기도 한 환경오염과 낭비의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다양한 세대의 실천까지 유도했다. 경험의 총합이 다른 뉴그레이들이 가지는 영향력과 관점의 힘을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미국의 공연예술계에도 있었다. 미국 대표 시니어 커뮤니티, 시니어 플래닛Senior Planet의 무료 온라인 연극 클래스, '시니어즈 인 플레이Seniors in Play1'다. 이 기획을 시작한 할리우드 배우 토니 플라나Tony Plana는 70대의 원로 배우로서, ‘연기’ ‘다른 사람이 돼보는 경험’이 시니어에게 성장의 기회를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2017년부터 온라인 연기 수업을 연다. 이 수업의 성과는 그로부터 2년 뒤 가시화하는데, 바로 코로나19 때문이었다. 대인 접촉이 어려운 시기, 시니어 플래닛 시니어들은 줌zoom으로 연기 수업을 듣고 온라인으로 공연하며, 서로 연결되고 성장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토니 플라나의 지혜와 통찰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티수니에서 진행한 챌린지와 리틀 그린 드레스의 인증 결과물 (사진출처:티수니 인스타그램@tissuni)

편견을 버리면 시작될 공존의 울림

‘그레이 이즈 더 뉴 핑크’ 전시와 쓰타야의 T사이트, 티수니 그룹, ‘시니어스 인 플레이’의 공통점은 시니어가 주체가 되는 기획이다. 문화예술계에서도 새로운 시니어 세대인 뉴그레이를 중심으로 한 변화가 충분히 폭발적인 영향력을 일으킬 수 있다. 지나온 시간이 만들어낸 경험과 고유한 관점을 지닌 시니어 세대. 그들과 공감하고 공존할 수 있다면 시니어 세대로부터 시작되는 다양하고 새로운 울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거대한 흐름이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뉴그레이가 만들어낼 이야기와 콘텐츠는 과거, 복고와는 전혀 다른 새로움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글. 염선형 브랜드 디렉터. 사람과 기업, 가치를 연결하고 고유한 언어 자산을 창조하며 브랜드와 트렌드를 탐구한다. 최근 『뉴그레이-마케터들을 위한 시니어 탐구 리포트』를 공동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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