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하나

좋은 연주란 무엇인가
작품이 가치를 드러내는 순간
연주가는 관객에게 작품을 소개하는 최전선에 있는 사람이다. 관객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연주가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좋은 연주와 연주가를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관객마다 공연을 관람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좋아하는 장르라서, 좋아하는 곡이라서 또는 특정 아티스트 때문에, 아니면 같이 관람하는 지인을 만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여러 목적을 가진 관객이 모이는 공연. 그중에서도 클래식 공연의 경우 대중적으로 알려진 프로그램이 아닌 이상 관객이 작품에 대한 이해 없이 객석에 앉을 확률이 높다. 관객은 작곡가가 아닌, 연주가에 의해 처음으로 작품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작곡가의 창조물인 작품은 악보를 통해 실체를 드러낸다. 여기에는 박자와 빠르기, 음표와 쉼표 그리고 다이내믹과 나타냄말까지 작품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악보는 연주가가 작품을 해석해 연주하는 데 절대적 기준이 된다. 악보를 읽을 때 아주 작은 표기까지 꼼꼼히 살펴야 작곡가가 상상한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는 스케치가 완성된다.

여기까지 보면 얼핏 작곡가는 ‘갑’이고 연주가는 ‘을’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 연주가가 없다면 작품은 그저 악보로만 존재해 작곡가의 책장 안에만 머물 뿐이다. 음악은 머릿속 상상이 아닌 실제 소리로 표현될 때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시간 예술’이다. 작곡가 진은숙을 인터뷰했을 때 들은 말이다. “나는 내가 쓴 작품을 초연되는 무대에서 처음 듣는다. 그전에는 절대로 컴퓨터로 듣거나 피아노로 쳐보지 않는다. 내가 상상한 소리는 오직 무대에서 연주가의 연주를 통해서만이 제대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말이면 세계 각지에서 연주되는 대표적인 작품이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다. 우리나라 또한 많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인기 레퍼토리인데 어떤 관객은 한 해 동안 각기 다른 단체의 합창 교향곡을 듣기 위해 수차례 공연장을 찾기도 한다. 이외에도 하나의 작품을 연주하고 녹음하는 다양한 연주가를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연주가는 작품의 깊숙한 내면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찾은 이후에는 그것을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한다. 같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연주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 이러한 과정 속에 있다.

후기 낭만 시대 이후 등장한 비르투오소는 초인적인 기교와 표현력을 가진 연주가를 일컫는다. 이들은 팬덤을 몰고 다닐 만큼 인기가 높았고, 결과적으로 연주가의 입지를 한껏 끌어올렸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자신만의 개성으로 인기와 명성을 얻은 연주가가 시대를 풍미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최근 들어서는 국제 콩쿠르가 신인 연주가의 등용문으로 인식되어 붐을 이루었고, 실제로 클래식 스타 탄생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시대나 유행과 상관없이 어떤 연주가를 ‘좋은 연주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떤 음악이 좋은 음악인가’만큼 모호하고 주관적일 수 있다. 음악을 비롯한 예술에 대한 호불호는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해 왔고, 절대적 우위도 열등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는 있다. 그것은 바로 ‘감동’.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라면 취향과 배경을 막론하고 듣는 이를 설득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연주가가 하나의 작품을 받아들이고 익혀 무대에 올리기까지의 과정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노력과 집중이 필요했으리라. 단순히 틀리지 않고 매끈하게 연주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닌, 감동을 주는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정답 없는 수학 문제를 풀 듯, 정상 없는 산에 오르듯 끊임없이 작품을 마주하고 고민해야 된다. 이것이 같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매번 새로움을 갈구해야 하는 연주가의 숙명이 오늘도 좁은 연습실로 향하게 하는 이유다.

과거와 달리 현재는 연주가를 만나는 방법이 다양해졌다. 공연장에 가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원하는 연주가의 연주를 직접 찾아서 듣고 보는 시대다. 온라인 미디어와 스마트폰의 출현은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공연계의 확장성과 접근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렇다면 미래엔 공연장이 줄어들거나 없어질까? 확신하건대 그런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라이브 연주가 주는 감동은 고품질의 녹음과 화려한 영상물이 대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무대, 그것이 좋은 연주와 좋은 연주가를 정의하는 가장 명확한 기준이리라.

글. 김희선 초등학교 시절 바이올린을 만난 후 전공자의 길을 걸었다. 연주가 본업이지만 2018년부터 클래식 전문지인 『월간 음악저널』의 편집장으로 음악 관련 글쓰기에도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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