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동시대적 한국 창작춤
경계를 허물어야 새로운 춤이 보인다
4월, 국립무용단은 신작 두 편을 모아 <더블빌>을 올린다. 이번 기획이 크게 관심을 끄는 이유는 현대무용계에서 주목받는 안무가 그룹 고블린파티와 차진엽 안무가가 한국무용을 주 언어로 사용하는 국립무용단을 위해 신작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키워드 ‘지금’ ‘한국’ ‘무용’만 남기고 모든 경계를 허문다고 하는데 얼마큼 자유롭고, 독창적이며, 새로운 무대를 만들지 사뭇 기대된다. 더불어 현대무용 안무가에게 국립무용단 안무를 의뢰하는 일이 오늘날 왜 이슈가 되는지, 또한 그러한 시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새삼 고민해 본다.

전통을 소재로 하는 춤의 방식들

몇 년 전, 국립극장 ‘공연예술특강’에서 ‘전통의 현대화’를 주제로 강의한 적이 있다. 당시 전통을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을 특징별로 분류해 보았다. 우선 전통을 오롯이 보전하는 차원에서 기록을 바탕으로 원작을 그대로 재연하는 경우가 있고, 둘째는 근거 자료가 미흡한 경우 ‘원작은 이러했을 것이다’라고 추측하며 최대한 원작에 가깝게 복원하는 경우, 셋째는 원작을 재해석하는 경우, 끝으로 전통은 소재에 불과할 뿐 동시대적 감각으로 완전히 새롭게 창작하는 경우까지 네 가지 분류가 가능하다. 독창성의 유무를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앞의 두 가지 경우는 원작 즉 전통의 ‘모방품’이며, 세 번째와 네 번째의 경우는 새로운 ‘창작물’ 범주에 속한다.
국립극장은 현재 전통예술에 기반을 둔 동시대적 공연 작품을 개발하고, 타 장르와의 융·복합을 통해 세계 무대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전속단체인 국립무용단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통춤의 현대적 재창조 작업을 통한 고유 레퍼토리를 개발하는 게 주된 과제다. 그렇다면 국립무용단의 미션은 전통춤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고전 작품을 재해석하거나 한국춤을 소재로 동시대적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1962년 국립무용단 창단 이후 처음 10년은 미션 자체가 불명확했다. 한국춤만을 전공하기보다는 송범·임성남 등 안무가의 성향에 따라 한국무용과 발레 작품을 섞어서 발표했기 때문이다. 1973년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이 분리되면서 비로소 국립무용단은 송범을 중심으로 한국 창작무용극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주로 고전 설화를 재구성해 줄거리에 따라 안무하는 방식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꾀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최첨단의 동시대적 춤이었다. 같은 해, 장충동에 신축 개관한 국립극장 무대는 이런 대규모의 스펙터클 작품에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다시 돌아와서, ‘공연예술특강’에서 다루었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전통을 현대화하는 네 가지 방식은 각기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핵심 목표가 있다. 즉 ‘재연’은 철저한 고증을 담보해야 하고, ‘복원’은 창의성보다는 전통에 근거해야 한다면 ‘재해석’은 분석과 창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해야 하고, 완전히 새로운 ‘창작’은 동시대적 연출이 관건이다. 그렇다면 송범이 완성한 무용극 형식의 작품을 여전히 이 시대의 동시대적 창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당시에는 신박했을 연출 방식이 40년이 지난 지금은 고전이고 전통이 됐음을 기억하자. 국립무용단이 신작을 꾸준하게 개발은 해왔으나, 연출 방식을 전면 개선하고 동시대성을 되찾은 것은 최근 10년 내에 이룬 성과다.

2017년 공연예술특강 중인 장인주 무용평론가

한국 춤계의 고정관념

작가 조승연은 한국인의 창의성을 막는 세 가지 창살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우리 것과 남의 것이 따로 있다는 경계, 원조만을 고집하는 성격, 섞인 것은 잡종이라는 고정관념이 활발하게 창의성을 발현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춤계에도 이와 비슷한 성격의 고정관념이 있다. 첫째는 창조보다는 모방에 익숙한 나머지 서구의 트렌드를 추종하려는 경향이 있다. 둘째는 원조를 보존하려는 성격이 강해서 섣불리 재해석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무형문화재의 춤이 과감하게 재해석되는 경우가 극히 드문 것은 좋은 예이다. 셋째, 섞는 것을 싫어해서 한국무용·발레·현대무용 등 표현 기법 삼분화의 경계를 강건하게 고수한다는 점이다. 이는 대학 무용과의 세부 전공이 삼분법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기인하며, 1963년 최초로 이화여자대학교에 무용과가 생긴 이래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불문율과도 같다. 몇 년 전부터 일부 기관에서 심의 분야를 ‘무용’이라는 큰 틀이 아니라 삼분법에 따라 세분화해서 진행하고 있는 점은 민원을 최소화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무용계의 삼분화를 고착화하는 문제점도 내포한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새롭고 파격적이어야 할 예술 작품으로서의 춤에 거대한 창살이 되고 있다. 최근 10년 동안 안성수·신창호 외에 해외 안무가 테로 사리넨·조세 몽탈보 등 현대무용 안무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호평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립무용단이 현대무용 안무가에게 안무를 의뢰하는 것이 낯설고 화제가 되는 이유다.

2012년 국수호 안무로 재연된 국립무용단 <도미부인>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섞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처럼 무용 장르 삼분화가 명확하기 이전 시대, 1960년대 한국의 무용계로 돌아가 보자. 우선 당시에는 섞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한 무용가가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무용수로 출연했고, 최승희·조택원 같은 신무용가들은 서양의 것과 한국의 전통을 혼합해 창작하는 데 익숙했다.
송범식(式)의 무용극을 한 번 더 정의하자면 한국적인 소재와 한국춤의 표현 기법을 가지고 전막 발레 <백조의 호수>와 같은 창작품을 만드는 것이 동기였다. <도미부인>이 대표적이며 <왕자호동> <춘향전>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모두 국립무용단의 레퍼토리다. 이 세상의 다양한 춤을 최대한 많이 연마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게 목표였던 만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무용극에는 한국춤과 발레 외에도 현대무용·인도무용·스페인무용 등이 녹아 있다. 안무가 송범이 젊은 시절 무용수로서 익힌 다양한 춤의 정신과 기법을 포함한다.
이렇듯 섞어야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는 주장은 전문화 시대를 맞아 스스로 그어놓은 선에 울타리를 치면서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춤 언어가 세분화된 것이 발전의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반세기 동안 지나치게 고착화됐음도 상기하자. 말년의 송범과 후배 안무가들이 무용극을 이어받으면서 다양한 춤 형식을 혼합하는 초기의 정신이 뒷전에 밀린 세월도 길어 보인다.

조세 몽탈보 안무의 국립무용단 <시간의 나이> ⓒ국립극장

세계가 기대하는 한국춤의 미래

2016년 프랑스 현대무용 안무가 조세 몽탈보는 국립무용단을 위해 <시간의 나이>를 안무하면서 “전통과 현대는 서로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라 함께 섞이고 공존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창작을 가능하게 한다”고 했다. 이전엔 알지도 못했던 먼 나라 한국의 전통을 소재로 동시대적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 전통춤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작업부터 시작했던 몽탈보. 부채 없이 부채춤 추기, 북 위에 앉아서 북 두드리기, ‘한량무’는 남자 것, ‘부채춤’은 여자 것이라는 구분 없이 남녀 모두 같은 동작으로 춤추어 보기. 이렇듯 생소한 시도들은 오히려 몽탈보가 한국의 전통을 잘 모르기에 가능했다. 비보잉·발레·바로크무용·아프리카춤·플라멩코 등 종류에 구애 없이 모든 춤을 자유롭게 섞는 데 익숙한 그는 한국춤의 매력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고, 새로운 형태의 조합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세대도 다르고 만난 적도 없는 청년 시절 송범과 몽탈보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세계는 한국 문화에 열광하고 있다. 해외 현지에서 느끼는 열기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뜨겁다. 팝과 만난 국악이 퓨전국악으로 전 세계에서 각광받는 요즘, 한국춤도 전통을 발판으로 자유롭고 다채로운 시도를 마구 쏟아낼 때가 됐다. 세계가 기대하는 한국춤은 전통의 몸 위에 동시대의 옷을 걸친 친근한 모습일 게다. 누가 먼저 그 옷을 갈아입느냐는 누가 먼저 도전하느냐의 순서에 달렸다. 이젠 세분화된 장르를 섞고, 비틀어 새로운 것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섞어야 새로운 것이 나온다.

글. 장인주 무용평론가. 무용을 전공하고, 무용미학을 공부했다. 서울신문에 칼럼 <장인주의 춤추는 세상>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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