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한 마디

라흐마니노프의 말
음악으로 증명한 한길 인생
삶의 유한함 앞에 숙연한 마음을 가졌던 음악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니스트·작곡가·지휘자로 동분서주했던 그의 인생은 오로지 음악을 향해 흘렀다. 그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고 싶었던 일은 오직 자신을 음악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20세기의 월드스타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는 평생 음악에 푹 빠져 어쩌면 고단하게 삶을 살았다. 피아니스트·작곡가·지휘자로 동분서주하며 보낸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그가 음악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직업을 사랑한, 일중독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1년에 60회의 공연을 열기도 했는데, 공연 장소는 미국 전역부터 유럽까지 매우 다양했다. 무대에 서기 위해 긴 시간 이동해야 하는 물리적인 피로와 번거로움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더 많은 공연을 열지 못하는 여건에 놓인 것을 아쉬워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작곡가로 차곡차곡 쌓아온 그의 작품 목록을 보면 피아니스트로 그리 바삐 활동할 시간이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다. 교향곡·관현악곡·협주곡·실내악·독주·오페라·합창·가곡까지 당시 작곡가가 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작품을 부지런히 썼다. 하지만 그가 발표하는 작품들은 당시 음악 평론가에게 환영받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는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처음 듣는 작품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용기는 내지 않는 것이 좋다”는 재치 있는 말도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근 100년이 다 돼가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은 지금도 쉴 새 없이 무대 안팎에서 흐르고 있다. 결국 라흐마니노프가 옳았음이 증명된 셈이다.

그의 음악적 발자취를 좇다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열정적인 태도로 음악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더 있을까. 1937년 영국에서 몇몇 연주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중 그는 『성 루이스 스타 타임스』와 인터뷰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는 러시아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퇴역 군인이던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로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다행히 유명 음악가였던 사촌에 의해 모스크바음악원에서 수학하고 1873년 졸업한 뒤 첫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작곡했다. 여기서 그의 불행이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그의 나이 24세에 발표한 교향곡 1번(1887)이 대중의 혹평을 받았다. 그 후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자기암시 기법 치료’를 통해 우울증을 극복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의 치료 덕분인지 1901년 발표한 그의 피아노협주곡 2번이 평단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그는 의사 니콜라이 달에게 이 곡을 헌정했다. 그가 우울증을 극복했음에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공산화를 피해 노르웨이를 거쳐 1918년 미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빈털터리나 다름없던 그는 낯선 땅에서 음악에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일까. 삶의 역경을 견뎌온 그의 말은 인생의 큰 시련을 겪은 사람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과 닮았다. 모진 세월을 견디며, 그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셀 수 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고국 러시아를 탈출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언제 죽음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협이 시작됐을 테니까.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그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열심히 살기로 작정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끝나버릴 인생의 한순간마저 소중하게 보내고 싶어서 말이다.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는 그는 2m에 가까운 키에 손의 너비가 한 옥타브 반 정도를 짚을 수 있는 큰 손을 타고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현란하고 매혹적인 그의 피아노 연주에 호불호가 있었지만, 그는 종종 “관객은 아무 잘못이 없다. 오직 나쁜 연주자만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긴 그를 다잡아 준 것은 삶의 유효기간이다. 그 강력한 하나의 단서가 또 한 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내게 했을 것이다. 아마 우리는 라흐마니노프처럼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길 일은 없겠지만, 가벼운 숙제 삼아 내 삶의 유효기간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분명 어제보다 나은 삶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참고 문헌
『Sergei Rachmaninoff: A Lifetime in Music』 세르게이 버텐슨 저, 피클 파트너스 퍼블리싱(2017)

글. 정은주 음악 칼럼니스트. 서양 음악가들의 음악 외(外)적 이야기를 발굴해 소개하며 산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클래식 잡학사전』, 『발칙한 예술가들』(추명희, 정은주 공저), 『나를 위한 예술가의 인생 수업』을 썼다. 현재 예술의전당·세종문화회관 월간지, 『월간 조선』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부산mbc <안희성의 가정 음악실>에 출연하고 있다.

일러스트. romanticize
<월간 국립극장> 구독신청 <월간 국립극장> 과월호 보기
닫기

월간지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 구독 신청

뉴스레터 구독은 홈페이지 회원 가입 시 신청 가능하며, 다양한 국립극장 소식을 함께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또는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편리하게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회원가입 시 이메일 수신 동의 필요 (기존회원인 경우 회원정보수정 > 고객서비스 > 메일링 수신 동의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