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고전여행

판소리 열두바탕을 찾아서
성장과 변화의 서사로 읽는 ‘심청가’
심청이 이야기는 시대와 세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시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심청의 존재적 변화와 성숙한 인간으로서 눈을 뜬 심 봉사의 성장기 등 색다른 관점으로 ‘심청가’를 만나보자.

효녀 심청, 아비의 소원을 이루어주고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딸. 어미는 저를 낳은 지 7일 만에 죽어 마을 아낙들의 동냥젖으로 자랐고, 일곱 살이 되자 눈먼 아비의 안위를 걱정해 스스로 동냥질에 뛰어들었다. 옷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을 걸치고 나가 한겨울에도 밥을 얻어왔고, 얻은 것이 변변치 못한 날에는 쩝쩝거리며 밥 먹는 소리만 내는 것으로 눈먼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지기 전날까지도 여생 동안 아버지가 입고 지낼 옷가지를 짓느라 밤을 새워 바느질했더랬다. 아무리 판소리 ‘심청가’를 두고 ‘눈물 교과서’라 부른다지만 어린 심청이 겪는 시련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런 심청의 고된 삶은 그녀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이후로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풍덩’ 소리를 내며 인당수에 빠지자마자 옥황상제의 전교를 받은 사해 용왕이 심청을 교자에 태워 수정궁으로 모시는 것이다. 수정궁에서 3년간 윤택한 생활을 즐긴 뒤 방년이 되어 옥황상제의 명으로 꽃봉오리에 실려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와, 황제를 만나 비로소 황후가 된다. 죽음에 가까운 일을 겪고 나서 존재의 질적 변화와 성숙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녀는 천지 맹인들의 눈을 한날한시에 뜨게 만드는 영웅이 된다.
뱃머리에 선 심청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바닥을 모르는 깊은 물이 곧 자신을 집어삼킬 것을 예상하는 순간, 변치 않던 안색에 두려움이 밀려온다. “두 활개 떡 벌리고 뱃머리에 우뚝 서서 물속을 들여다보니 이곳은 사람이 많이 죽은 곳이라. 충충한 저 물농울이 울렁출렁 뒤 누우니 두 눈이 캄캄하고 천지가 빙빙 돌아 정신없이 주저앉아 뱃전을 다시 검쳐 잡고 벌렁벌렁 떤다.” (박순호 소장 『효녀실기심청』) 이때 장승상 부인이 들고 있던 심청의 초상화가 빛이 검어지며 그림 속 심청의 귀에서 물이 흘렀다고 한다. 승상 부인은 이에 심청이 죽은 줄 알고 제문을 지어 눈물을 흘렸다.
심청 이전의 세상에도 자신의 몸을 해쳐가면서 효를 실천한 수많은 효자와 효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 무수한 이야기는 그들이 어떤 마음과 각오로 효행을 실천했는지, 그 속마음까지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삼강행실효자도』나 『조선왕조실록』의 효행 사례에는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한 자식의 단지, 즉 손가락을 자르는 행위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때 자신의 생살을 자르는 아들딸들의 주저함이나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진정한 ‘효자 되기’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곳에는 오직 효를 행했다는 사실, 그리고 행해야 한다는 당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물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엄습해 온 두려움에 온몸을 떠는 심청을 볼 때 우리는 그녀 역시 한 명의 인간임을 확인하게 된다.

‘심청가’의 또 다른 주인공, 심 봉사

그런데 이 심청의 효행이 향하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면 ‘심청가’는 또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 즉 심 봉사는 대대로 벼슬을 해온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20세에 안맹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인물이다. ‘심청가’에는 심청의 삶만큼이나 심 봉사의 삶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심 봉사의 집안 내력부터 곽씨 부인과의 만남과 이별, 딸 청이의 탄생, 뺑덕어멈을 만나 새살림을 차린 사건, 황성 맹인 잔치를 찾아가다 뺑덕어멈에게 버림받고 고생하는 이야기가 상세히 나와 있는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이 이야기는 ‘심청가’가 아니라 ‘심 봉사가’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다.
심청이 어릴 적부터 현숙한 면모를 보여준다면, 그에 비해 심 봉사는 다소 철딱서니 없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딸이 구걸 나간 사이 외출했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고, 이때 자신을 구해 준 중의 말 한 마디에 공양미 300석 시주를 덜컥 약속해 버린다. 그러고는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안절부절못한다. 300석은커녕 당장 한 끼 먹을 쌀도 없는 형편에 비로소 눈앞이 캄캄해진 것이다. 이처럼 그는 유서 깊은 양반댁 자제라기에는 다소 즉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뺑덕어멈과의 관계에서도 성적 욕망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표현하기도 한다. 맹인 잔치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방아 찧는 아낙들을 희롱하는 장난스러운 면모도 보여준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졌다 살아 돌아온 후 존재적 변화를 맞게 되는 것처럼, 심 봉사 역시 이야기 끝에는 성숙한 인물로 변모한다. 다사다난한 일을 겪으며 생고생을 하다가 황후가 된 심청과 재회해 눈을 뜨고 나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특히 완판본 『심청전』에서는 그 후일담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원군이 된 그는 늘그막에 귀한 아들도 얻어 후사를 잇는데, ‘부원군’은 그 이전에 ‘심 봉사’가 보여줬던 평민적 발랄함은 온데간데없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황제를 도와 은혜를 갚아나간다. 이 점에서 ‘심청가’는 부녀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의 성장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빛바랜 고전에 다시 색을 입히다

그런데 아무리 ‘심청가’에 대해 ‘두 인물의 성장 이야기’라는 보편적인 해석을 시도한다고 해도, 요즘 사람치고 이 이야기에 감동하며 눈물 흘리는 이는 드물 것이다. 자신의 몸을 해쳐 효를 행하는 심청의 효행이 ‘진짜’ 효행이라 할 수 있는가? 심청의 희생을 야기한 인물이나 사회문화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지는 않은가? 심청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 이렇게 우연적이고 환상적인 결말로 충분한가? 최근에는 이러한 날카로운 물음에서 비롯된 젊은 상상력이 ‘심청가’를 다시 쓰고 있다.
웹소설 ‘용왕님의 셰프가 되었습니다’(2017~2018)는 바다에 빠진 심청이가 차원 이동 마법을 통해 다른 세계에 사는 용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심청은 용을 용왕으로 착각하고, 그간 아버지 봉양을 하며 자연스럽게 익힌 솜씨를 발휘해 근사한 요리를 용에게 대접한다. 용왕, 아니 용의 ‘셰프’가 된 심청의 이야기는 동아시아적 상상력의 공간인 ‘용궁’에 서양적 판타지 세계관을 접목해서 젊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웹툰 ‘그녀의 심청’(2017~2018)은 “‘심청가’에서 장승상 부인이 왜 심청에게 공양미 300석을 대신 갚아주겠노라 제안을 했을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상류사회에 소속된 장승상 부인과 하류 계층인 심청의 연대를 그리면서, 심청에게 ‘효녀 되기’를 폭력적으로 강요한 사회를 비판한다. 특히 뺑덕어멈과 같이 원전에서 악녀로 간주되던 여성 캐릭터를 긍정적으로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웹툰 ‘심봉사전’(2017)은 심 봉사라는 인물을 무사로 재창조했다. 이 이야기는 심 봉사를 ‘누대 잠영지족’의 후예가 아닌 대장장이의 아들로 쇠를 잘 다루는 인물로 그린다. 어릴 때 시력을 잃은 그가 조력자 스님을 만나서 무예를 익히게 되는데, 억울하게 반역자로 몰려 가족을 모두 잃고 외톨이가 된 후 홀로 심청을 키워낸다는 이야기를 골자로 한다. 원전의 이야기를 따라가되 심 봉사에게 지팡이 대신 검을 쥐여주면서, 그를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인물로 재창조했다.
이 이야기들은 오늘날 ‘심청가’라는 오래된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어떤 비판에 직면하고 있는지를 거꾸로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위의 이야기들은 말하자면 ‘심청가’의 현대적 이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심청이나 심 봉사만이 아니었다. ‘심청가’도 성장하고 있다.

글. 이채은 판소리 연행의 의미화를 몸의 관점에서 살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전을 통해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글을 읽고 쓰고 있다
그림. 김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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