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언어

한국춤의 발과 다리
전통에 뿌리내리고, 시대와 도약하는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은 매일 아침을 ‘국립기본’으로 시작한다. 발레에 바가노바 혹은 체케티 메소드가 있다면, 한국춤에는 ‘기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무용을 주창한 송범 선생이 다듬은 국립기본은 전통춤의 아성을 간직하는 동시에, 판이 아니라 극장 무대에 서야 하는 무용수들에게 꼭 맞는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굿거리장단으로 시작되는 기본은 무용수에게 규율이자 그 위에 새로운 것들을 쌓기 위한 기반이 돼왔다. 그리하여 한국춤의 몸짓에 깃든 이야기를 되새겨 보고자 국립기본에서 그 흔적을 찾았다. 팔다리부터 손과 발, 허리, 어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호흡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짚어본다.

국립무용단 대표 레퍼토리 <묵향> 중 두 번째 장 ‘매화’. 맑고 높은청의 정가 선율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여성 무용수의 춤 속 화려한 손 움직임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꽃을 상징하는 자홍색으로 물들이고 유려한 팔사위가 돋보이도록 한 저고리 끝자락이 마치 매화 그림을 채색하는 듯 무대를 물들인다. 하지만 그 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면 풍성한 치마폭이 살랑이며 생긴 틈 사이로 얼핏 보이는 버선코를 발견하게 된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자신의 역할을 묵묵하고 반듯하게 수행하고 있는 버선발 말이다.
흔히 한국춤을 땅속 깊이 뿌리내린 움직임이라고 이야기한다. 천지가 결합해 만물이 생겨났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를 이루는 조화로운 상태를 이상적으로 여기는 동양의 우주관과 닮은 부분이다. 한국춤의 기본 자세는 꼿꼿하고 반듯하게 사지를 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변화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무릎은 부드럽게 굽히고 있으며 팔다리는 편안하게 곡선 형태를 취한다. 두 발이 단단하게 대지를 디디고 서 있기에 오히려 사지의 분위기는 여유롭고 우아하다.
발레의 기본 자세인 턴아웃(turn-out)은 고관절부터 발끝에 이르는 하체의 모든 관절이 바깥쪽을 향하도록 한다. 효율을 위해 인위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더 많이 돌고, 더 높게 들며, 더욱 빠르게 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춤은 인위적인 것들을 거부한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형성되는 신체의 곡선이 움직임으로 연결된다. 신체를 뻗어내는 것은 다시 구부리기 위함이며 높게 상승한 뒤에는 더 깊고 묵직하게 바닥을 디디고자 공을 들인다. 살아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들이쉬고 내쉬며 만들어지는 호흡의 흐름, 나아가 삶의 리듬이 춤과 결을 함께한다.
무엇도 걸치지 않은 맨발로 촉촉한 흙을 밟아본 적이 있는가. 무게가 실린 발바닥과 흙이 만나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우리 춤에서 디딤은 신체와 대지가 이룬 어울림의 기록이다. 가장 먼저 내디디고 바닥에서 발끝이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고 묵직한 다리의 움직임이 있기에 들썩이는 어깨춤이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그 깊이를 조절하는 것은 하체의 춤사위 전체를 좌우하는 유연한 무릎 움직임, 즉 굴신의 역할이다. 호흡을 중심으로 리듬을 만들고 골반에서 무릎을 거쳐 발까지 탄탄한 하체의 지지 위에, 비로소 춤이 이루어진다.

풍성한 치마폭 아래 모습을 드러낸 발끝

국립기본을 시작하는 자세이자 한국춤 발사위의 기본은 뒤꿈치를 붙이고 발끝은 살짝 벌린 평범한 형태다. 여기서 발목에 힘을 살짝 풀고 무릎은 자연스럽게 구부린 상태로 다리를 들어 올리는 ‘무릎들기’로 이어진다. ‘족두치기’ 혹은 ‘뒷발치기’라고 하는 작은 발동작은 발바닥이 바닥과 수평을 이룬 채 복사뼈 높이 정도까지만 뒤꿈치를 들어 올려 발목에 붙인 모양을 일컫는다.

뒤꿈치를 붙이고 발끝은 자연스럽게 벌린 발사위의 기본 자세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린 ‘무릎들기’ 동작과 팔사위를 겸한 변형 자세
‘뒷발치기’ 동작에선 특히 예쁘게 솟은 버선코가 돋보인다.

발레 스텝은 발끝을 구부려 발등을 곧게 편, ‘포인트(pointe)’라 하는 동작으로 출발한다. 한국무용의 ‘디딤새’는 이와 정반대로 뒤꿈치부터 차근차근 디뎌나가는 방법을 취한다. ‘디딤체’ ‘디딤’ ‘딛음’ 등 ‘디딘다’는 의미를 가진 다양하고도 유사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동작에서 중요한 것은 발뒤꿈치를 가장 먼저 땅에 댄 다음 아치-발볼-발가락을 순차적으로 닿게 하고, 발가락 끝이 끝까지 땅에 붙어 있다 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발목이 쉼 없이 부드럽게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다. 마치 발바닥이 장단을 타는 것처럼, 또 발목은 동그란 원을 그리는 것처럼 그 움직임은 묵직하되 리듬감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발 움직임의 원리는 디딤새만 아니라 모든 동작에 적용된다. 따라서 무용수의 발은 직선이 아닌, 언제나 버선의 형태를 닮은 자연스러운 곡선을 띠게 된다. 코가 예쁘게 치켜올라간 버선이 한국춤에서 무용수의 발동작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기본 자세에서 뒤꿈치를 들어 올려 높게 선 동작은 ‘돋음새’ 혹은 ‘까치발’이라고 하는데, 무릎을 편 채 꼿꼿이 서는 것이 아니라 준비 동작인 굴신으로부터 호흡을 찬찬히 끌어올려 상승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춤의 ‘디딤새’는 장단을 타고 차근차근 땅을 디뎌나가며 진행된다.
기본 자세에서 뒤꿈치를 들어 올린 ‘돋음새’ 동작

매끄러운 비단 위를 우아하게 걷듯 진행되는 걸음사위는 호흡과 굴신에 맞춰 마치 두 다리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유기적으로 이뤄진다. ‘겹디딤’은 오른발이 앞서고 왼발이 따라오면 몸의 중심을 옮겨 다시 오른발이 한 걸음 전진하는 동작으로, 일반적으로 좌우 반복하며 움직임이 구성된다. 또한 이 동작은 좀 더 잘 알려진 발레 동작의 ‘투스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빠르고 자잘하게 걷는, 그러나 뛰지 않는 움직임을 ‘잔걸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발동작은 천천히 또는 빠르게 속도를 조절하면 우아하고도 활기차게 춤의 표정을 변화시킬 수 있고, 발 사이의 간격과 진행 속도를 불규칙적으로 조정하면 재치 넘치는 발재간이 탄생하기도 한다.

‘겹디딤’은 밀고 당기듯 전진하며 움직임에 독특한 리듬을 부여한다.
한 발을 중심축으로 삼고 다른 발을 꼬아 디디며 회전을 만들어내는 ‘맴사위’

뜀사위와 맴사위 또한 마찬가지다. 빠르고 자잘하게 뛰면 고조된 강강술래와 같은 흥분이 뒤따르고, 높고 호방하게 뛰면 동래학춤이나 선비춤과 같은 춤의 기개가 느껴진다. 한국춤의 맴사위는 한 발을 중심축으로 삼고 다른 발을 꼬아 딛는 방식으로 회전을 만들어내는데, 화려한 맴사위의 진수는 신무용 대표 레퍼토리인 장구춤에서 볼 수 있다.
1980년대 신무용이 재평가되고 한국 창작 무용이 태동하면서 움직임의 영역이 확대되고 다양한 실험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타난 큰 변화 중 하나는 버선과 토슈즈를 벗고 맨발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토슈즈를 벗어던진 이사도라 던컨의 등장으로 현대무용의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버선을 벗고 무대에 나타난 맨발은 우리 춤의 새 시대를 예고했다. 날것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 무용수의 발은 한국춤 혹은 ‘한국적’이라는 명명에 따라다니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시대와 호흡하는 컨템퍼러리 댄스로서 한국춤을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 모양이 어떠하든 춤추는 무용수의 발을 보고 있으면 조금 고집스럽더라도 묵직하게 호흡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다채로운 움직임 속에서도 우리 춤의 뿌리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움직임의 뿌리를 바라보면 될 일이다.

자문. 국립무용단 연습단장 장현수
무용. 국립무용단 송설·송지영
사진. 전강인
글. 김태희 춤으로 시작해 전통예술·연극·시각예술까지 범위를 넓혀가며 예술을 글과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발레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무용이론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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