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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무용단 <더 룸>
숙성의 미학
지난 2018년 신선한 무대와 스토리텔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 작품이 있다. 바로 안무가 김설진과 국립무용단이 만든 <더 룸>이다. 각자의 이야기를 무대에 매혹적으로 풀어놓은 이 작품이 5년 만에 다시 한번 관객 앞에 선다. 더 농익은 모습으로.

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책상·침대·책꽂이·소파 등 평범한 가구로 꾸민 방. 자질구레한 소품 외엔 소박한 샹들리에가 유일한 장식이다. 그 방에 남자 셋, 여자 다섯, 총 여덟 명이 있다. 그런데 그 여덟 명이 만들어내는 등장인물은 여덟이 아니라 수십 명이다. 서로가 서로를 투명 인간 보듯이 지나치며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는데 그중엔 간혹 끈끈한 사이도 있어 보인다. 그렇다 보니 그들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도 쉽지 않다. 80분 동안 무수한 시퀀스가 이어지면서 한 공간에 여러 시간이 켜켜이 겹쳐 쌓여간다.

김설진 안무가와 국립무용단이 함께 만든 <더 룸>이 2018년 초연 이후 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 초연 당시 큰 화제를 모았던 만큼 오랜 시간 기다려 만날 재연 무대가 더없이 기대된다.

초연 당시 화제가 된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무용을 중심으로 작업하는 국립무용단에서 현대무용가 김설진을 초대한 데 있었다. 김설진은 그 당시에도, 지금도 가장 ‘핫’한 안무가다. 벨기에 피핑톰 무용단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댄싱9>의 스타이자 스트리트댄스계의 대부로, 영화·드라마·연극에 출연하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한 몸에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더 룸>을 주목했던 더 큰 이유는 1962년 창단 이후 국립무용단이 걸어온 긴 행보 중에서 무용수들 개인의 이야기로 빚어낸 작품은 ‘처음’이라는 데 있었다(지금까지도 유일하다).

<더 룸>은 사람을 기억하는 방의 이야기다. 누군가는 살았고, 누군가는 살고 있으며, 또 누군가는 살게 될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 여덟 명의 국립무용단원은 각자의 방에 숨겨놓았던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끄집어 내놓았다. 김설진의 작은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수백 개의 ‘엠비언스(분위기를 만드는 음악 또는 음향)’가 하나씩 열릴 때마다 마법에 걸린 듯 기억 속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설정과 즉흥을 통해 연극과 무용의 경계를 허물었다.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에서 출발했기에 드라마가 있고, 표정과 연기가 살아 있다. 은유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다. 방 안의 공기 중에 떠도는 칠정(七情, 희로애락애오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가식적이지 않아서 진솔하고, 잔잔한 감동을 안긴다. 움직임은 만들어낸 춤이 아니라 삶의 흔적이 된다. 그동안 주로 안무가의 철학과 아이디어를 대신 표현하는 매개체였던 여덟 명의 무용수는 본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창적인 캐릭터를 완성해 가면서 스스로의 이야기에 몸을 싣는다. 어느 순간 초현실적인 환상이 보이기도 한다. 멜랑콜리하다. 마치 정신분석학에서 다루는 심리극의 전개와 흡사한 이러한 창작 과정은 국립무용단에서는 처음 이루어진 작업이다. 김설진의 레시피(김설진은 자신의 안무법을 이렇게 표현한다)대로 만든 한 편의 무용극은 이렇게 완성됐다. -2018년 10월호 월간 『미르』 중에서-

초연 당시 나는 <더 룸>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미 안성수, 테로 사리넨, 호세 몽탈보 등 현대무용안무가와의 작업을 통해 동시대 춤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던 국립무용단이지만, <더 룸>에서는 무용수 개개인의 이야기를 끄집어내 그들의 삶을 반영할 것이라는 말에 여러 차례 연습실을 기웃거리며 창작 과정을 엿본 기억이 있다. 한국 전통무용이라는 하나의 표현 방식으로, 만들어진 춤에 감정을 꽁꽁 싸매 놓는 데 익숙한 단원들이 과연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 이야기를 풀어헤쳐 놓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김설진의 마법은 통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날이었어요. 여덟 명 무용수에게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끝은 ‘미안해’로 마무리해 달라고요.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기 힘들기 때문에 방패를 만들어드렸죠. ‘거짓말이어도 상관없어요’라고요. 또 한 가지 약속은 끝나고 ‘진짜야?’라고 서로 묻지 않기로 했죠. 모두가 진지하게 참여했습니다.”

초연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사람이 눕기만 하면 사라지는 침대, 꼴 보기 싫은 남편이 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을 구현한 소파 등 초현실적인 무대세트와 이를 기묘하게 활용한 연출은 마술쇼와 같았다. 무용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너나없이 공간이 품고 있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고 내 삶을 그 안에서 찾아보게 되는 강한 울림을 경험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 정작 초연 무대를 상기해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무용수 여덟 명의 춤 실력이다.

최호종은 놀라웠다. 마치 무용수 김설진을 보는 것처럼 유연했고, 탄력이 넘쳤다. 서양무용에 비하면 정적인 춤인 한국무용을 추는 무용수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물구나무를 서서 한참 균형을 잡더니 보기 좋게 아치를 만들며 공중으로 텀블링하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최호종과 듀엣을 이룬 박소영도 만만치 않았다. 한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최호종의 등에 업혀 사랑을 나누는 듀엣 장면에서 곡예와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롤랑 프티 안무의 <카르멘>에 나오는 듀엣이 이보다 나을까.
고참 단원 김현숙과 윤성철의 무게감은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났다. 겹겹이 껴입은 의상을 정성스레 벗어 후배에게 물려주고 유연하게 태평무를 추는 김현숙의 자태가 범상치 않았다면 춤 잘 추기로 명성이 자자한 김미애의 솔로 춤은 광적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한편 김은영의 능청스러운 막춤은 걸작이었다. 표정에서 묻어나는 유머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 나올 정도로 고차원의 내공을 보여줬는데 그중 ‘청소기 춤’이 최고였다. 그 외에도 문지애‧황용천‧박소영이 영혼을 담은 춤에서도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에너지가 넘쳤다.

재연 무대를 위해 안무가 김설진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초연에 출연했던 무용수가 모두 합류하는 조건으로 재연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제게 있어 안무는 등장인물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함께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것이니까요. <더 룸>은 초연에 참여했던 여덟 명의 무용수와 제가 함께 만든 것으로 대체 불가합니다.”

그렇다. ‘몸짓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5년 만에 올리는 무대에서도 예외 없이 지킬 예정이다. 그에 덧붙여 ‘편집’을 좀 할 예정이라고 한다. 편집은 영화에서 하는 작업이 아니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맞아요. 초연 무대를 올리고 영화 같은 삶을 풀어내기엔 좀 더 굵직한 선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았었죠. 모든 인물이 스토리라인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필름의 앞뒤 순서를 바꾸듯이 편집 작업이 있을 겁니다.”

한층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다가올 2023년판 <더 룸>이 몹시도 기대된다. 김설진이 ‘편집’을 통해 보여줄 연출 실력만큼이나 5년 동안 무르익었을 8명의 무용수를 다시 볼 생각에 벌써 심장이 두근거린다. 공연예술은 “숙성이 필요하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숙성의 맛을 보게 될 것 같다.

글. 장인주 무용평론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무용을 전공하고 무용미학을 공부했다. 서울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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