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국립창극단 <완창판소리>
정심(正心), 정음(正音)으로 소리하는
윤진철의 보성소리 ‘심청가’
섬세하면서도 웅건한 소리 공력에 매료돼 스승의 삶과 철학을 이어가는 소리꾼이 있다. 정직하게 진실된 소리를 하고 싶다는 그의 보성소리 ‘심청가’가 우리에게 어떤 감흥을 전할지 기대된다.

소년 명창이 스승의 소리 철학을 고수해 인간문화재가 되기까지

목포 출신의 윤진철 명창은 예인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음에도 오로지 소리가 좋아 소리와 인연을 맺었다. 11세 여름에 목포시립국악원에서 김흥남 선생님을 첫 스승으로 만나 10여 년간 소리를 배웠다. 어린 나이에 상청 하청 내지 못하는 소리가 없고, 기교도 뛰어나 목포에서 소년 명창이 나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변성기를 꽤 오랜 시간 혹독하게 겪으며 주변에서 이제 소리를 그만두라는 냉혹한 만류까지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소리를 놓을 수 없었던 윤 명창은 이후 김소희·정권진 명창을 사사하며 판소리의 길을 꿋꿋하게 갔다.
윤진철 명창의 소리 길은 1983년 명창 정권진(1927~1986)을 만나며 격동을 겪는다. 정권진의 소리에서 섬세하면서도 웅건한 공력을 느꼈고, 그대로 스승의 소리에 매료되어 그의 소리 길을 따라 걷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86년 정권진이 타계하며 스승과의 인연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윤진철 명창은 이후 정권진의 소리를 남겨둔 녹음과 음반 등을 통해 스스로 학습해 ‘심청가’ ‘적벽가’ 등을 완성해 나갔다. 행여 스승에게 배운 소리의 길과 색깔이 잊히거나 사라질까 봐 다른 스승을 애써 마다하며 철저하게 외롭고도 고단한 독공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그의 고집과 노력은 1998년 제24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부 장원, 같은 해 한국방송대상 국악인상을 수상하며 결실을 본다.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후 그는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느냐는 사회자의 물음에 “우리 정권진 선생님”이라고 말하며 떠난 스승을 그리워했다.

“대명창이 되는 길은 정심(正心), 정음(正音), 사체(四體)에 달려 있다 하겠다. 정심이란 바르고 맑은 마음이니, 그 나라의 음악을 듣고 그 나라의 정치를 알아볼 수 있듯이 가객의 소리를 듣고 가객의 인격을 알아볼 수 있다. … 중략 … 다음에 정음이라 함은 득음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된다는 말이고, 사체라 함은 품위 단정한 동작 곧 너름새다. 사체가 무게 있고 민첩해서, 발 하나를 떼어도 정중함이 있어야 한다. 사방으로 이유 없이 활보한다든가, 쓸데없이 부채질을 자주 한다든가, 난잡한 태도를 보여 품격이 떨어지면 올바른 사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김명곤, 『광대열전』, 1988, 58~59면에서 인용한 정권진의 말)

정권진은 바르고 선하게 살며 자신의 소리를 곧게 가꾸어나간 명창이었다. 윤진철이 스승의 소리에 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의 삶과 소리에 담긴 철학적 바탕 때문이었다. 윤진철은 “정심과 정음의 소리, 삿되지 않고 그릇되지 않고 정직하게 진실된 소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는 그토록 따라 걷고 싶었던 스승의 길이자, 이제 그 가르침을 체화한 그가 걷는 자신의 소리 길이기도 하다.
2020년 12월 윤진철 명창은 국가무형문화재 ‘적벽가’의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판소리 무형문화재 가운데 최연소다. 어린 시절에는 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판소리의 진정성과 예술성에 빠져 문화재 지정은 잊고 그저 진실되게 소리하며 평생을 살면 좋겠다는 바람만을 가졌다고 한다. 정심과 정음으로 소리한 그에게 문화재 지정은 당연한 것일 텐데, 그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고 어깨가 더 무겁다고 한다.

윤진철 명창

보성소리의 정수 ‘심청가’, 그리고 윤진철의 ‘심청가’

윤진철 명창이 이번 완창 무대에서 들려줄 판소리는 보성소리 ‘심청가’다. 보성소리는 명창 정응민(1896~1963)이 일제강점기 보성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며 확립한 현대 판소리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다.
정응민의 소리는 서편제의 비조 박유전(1835~1906)으로 시작된다. 명창 박유전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총애를 받으며 활동하는 가운데 서편제에 동편제의 장점을 가미하고, 양반층을 통해 사설에 교정이나 윤색을 가하며 새로운 소리인 강산제를 만든 인물이다. 그의 소리는 이후 이날치·정재근에게 전승됐고, 정재근의 소리를 그의 조카 정응민이 이어받아 자신만의 색채로 완성했다. 정응민은 어린 시절 정재근을 따라 한양에 가서 판소리를 학습했고, 스무 살 이후 어느 시점부터 세속화된 소리에 회의를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농사를 지으며 소리 학습과 제자 양성에 몰입했다. 정응민의 소리관은 당시 인기를 끌던 창극 소리와는 반대되는 전통 판소리, 완창 판소리를 지향했기에 그가 확립한 보성소리에는 고제(古制) 소리의 면모가 담겨 있다.
윤진철은 정권진의 소리에서 현재에는 잘 쓰지 않는 목, 잊힌 성음 등이 엿보였고, 예스러우면서도 기품 있고 엄격하면서도 자유로운 소리가 무척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보성소리가 갖는 특장이 정권진에게 잘 이어졌고 영민한 윤진철이 이를 예리하게 포착한 것이다. ‘심청가’는 보성소리 특유의 섬세한 표현과 다채로운 성음이 잘 나타나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보성소리 ‘심청가’의 전반부에 있는 ‘상여소리’ 대목은 메나리조로 표현되어 인생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음악적 철학이 담겨 있다. 또한 ‘시비따라’ 대목은 보성소리에서 두 번에 걸쳐 나오는데 첫 번째 ‘시비따라’의 경우 가곡성 우조와 진양조가 사용되어 우아하고 장중한 미학을 드러낸다. 두 번째 ‘시비따라’는 심청이 인당수로 떠나기 직전에 장승상 부인 댁에 들르는 길에 나오는 것으로 심청의 비장함을 극대화한다. 더불어 ‘행선전야’는 장단을 달아놓고 사설을 촘촘히 엮어가는 ‘줏어붙임(주서붙임)’이나 전조와 기교가 자유자재로 운용되는, 그야말로 보성소리의 붙임새와 성음놀이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윤진철은 정권진에게 ‘심청가’를 배울 때 처음부터 순차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음반을 통해 스승의 소리를 미리 학습해서 갔고, 정권진이 부분적으로 짚어주며 음악과 사설의 조화로움, 다채로운 성음놀이, 해석 따라 달리 표현되는 소리의 다양성을 직접 보여주었다고 한다. 윤진철은 독공할 때에도 같은 사설에서라도 표현과 성음을 달리해 보며 판소리 음악의 무궁무진함을 경험했다고 한다. 보성소리 ‘심청가’는 모든 대목을 빠짐없이 부를 경우, 4시간 남짓 걸린다. 과거 2015년에도 윤진철은 보성소리 ‘심청가’를 국립극장에서 완창한 바 있다. 그때에는 압축해 3시간에 걸쳐 완창을 했는데, 이번에는 되도록 모든 대목을 다 부르고자 한다고 한다. 윤진철의 소리는 힘이 있고 상청과 하청이 모두 좋다. 소리를 정교하게 짜는 기량, 정확한 발음도 그가 가진 미덕이다. 늘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 연구하고 훈련해 변화, 성장, 발전하는 길을 걷고자 하는 소리꾼. 보성소리를 충실히 이으면서도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그가 들려줄 보성소리 ‘심청가’가 기대된다.

글. 송소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017년 「20세기 창극의 음반, 방송화 양상과 창극사적 의미」의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해 판소리와 창극 관련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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