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하나

국립창극단 ‘리어’
물살처럼 엉켜들다 망망대해로
당신은 나를 얼마큼 사랑하는가. 허망한 세상에서 헛된 희망을 품고 리어가 묻는다. 아무리 헛되다 해도 희망하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욕망했어도, 욕망하지 않았어도 회한이 남는 인생이므로. 물이 차오른 무대, 고요한 윤슬과 엉켜드는 물살이 그 생을 증언할 때. 우리는 리어와 함께 어디까지 흐를 것인가. 연출가이자 안무가인 정영두, 작창을 맡은 음악감독 한승석, 작곡가 정재일의 언어가 무대에 펼쳐지기 전, 얼음이 막 녹기 시작한 봄의 초입에서 ‘리어’의 각본을 쓴 배삼식을 만났다.

창작만큼이나 각색을 많이 해왔다. 각색 작업의 경우 지금 여기에서 공명할 의미를 찾아 원작으로부터 하나의 콘셉트를 길어내는 일이 주요할 것 같다. 리어의 경우는 무엇이었나.

요즘 느끼는 것이 있다. 한편으론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 필요한 도덕과 윤리가, 다른 한편으론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욕망이, 제각기 양쪽에서 과잉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성이나 윤리만으로 세상을 온전히 설명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쉬운가. 리어는 자신이 짜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과 지혜를 다해 어떤 선택을 한다. 그것은 결국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 된다. (웃음)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와 도덕은 자신을 비추는 반성적 거울일 뿐, 다른 이들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무기가 돼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작품 전체에 물 이미지를 접목했다. 물처럼 흘러가 버리면 그뿐일 허망한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지 못한 채 휩쓸려 발버둥 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받아들인다고 해서 평화로워지는 것만은 아니다. 세상은 코딜리어를 고요히 두지 않고, 생의 덧없음을 인정하고도 그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욕망하고 가슴 치는 것이 우리의 삶일 테니까. 그 커다란 흐름과 작은 소용돌이를 작품에서 모두 아우르는데, 때로 한쪽에 더 마음이 기울기도 하나.

원작엔 없지만 추가한 부분 중 극 초반 코딜리어 홀로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장면과 마지막쯤 그에 대해 자책하는 장면이 있다. 어쩌면 차라리 언니들처럼 스스럼없이 욕망을 좇아 그 물결 속에 뛰어들어 흘러가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를 가장 괴롭힌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내가 노자 철학의 중심 이미지인 물을 가져온 것은 인의예지로 대변되는 유가 철학을 한 번쯤 뒤집어 반성해 보자는 것이지, 관조적으로 초연하게 세계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삶의 대안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리어의 세계 안에서는 앞물이 흘러가고 뒷물이 흘러오듯 세대가 교체되고 각각의 욕망이 부딪치는데, 에드먼드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가 가감 없이 드러내는 욕망의 소용돌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선 이 세계의 본모습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순한 선악의 대립 구도를 벗어나 그들 각자가 정당한 욕망을 성취하려 애쓰는 것을 담으려 했다.

가을에서 시작해 봄에 이른다. 아마도 물이 얼었다가 녹는 사이일 것. 그 계절감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다.

리어를 물 위에 띄워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은 하나의 속성으로 특징지어지지 않고 변화무쌍하다. 삶이기도 하고 죽음이기도 하고, 순수이기도 불결이기도 하다. 잠자듯이 꿈꾸는 물도 있고, 경쾌하게 희망에 차 흘러가는 물도, 폭포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도, 천천히 기진한 듯 넓어지다 결국 바다로 흘러들어 근원을 잊는 물도 있다. 다시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도, 그 위에 맺히는 구름도 있다. 제일 처음 떠올린 이미지는 가을날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저수지에 잠깐 고여 있는 물이었다. 그러다 둑이 터지면서 분란이 일고, 광기에 빠진 리어가 쩡쩡 얼어붙은 순백의 물 위를 헤매는 이미지를 그렸다. 마지막 파국이 올 때는 언 강물이 녹아 삐걱거리면서 흐르고 우르릉거리면서 부딪치는 것을 상상했다. 텍스트로 다 드러나지 않는 이런 이미지들을 연출과 연기, 음악으로 잘 표현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사실 텍스트 바깥에 있으니까. 가능하기만 하다면 대사는 전부 지워내고 무대 위의 움직임 같은 것들로만 표현될 수 있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한다.

각 분야의 걸출한 전문가들과 협업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고독한 직업 같다. 홀로 쓰는 글과 언제나 공동 작업일 수밖에 없는 공연 사이에서 스스로 취하는 입장이나 태도가 있을까.

가끔은 혼자 일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까 생각할 때도 있다. (웃음)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볼 때 아무리 혼자 쓰는 글도 그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다양한 다른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일 테니까. 사실 나는 무대를 예감하면서 쓸 뿐이기 때문에, 다른 매체로 작업하는 안무가나 연출가, 음악가가 자기 언어로 온전하게 옮겨 다시 쓸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선택일 것 같다.

연극에서 희곡이 연출과 연기를 입게 되는 것에 더해, 창극에서는 글이 음악을 입게 된다. 나도 가끔 작사를 할 때가 있는데, 한번 작곡이 이루어지고 나면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기가 어려워지지 않나. 본인이 쓴 글에 음악이 입혀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

왜 나는 음악적 재능을 못 가졌을까 생각한다. 항상 동경하고 좋아한다. 가사를 쓸 때는 희미한 이미지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모호한, 어찌 보면 그래서 찬란해 보이는 가능성 그대로를 실현된 음악 속에서 바라는 게 어불성설인 것 같다. (웃음) 나는 개별 곡들을 사랑할 때도 있지만, 전체 음악이 하나의 극적인 구조를 띠며 이야기를 나르는 것을 볼 때 존경스러워진다. ‘이건 당신 작품이오’ 하는 마음이 들고. (웃음) 사실 연극의 원초적인 형태는 본디 음악극이었다. 그런 점에서 창극은 대단히 매력적인 장르다. 사실 내가 말을 사용한다고 해도 결국 원하는 것은 말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 너머의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고. 일상적인 말로 다 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시작되는 게 노래고. 그런 것들이 발생할 때가 쓰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 같다.

연극의 기원에 대해 말했는데, 코러스를 넣게 된 선택에 대해서도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새로운 거라기보다,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 그리스비극의 형태를 차용한 셈이다. 음악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흐름을 생각하게 되는데, 대소와 강약의 변화가 만들어지려면 음악이 넓게 펼쳐지는 순간이 필요했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란’ 같은 작품에서는 전투 장면을 압도적인 영상미로 구현해 내지만 연극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고, 이 경우는 음악적 구성으로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란’은 스케일이 크지만 무척 시적인 영화다. ‘리어’의 경우는 대사가 가사가 될 때 시적으로 함축되는 힘이 크다고 느꼈다. 창극 고유의 노랫말, 입말의 특성을 어떻게 고려하며 쓰는지 궁금하다.

판소리 어법을 지키려면 4.4조 운율을 따라야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음악적 요소가 들어오기를 기대하면서 변주하기도 했다. 쓰면서 모호하게나마 ‘여기는 진양이 어울리겠다, 여기는 중모리’ 하고 상상하기도 한다. 내 말들이 적어도 창극에서는 음악을 위한 재료로 쓰일 테니, 형식적 측면을 고려하는 거다. 그렇다 해서 사유의 섬세함 같은 것들을 포기하지는 않고, 그 안에서 드러낼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며 쓴다.

관객에 대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 있나. 특별히 창극 관객에 대해서는 어떤가.

글쎄, 관객. 다양한 관객이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 때는 지금처럼 1막부터 5막까지 어두운 객석에 앉아 보지 않고, 어떤 날은 첫 부분 보고 나가 술 마시고 놀다가 다음 날 또 중간에 들어와 조금 보고 그랬을 텐데. 극 속에는 장바닥 약장수들 노름판 같은 구석도 있고, 대중적이고 빤한 속담이나 교훈담도 있고, 또 어떤 데서는 대단히 깊은 지적 통찰도 보여준다.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는 그 목소리가 향하는 방향이 다양했고, 그 점이 대단하다고 느낀다. 나도 그저 다양한 수용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텍스트를 봐도 각자 인상적인 장면이 다를 테니. 불특정한 사람들을 향해 얘기하기도 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천 명 중 한두 사람만이라도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을 알아주면 족하다 싶기도 하다. 또 어떤 때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무언가를 단초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내는 분들을 볼 때 기쁘다. 그게 소통과 공감의 본모습이니까. A를 던져서 A를 온전히 소화시켜야 그 작품의 의미가 완성되는,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한다.

“물 위에 띄워다오.” 라고 리어의 대사를 썼다. 여러 작품에서 죽음을 다루는데, 이즈음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게 있다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은 겨울 되면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 때꾼하고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는 고양이만 봐도 애처롭고. 텔레비전 낚시 프로그램에서 물고기들이 파닥파닥 걸려 오는 것만 봐도 슬프고. 다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아 있기 위해 애쓰는구나 싶다. 결국 혼자, 옆에서 누가 지켜보고 있건 아니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사건이니까.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애쓴다.

글. 목정원 공연예술이론가. 변호하고 싶은 아름다움을 만났을 때 비평을 쓴다. 산문집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펴냈다

사랑을 갈구하던 가족들이 만든 비극의 서사, 리어왕

‘리어왕’은 두 가족의 이야기다.
첫 번째 가족의 가장인 리어는 영국의 왕으로, 솔직히 말해 아버지로서는 빵점짜리다. 세 딸 중에서 막내 코딜리어만 편애하는 것도 모자라, 재산을 물려받으려면 본인을 얼마나 잘 모실지 증명하라며 딸들을 경쟁시킨다. 장녀와 차녀인 거너릴과 리건은 리어에게 온갖 사탕발림을 일삼지만, 코딜리어는 아첨을 거부한다. 막내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리어왕은 크게 분노하며, 모든 유산을 언니들에게 줘버린 뒤 그녀를 쫓아낸다.
뒤이어 살펴볼 가족은 글로스터 백작 가문이다. 그는 리어왕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로서 심각한 결함을 지녔다. 외도로 사생아를 낳았으며, 그 아이를 데려와 기르면서 매사에 형과 차별받도록 방치한다. 평생 설움을 안고 살아온 서자 에드먼드는 적자 에드거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계략을 통해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다. 가련한 에드거는 겨우 몸만 빠져나가 도망친다.
다시 리어왕의 가정으로 넘어가자. 상속 문제를 처리한 리어왕은 왕궁을 떠나 첫째의 성에서 지낸다. 그러나 이미 본색을 드러낸 큰딸은 그를 모질게 대하고, 참다못한 리어왕은 욕을 퍼부으며 둘째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둘째는 아버지가 오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웃인 글로스터 백작의 집으로 도망친다.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하던 백작의 집은 왕실 집안싸움으로 난장판이 된다. 이 난리통에서 야심만만한 에드먼드는 애정결핍에 지친 공주들을 유혹해 불륜 관계를 맺은 뒤, 그녀들의 사랑과 권력을 이용해 아버지를 제거하려 한다. 결국 글로스터는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두 눈이 뽑힌 채 자신의 집에서 내쫓긴다.
한편 광야를 떠돌던 리어왕은 미치광이 노인으로 전락한다. 바로 그 타이밍에 글로스터 백작도 광야에 흘러들어 온다. 그는 횡설수설하는 국왕의 목소리를 단박에 알아채고 무릎을 꿇는다. 정작 자신들을 구해 준 거지가 본인 손으로 내친 장남 에드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그사이 소식을 전해 들은 코딜리어는 직접 아버지를 찾아간다. 리어왕은 뒤늦게 깨달은 코딜리어의 효심에 감격해 잠시 정신을 차리고, 매정했던 지난날을 진심으로 사죄한다.
차디찬 철창 안에서 따스한 부녀의 정이 피어나는 동안, 백작의 성에서는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는다. 질투심에 눈먼 거너릴이 끝내 리건을 독살하고, 이에 분노한 올버니 공작은 비극의 원인인 에드먼드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때 얼굴을 가린 기사로 변장한 에드거가 에드먼드를 쓰러뜨린다. 연인의 죽음을 목격한 거너릴은 이성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편 올버니는 감옥에 갇힌 리어왕과 막내 공주를 찾지만, 그새 코딜리어는 싸늘한 주검으로 아버지의 팔에 안겨 있다. 에드먼드가 생전에 보낸 자객의 소행이었다. 세 딸을 모두 잃은 리어왕은 겨우 붙잡았던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린다. 그는 코딜리어의 시신을 붙잡고 울부짖다 쓰러지고,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다.
사랑을 갈구하던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손에 목숨을 잃으면서, ‘리어왕’은 씁쓸한 여운으로 막을 내린다.

글/그림. 서메리 책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일을 하는 프리랜서. 책을 쓰고, 옮기고, 그리고 북튜브를 통해 책 읽는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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